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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민족 역사 (9)

 

14. 유대인의 세계 유랑과 유대교

a) 이스라엘의 멸망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에 대해 알아 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ㄱ)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마르 12:13~17).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ㄴ) 제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ㄷ)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
(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제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 찬양받으소서."

 ㄹ) 제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

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b) 중세시대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 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중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Ghetto)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c) 나치의 유대인 학살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나치즘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후 의심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없이 투옥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33년 독일에는 50여 개 이상의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들 수용소는 나치 친위대가 관장했다.

가장 유명한 수용소는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강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유럽에서 유태 인종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이 수립되면서부터 아유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된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하루 1,000명 이상 죽은 때도 많았다.

대부분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했다.
강제 노역과 기아, 시도 때도 없는 처형으로 산 목숨이 아니었다.
1945년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해방되었을 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인종 위생 캠프'를 설치하여 유대인을 포함한 900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d) 유대교 역사

 ㄱ)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ㄴ)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 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모슬렘 시대는 가온(Gaon 뛰어난 자. 6세기 -11세기)이라 불리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탈무드 연구가 부활되었으며
바빌론의 수라와 품베디타는 탈무드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 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문제는 가온이 제시하는 지도에 의존하며, 바빌론의 가온이 그 역할을
상실하자 이집트, 스페인, 독일의 탈무드 학자들이 이 책임을 맡게 된다.

이집트 출신으로 바빌론의 수라에서 가온으로 임명된 사디야 가온(Saadyah ben Joseph 882-942)은 유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처음으로 체계적인 유대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문법, 사전 편집, 시, 주석, 기도문, 달력 제정의 분야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성경의 아랍어 번역이며 주석인 '타프실'(Tafsir)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기독교 학자에게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븐 가비롤 (Solomon Ibn Gabirol c.1021-1056)은 네오 플라톤 철학자로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바빌론에서 유럽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자극을 받아 철학적 시를 구상해 냈고 이러한 시의 일부는 유대인의 기도문에
포함되었다.

시적 철학 작품인 '고귀한 왕관'(Keter Malkhut)은 운율이 있고 모든 절이 성경의 구절로 끝나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와 지혜를 찬양하는 성가이다.
이성에 근거한 사디야 가온의 철학은 마이모니데스 (Moses ben Maimon 1135-1204,보통 Rambam으로 부름)가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모슬렘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 팔레스타인으로 전전하다 이집트에 정착했다.
'미시네 토라'(Mishneh Torah, 토라의 반복1166-1176)는 지금까지의 할라카, 율법의 집대성이며, '모레
네부킴'(Moreh Nevukhim, 당황한 자들을 위한 안내)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

그의 이성에 대한 우위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조화는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 후 그의 책은 기독교와 유대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려 불살라졌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기독교 학자에게
철학적인 근거와 영향력을 줌으로 해서 그에 반대하는 논쟁은 끝을 맺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정립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율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유대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 출신으로 성경과 탈무드 주석의 대가인 라쉬(Rabbi Solomon Yitzhaki 1040-1105, 보통 Rashi로 부름)는
유럽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과 바빌론의 전통을 이어주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통치하에서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모슬렘이 스페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관대하게
대하자 유대인은 자유롭게 철학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ㄷ)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 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솀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ㄹ) 하시딤 운동 (Hasidism)

이삭 루리아(Isaac Luria 1534-1572)가 이끄는 카발라 운동은 하시딤의 신조를 채택하여 그 가르침을
대중화시켰다.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 운동은 신비주의에 기초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다.(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에 동참했던 하시딤이나 12세기에서 13세기에 존재하던 하시딤이 아님)

하시딤 운동의 대표는 바알 쉠 토브(Israel Baal Shem Tov c.1700 - 1760)로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과업이다.
이러한 헌신은 기쁨과 무아경을 만든다.
하시딤 운동은 도브 벨(Dov Ber) ,잘만(Shneour Zalman 1747-1813)의 제자에 의해서 '하바드'(Habad, 지혜,
이해, 지식의 히브리어 약자임)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하시딤 운동은 종교적 체험에서 지적인 노력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원래의 하시딤 운동과 다른 점이다.
하시딤 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특히 뉴욕, 캐나다, 이스라엘에서
활발하다.
뉴욕에서 포교하던 하바드의 최고 랍비인 멜루바비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1993년 1월 메시야로
선포되었으나, 1994년 6월 92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죽었다.


ㅁ) 하스칼라 (Haskalah 계몽주의)

유대인의 계몽주의는 중세의 금욕주의와 관념론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휴머니즘을 이상으로 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7세기 서구화된 네델란드와 이탈리야 유대인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18세기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역사, 철학, 과학의 습득은 유대인의 지식 영역을 넓혀 갔다.  
독일에서는 멜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5-1786)의 노력으로 계몽주의가 싹트게 되었는데, 그는 게토의
벽 안에 갇혀 있던 유대인을 세속적인 유럽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포고되자 세속적인 교육이 유대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작가는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고 월간지 HaMeassef가 발행되었다.(1783-1829)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으로 그들을 제한하는 대신 주변의 세계와 융합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계몽주의는 유대 사상과 삶의 방식에 현대화를 촉구하여 이후 자유주의, 시온주의를 낳게 하였다.
 

ㅅ)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 결과 멘델스존(1729~17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 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1860~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 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 J.G. 몬테피오레(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 ~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15. 시온운동으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과 중동전쟁

a) 시온운동 (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b) 중동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c) 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d) 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e) 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f) 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사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6.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a) 이스라엘

면적은 2만 425㎢, 인구는 625만 8000명(2001), 인구밀도는 306.4명/㎢(2001)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사악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b) 가자지구

면적은 363㎢, 인구는 75만 5200명(1994)이다.
해안선 길이는 40km, 평균너비는 8km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하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고 가자 주변에 약간의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나, 1949년 UN의 이스라엘-이집트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집트 측에 편입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랍 난민촌에 살고 있으며, 게릴라의 중요한 기지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 점령지의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가자와 예리코에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c) 팔레스타인

면적은 2만 6,300㎢이며, 영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한다.
동쪽은 요르단강(江),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펄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의 동쪽은 경사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고 비는 적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및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 ·이집트령(領)이 되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베들레헴은 1995년 12월 이스라엘로부터 반환되었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인(人)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이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이 지역은 또한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르크령 시대
(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다만 그 동안에도 12세기의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의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移住)와 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고 미국의 지원도 얻어내어 1948년에는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비롯하여 부근 여러 나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의 아랍인들이 요르단 ·레바논으로 달아났으며, 1948년의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합하여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사이에는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삼고 여러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PLO의 싸움은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비약적인 진전을 보았다.

같은 해 라바트에서 개최된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1975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108개국이 PLO를 승인하고 있다.

1979년 3월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요르단강 서쪽 연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
자치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협의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d) 유대인 (Jew)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고대에 유대인은 원래 유다, 즉 유다 지파(약속의 땅을 점령한 12지파 중의 하나) 혹은 유다 왕국의(북이스라엘
왕국과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다.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 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라틴어 Judaeus, 고대 프랑스어 Gyu, 현대 프랑스어
Juif, 독일어 Jude, 영어 Jew)가 사용되었는데, 유수 이후의 생존자들(과거 유다 왕국의 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인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BC 721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뿔뿔이 흩어졌고 점차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유다이우스(Judaeus)와 히브리어의 예후디(Yehd)에서 비롯된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Ioudaios)에서 나온 말이다.
예후디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만 나오는 형용사로서 이복형제인 베냐민의 자손과 함께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던 야곱의 넷째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즉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현재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 참고자료 (2000년 전 유대인의 분파)

 a) 바리새파

이들은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로서 B.C. 2세기의 "하시딤" (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에서 발전하여 정치적인
일들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물론 유전도 포함하여)을 낱낱이 지키는 데에 있었다.

이 표준으로 판단할 때 그들은 모범적인 유대인들이었다.(빌3:5-6).
이 목적으로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한 음식일 경우 바리새인 아닌 자로 더불어 함께 식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필연적으로 이같은 분리정책은 그들보다 못한 모든 사람들을 경멸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그들의 태도는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오늘날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사랑과 자비에 앞서 엄한 율법준수를 요구하고 수 많은 유전(사람이 첨가한 세세한 계율)을 만들어 지킨 그들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통신앙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범한 오류와 교만과 무정한 생활자세를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영향은 그들의 숫자에 비하여 미미한 것이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 유대교가 발전해온 것은 바로 이들의 노선을 따라서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과 엄한 윤리표준, 그리고 더 잘 알려진 가혹한 율법주의에 계속 강조점을 두어 왔다.
그들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지만 존경은 받았다.


b) 사두개파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찌기 정치적인 이점을 교활하게 이용하여 유력한 지위를 확보해 두었던 부요한 지주회(유대 최고
종교회의)에서 바리새파와 거의 대등한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었다.(행23:6-10)

대제사장들 중 상당수가 사두개파였거나 친사두개파였다.
그들의 종교적인 입장은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이외의 어떤 계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멸과 부활, 천사와 귀신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입장을 달리하였다.(막 12:18,행23:8).
하나의 귀족적인 소수 공동체로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지지를 별로 못받았다.


c) 엣세네파

상당히 그늘에 가리워져 있던 이 "분파"는 1947년 이래 사해사본의 발견과 더불어 극적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사해에 가까운 광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던 한 은둔종파인 쿰란 사회의 도서관에서 나왔다.
비록 이 종파가 옛세네파였는지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가 없을지라도 분명히 유사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종파는 달리는 알려지지 아니한 "의의 선생"에 의해서 필시 B.C. 165년경에 창건되어 A.D. 68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유대 반란 사건 때에 파멸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들의 원수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로서 "어두움의 아들과"의 최종적인 전투에서 마땅히 그들의 것이 될 승리와 통치권을
쟁취할 날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 동안에 그들은 성경연구에 골몰하고, 엄한 은둔 생활 훈련을 하며, 그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은 철저히 미워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지켜 나아갔다.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상세한 성경주석들을 펴내었고 구약의 모든 문구들과 구절들을 그들의 처지와 기대하는
것들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두 메시야 곧 아론의 (제사장적인) 메시야와 이스라엘의 (왕적인) 메시야-어쩌면 두 역할을 겸한 한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였다.
쿰란 문서가 그 종파 자체에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와는
아주 거리가 먼 하나의 금욕적이면서도 묵시적인 유대교의 경향이 또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는 이 고립된 집단의 유대교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다.
1947년 이전 같았으면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유대인들"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려
했을 것이나 이제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 금욕주의자 공동체의 수도원이었던 사해 근처 쿰란(Qumran)의 폐허. 로마군의 침입 위협을 인하여
그들의 장서였던 사해 사본들이 동굴들에 숨겨졌는데 1947년에 극적으로 다시 발굴되었다.


d) 열심당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로마의 통치를 최대로 이용하려 했고 또 쿰란 사회가 하나님의 강권적으로 개입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리라는 꿈을 가졌던 반면에 많은 유대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구원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뒤에 와서 열심당으로 불리게 된 이 집단은 유대백성의 혁명군이요 자유의 투사들이었다.
A.D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건을 초래한 대 반란의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열심당이었다.

예수 당시에도 실패로 끝나긴 했으나 이미 산발적인 반란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행 5:36-37).
또 백성들도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애국심에 불탄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복종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이라는
신앙에 호소하였다.


e)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들은 B.C. 722년 사마리아가 함락된 이 후 그곳에 새로 이주시킨 이방 민족들과 피가 섞인 북방
이스라엘 왕국의 살아 남은 백성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유다와 협력한 적이 없었고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불화가 분명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세겜을 내려다 보는 그리심산 위에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건축한 것(요4:20)은 유대인들이 이 이단종교를 배척한
증거였다.
B.C. 128년에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의 왕 힐카누스였다.
하지만 유대인이 그리하였듯이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그들의 권위는 모세오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구약성경은 인정치 않았다.
그들의 모세오경은 유대인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많은 유대인들처럼 그들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강림을 고대하였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와 멸시는 어떤 근본적인 신앙의 차이에서 온 것보다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온 것이 더 많았다.

 

 

* 교훈 (믿음이 이기네!)

유대민족역사 단원에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Message)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구약 시대에 일어 났던 많은 사건들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일관적으로 깨닭을 수 있는 가장 큰 메시지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미디안 족속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시험과 환난이 밀어 닥쳐도 내 능력이나 남의 힘을 빌어 이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셔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무기는 믿음이며, 무력이나 모사가 아닌 믿음으로 승리하는 역사를 일궈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조건을 세울 때 하나님께서는 흔쾌히 도와 주시지만, 의심하거나 다른 것을 의지하면 패망하게 됩니다.


요일 5/4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절대믿음=절대순종

아브라함은 노년에 낳은 외아들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불평 한마디 없이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겨 그로 하여금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준행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내 생각이나 인간적인 생각이 개입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큰 의로 여기시고 인간의 본연의 가치성을 회복해 주사
영원토록 존재하는 실체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자신이 행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절대믿음=절대행함

모세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자 자신은 능력이 부족하고 말을 잘 못해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이 문둥병에 걸렸다가 순식간에 낳는 능력을 주셨고, 그에게 할 말을
일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을 믿고 당당히 파라오에게 나가 요구를 하였고, 열까지 재앙을 내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절대믿음=절대의지

잔인한 앗시리아가 남 유다를 침공해 항복을 권유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전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테니 앗시리아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결국 앗시리아 군대는 하나님의 사자로 인해 하룻밤에 18만 5천명이나 몰살을 당하고 패퇴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절대믿음=절대충성

사도들을 핍박했던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은혜로 불림 받은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때로는 뭇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유럽과 아시아와 예루살렘을 오가며
초대교회를 맨 몸으로 일구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온전한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믿지 않으십니다.
절대 행함의 조건을 쌓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처녀가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의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을 때에도 여러 시험을 통한 그의 행동으로 확신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

 

우리 인생 70~80년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시험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나, 세상에 빠져서 사나 늘 지켜 보십니다.
이 시험에 합격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같이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살면 되지 않냐고 반문하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가 아들이 두 명이 있는데 형은 머리가 좋아 미국의 경영학 박사과정을 거쳤고, 능력이
뛰어나지만 이기적이고, 너무 바빠서 한번도 아버지를 찾지 않았습니다.
반면 동생은 비록 형만큼 머리가 좋거나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인정이 많아서 주위사람에게
잘 대해주고 아버지를 자주 찾아 늘 효도했습니다.

여러분이 재벌 총수라면 누구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겠습니까?
아마도 능력은 덜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둘째 아들에게 회장직을 물려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과 관계성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 유혹과 육신의 본능을 이기고,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라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입니다.

신명기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은 그들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함이고, 그들을 시험하사 마침내 가나안 땅이란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생을 삶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심이고, 우리를 시험하사 천국의 가장 좋은 자리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도 거져 주어지는 것이 없듯이 하늘나라 또한 거져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또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연단 기간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지고 잘 대해 주어도 감사한 마음이 없습니다.
부자 집에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가져 본 아들은 오히려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기 힘듭니다.
군대를 다녀 와서 고생을 하거나 혼자 자취를 하면서 밥을 해 먹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동안 잘 대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실감하며 효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어려움을 겪을수록 하나님과 예수님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탄은 어려움 없이 엄청난 축복과 지혜와 영광을 받았지만 감사한 마음은 커녕 교만한 마음이 싹터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보면 우리는 지금 처한 어려움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클수록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만심에 빠져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8/10 Behold, I have refined thee, but not with silver; I have chosen thee in the furnace of affliction.
(KJV)

(
보아라, 내가 너를 연단시켰으나, 은처럼 제련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질로 달구어 너를 선택하였다.)

영문 성경을 봐야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데 연단이란
제련(製鍊)을 말하고, 제련이란 광석이나 원료를 용광로에
녹여서 원하는 금속을 뽑아 내거나 전기분해나 화학물을 이용하여 순도를 높히는 일
말합니다.
은(
銀) 방연석(方鉛石)에서 추출하는데 시안화액의 농도를 높여(0.3∼0.5%), 충분히 교반하고 침출시간을 길게
하여 산소를 제거하여 수율(80∼90%)을 높히는 시안화법이나
전기분해정련에 의한 건식법을 사용합니다.

이에 반해 철(
)은 철광석을 코크스과 함께 1,000~1,300 ℃의 용광로에서 비중 차이로 분리한 선철로 만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들어 쓰시기 위해서는 먼저 극심한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게 하시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악행을 분리하게 해 온전한 의인으로 만들어 쓰십니다.
부러 해병대에 입소해 고생을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강한 정신력을 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갈급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게 되고, 결국 영생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욥기 23/10 그러나 그는 내가 택한 길을 알고 계시니 그가 나를 연단하시면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

시편 119/71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좋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규례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니이다.

 

인류의 역사 6000년은 하나님이 인류를 예수님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 정결한 처녀로 성장시키는
기간입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한 처녀로 보시고, 호세아가 집 나간 아내를 사랑하듯이 하나님도 유대인을
한 처녀와 같이 사랑하나 그들이 바람이 나서 우상신을 섬기니 질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류를 한 처녀로 보십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우리는 어린 아기를 키울 때 젖 주고 기저기 갈아 주며, 걸음마를 가르치고, 말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8 살이 되면 학교에 보내 각종 학문을 배우게 하고, 예의 범절을 가르치고, 그릇된 행동을 하면 가끔
매를 들어 혼을 내 줍니다.
제대로 교육 받아 심성이 착하고 교양 있는 처녀는 결혼해서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셔서 훈육시켰고, 잘못된 길로 나갈 땐 자연재해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을 내 주셨고,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셨습니다.
기한이 차 인류가 온전한 진리를 깨닫고 사랑스런 처녀와 같이 성장하면 예수님은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정결한 신부된 그리스도인을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결국, 누구든 뜻 안에서 노력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상을 받고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태 11/12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KJV)

(침례자 요한 때부터 천국은 무력으로 침공을 당하느니, 무력을 쓰는 자는 힘으로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이 역시 영문성경을 봐야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데, 침례인 요한의 불신에 실망한 예수님은 누구든지 무력을
쓰는 자는 힘으로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지하낙원밖에 갈 수 없었고, 예수님이 오시고서야 천국문이 열렸습니다.
즉 천국의 자리는 누구 것이라고 정해지지 않았고, 누구든지 진리와 믿음으로 온전해지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고 명예와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결한 신부로써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찬송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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