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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복음 - 4

 

칭의구원과 성화구원

 

구원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혼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은 칭의구원과 성화구원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칭의구원은 누구나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주이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진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구원을 받는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으며, 이로써 우리는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관권 아래로 들어가며,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그런데 보통 교인들이 칭의구원만으로 구원을 마쳤다고 믿고, '이제 구원(천국행)은 떼어 놓은 당상이니 세상에 빠져 마음껏 즐기며 살아보자!'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는 죄인신분이 의인신분으로 바뀌는 칭의구원과 죄인성분이 의인성분으로 바뀌는 성화구원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칭의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갖게 되지만 몸 안에 죄성이 남아 있어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의인이라고 억지로 믿거나 선전하고 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칭의구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성화구원입니다.

성화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옛사람을 버리고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중생'과, 내 영이 은혜와 진리 가운데 거룩히 자라가는 '성화'와,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영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좁고 험난한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출이집트 시 홍해를 건넌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40년동아 연단 받으며 광야를 거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 갔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합니다.

 

* 칭의구원과 성화구원이 나누어진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딤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일단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지 않도록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칭의구원을 받고 온전한 진리를 알아 성화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29-30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하여 예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마태 22/14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많아도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적으니라.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려고 부르셨고,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칭의구원을 주셨으며, 마지막으로 성화구원을 통해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게 하려고 칭의구원을 받아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성화구원을 이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고후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칭의구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에베소서 2장 8~9절로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물로 주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성화구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빌립보서 2장 12절로 항상 주님의 말씀에 항상 복종해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온전히 이룰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이룬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 칭의구원이고,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서 실현되어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이 성화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10/10 도둑은 오직 도둑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내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마태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벧전 1/16 이는 기록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칭의구원으로 생명을 얻고, 성화구원으로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이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고 거룩해져야 천국에서 죄 짓지 않고 서로 분쟁이 없이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가출한 청소년 딸이 윤락가에서 잔뜩 빚을 지고 고통 받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아와 모든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 다시 집으로 데려 오는 것이 칭의구원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다시 구습을 좇아 가출해 예전 생활로 돌아간다면 칭의구원이 아무 소용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집에 돌아온 딸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며,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올바로 가지고, 아버지께 효도하며 주위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야 하는데 이것이 성화구원입니다.

 

마태 25/26 그의 주인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줄로 알았으니

요한 13/3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은혜 구원에만 안주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무른 사람은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소리를 들음으로, 날마다 진리와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복음을 전파해 성화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칭의구원에는 아무 행동도 필요치 않지만 성화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열심히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예를 들어 부부가 아무리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상대방만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불륜과 외도에 빠진다면 이혼에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형제들로 더불어 화평함과 하나님께 대해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마태 3/12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니라.

마태 18/34 그의 주인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이 자기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들에게 넘겨주더라.

그러므로 칭의구원 받은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성화구원에 해당하는 자신의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알곡은 칭의구원과 성화구원을 모두 받은 사람이고, 쭉정이는 칭의구원만 받고 성화구원은 등한시 해 버림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왕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아 칭의구원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옥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칭의구원과 성화구원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 큰 모순과 심판에 빠질 수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 확실히 구분하고 체득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와 임마누엘 예수

 

현재 한국교회에는 예수 믿으면 육신의 복을 받는다는 기복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건강, 경제, 집안 등)에 봉착했을 때 예수님께 구하고 의지해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영의 구원인데, 너무 육신적인 일에 집착해 '영적 성장'(진리 탐구)을 등한시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복주의는 단지 문제해결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교회에 봉사하면 자연히 세상사람보다 더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나가고,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내는 것도 모두 육신의 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요한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전혀 무익하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사도 바울도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심판),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구원) 했습니다.

 

마태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8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에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나 육신을 위해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받기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기복주의의 문제점 중 하나는 육적인 일을 너무 기도에 의지하다 보면 자칫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병원에서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는 질병을 기도로 고친다고 했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라고 했듯이 육신의 문제는 일단 육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거나 운동을 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 믿고 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거나 아픈 경우도 적지 않은데, 기복주의 교리로는 사탄이 주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누가 12/31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여지리라.

바른 신앙인의 태도는 나의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바라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므로 알아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는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 드리는 성숙된 신앙을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18~19 내가 자주 너희에게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느니라.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며 그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기들의 수치 속에 들어 있고 그들은 땅의 것들을 생각하느니라.

로마서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일이고, 그들의 종말은 파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복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해 죄의 몸을 멸함으로써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게서 떠난 이것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푸겔로와 헤모게네가 있느니라.

따라서 육신이 죽는 십자가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예언사역과 축귀사역과 신유은사에만 집착한 사람은 예수님께 꾸중만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초창기 각종 기적을 행할 때에는 교인들로부터 신망을 얻었으나, 육신이 죽는 십자가 복음을 전한 후부터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행전 3/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나에게 없으나 내가 가진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마태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

우리는 예수님 이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예수', '임마누엘 예수'로 세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병 고쳐주고, 귀신 쫓아내고, 떡 먹이는 육신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 가심으로써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는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6/8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으며

고전 6/17 그러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참된 신앙인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를 거쳐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예수님과 하나 되는 '임마누엘 예수'를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효자와 불효자

 

구원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고, 사람의 아들(육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영, 신)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단지 교리적으로만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며,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직 온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수님이나 베드로나 바울 같이 순종하는 효자가 되느냐?' '아담이나 사울이나 가롯 유다와 같이 불순종하는 불효자가 되느냐?'를 가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장의 두아들 비유에서도 말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아들보다 말로는 거역했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아버지께 순종한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하셨습니다.

효자는 하나님께 칭찬과 사랑을 받고 천국을 상속 받을 것이지만, 불효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저주를 받고 영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자식이 자신을 낳아주고 평생 사랑해주고 보살펴 준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도리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내게 생명을 주시며, 항상 사랑하시고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집에 아버지와 세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들은 어릴적부터 매일 사고만 치고, 타락하였으며, 툭하면 가출하고, 아버지께 반항하는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크게 일은 벌이지 않지만 사랑이 없어 형식적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불순종 하는 아들입니다.

셋째 아들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고 믿고 섬기며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은 불신자에 해당하고, 둘째 아들은 불순종하는 크리스쳔을 상징하며, 셋째 아들은 순종하는 크리스쳔을 나타냅니다.
또한 첫째 아들은 육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은 혼을 상징하며, 셋째 아들은 영을 상징합니다.

진정한 효자는 아무 사심 없이 아버지를 위하고 섬기고 기쁘게 해 드립니다.
만약 형식적으로 아버지를 대하거나 유산을 바라고 아버지를 위한다면 아버지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는 사랑으로 교감하는 셋째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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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25/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내가 너로 많은 것들을 다스리도록 하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라.’고 하더라.

달란트를 남긴 착하고 신실한 종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므로, 많은 권세를 받으며, 주인의 기쁨에 동참할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른 신앙은 나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며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심 없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는 천국을 상속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육신의 복을 받거나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위하고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마저도 하나님께 믿고 맡깁니다.

 

살후 1/8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불길 가운데서 벌하시리니  

에베소서 5/6 아무도 너희를 헛된 말들로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진노는 믿음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 위에 임할 것입니다.

 

요한 5/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스카랴 13/8 주가 말하노라. 온 땅에서 삼분의 이가 끊어지고 죽을 것이나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영생을 얻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 온 땅에서 삼분지 이(불신자와 불순종한 크리스챤)는 끊어지고, 삼분지 일(순종하는 크리스쳔)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8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2/3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들 가운데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들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아무리 신앙이 좋고 성경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육신 안에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육신의 정욕과 욕망대로만 행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본래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5/50 그러나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상속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옛 사람'(육)을 예수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 장사지내고,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져 진리로 자라난 새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복음에 순종할 때에만 죄에서 해방되고, 깨끗하고 거룩해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요한복음 3장 16절과 요한복음 17장 3절이 하나 되어 에베소서 4장 13절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에 이르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흘리신 보혈로 죄사함 받는 칭의구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은혜 구원으로 사탄의 주관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주관권에 들어간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밝히 앎으로써 영생을 얻게 되는 성화구원입니다.

마지막으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되는 것이 온전한 구원이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빌론 느브갓네살 왕의 구원

 

2580년 전에 일어났던 바빌론 느브갓네살 왕의 구원은 이 시대에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내게 진정한 기쁨과 유익을 주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만 줄 뿐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능한 젊은 남자 도공이 있고,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여자 2명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어리석은 여자는 도공의 작품에만 관심이 있어 비싼 돈을 들여 도자기를 사 들이는데만 관심을 둡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여자는 그 도공과 인간적으로 친해져 그와 결혼하게 되니 그 도공이 만든 모든 작품과 앞으로 만들 작품까지 자신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 한 분을 얻으면 우주 만물을 소유한 것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전지전능 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내게 충만하면 나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생수의 강(진리와 은혜)이 넘처 흐릅니다.
이와 같이 원인과 목적을 소유하는 것이 결과와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값진 것입니다.


* 다니엘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느브갓네살 왕을 온전히 구원시키는 과정을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1. 느브갓네살 왕이 어느날 금신상에 대한 꿈을 꾸고서 바빌론의 박사와 술객을 동원해 꿈을 풀려고 했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고, 오직 다니엘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꿈을 해몽합니다.
이에 느브갓네살 왕은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2/45~48 손을 대지 아니하고 산에서 깎아낸 돌이 쇠와 놋과 진흙과 금과 은을 산산조각 낸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후에 있을 일을 왕에게 알리신 것이니이다. 이 꿈은 확실하며 그 해석은 분명하나이다, 하니라.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다니엘에게 경배하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봉헌물과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게 하니라. 왕이 다니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능히 이 은밀한 일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진실로 너희 하나님은 신들의 신이시요, 왕들의 주(主)시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시는 이시로다, 하고 왕이 다니엘을 지위가 높은 자로 삼고 그에게 큰 선물을 많이 주고 바빌론 온 지방의 치리자로 삼으며 총독들의 우두머리로 삼아 바빌론의 모든 지혜자들 위에 두니라.

 

2. 그러나 느브갓네살 왕은 우상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게 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를 격렬한 풀무 불에 집어넣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느브갓네살 왕은 풀무불을 7배나 뜨겁게 해 세 친구를 집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하나님의 보호로 몸은 물론 머리카락과 옷도 타지 않았고, 느브갓네살 왕은 풀무불 속에서 이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을 봅니다.
이에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종을 환난에서 구해내시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도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 3/28~30 이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를 보내사 자신을 신뢰하며 왕의 말을 바꾸고 자기 몸을 바친 자신의 종들을 건지셨으니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그 신에게 경배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과 언어들 중에서 무슨 일이든 잘못 말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는 그 몸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고 그들의 집을 거름더미로 삼을지니 이는 이런 식으로 능히 사람을 건져 낼 다른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고

 

3.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깨달았고, 우상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바빌론이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이루었다는 자만심에 빠졌다가 소처럼 풀을 먹는 정신병에 걸려 광야를 헤메이게 됩니다.

7년동안 광인이 되어서 짐승처럼 살던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이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 금수와 다름 없는 존재란 것을 깨닫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됩니다.
이에 명철이 돌아와 병으로부터 회복되었고, 하나님을 진정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하지만 땅의 거민은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 4/34~35 그 날들의 끝에 나 느부갓네살이 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매 내 지각(知覺)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니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송하며 영원토록 사시는 그분을 찬양하고 공경하였나니 그분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그분의 왕국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3단계로 진행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성막에 성막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듯이 말입니다.
출이집트 당시에는 이집트와 광야와 가나안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몸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았고, 신약시대에는 은혜의 복음을 통해 죄들의 사함을 얻으며,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에는 영원한 복음을 통해 죄성에서 해방돼 온전히 거듭나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통해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신약시대에는 은혜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었지만 죄 많은 육신을 다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곧바로 이민족의 침입을 받거나 질병과 가뭄 등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은혜의 시대에는 정죄하지 않는 집행유예 기간으로 곧바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이를 악용해 더 담대히 죄를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마지막 심판 때 드러나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

따라서 예수님 재림하실 때 영과 혼과 몸이 책망할 것이 없이 보존되기 위해선 정욕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거룩한 새 사람을 덧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는 은혜에서 벗어나 그의 고난(죽음)과 영광(부활)에 동참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추수꾼이나 농부와 같이 알곡과 열매를 바라시니 거듭남으로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욕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였느니라.

 


 

 돌아온 탕자의 구원

 

먼저 하나님이 왜 인간을 만들었나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외롭고 쓸쓸할 때 강아지를 데려다가 키웁니다.
인간 스스로 부족함이 없는데 왜 굳이 돈 들여가면서 먹이주고 배설물 치우는 수고를 할까요?

그건 사랑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대상을 가지고 흐를 때 차고 넘칩니다.
인간은 강아지를 사랑하고 강아지는 그 사랑에 응답해 꼬리를 흔들고 반가워하면서 사랑이 흐릅니다.

사랑은 삶의 원동력이자 목적입니다.
가장(家長)이 힘들여 일을 하는 이유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없는 사람은 생의 목적을 잃고,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과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대로 믿기 전에 저에게는 삶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아무 삶의 의욕도 없고,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으며, 내 안에 사랑이 없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나 자신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 나 자신을 사랑할 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신이 가진만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예화가 바로 탕자 비유입니다.
부자 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탕자는 어릴적부터 어려움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래서 매일 주어지는 풍족한 삶에 대해 감사함이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를 떠나서도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졸라 재산을 챙겨서 세상에 나가 보았더니 하는 일마다 안되고 사기당하고 이용만 당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아버지만큼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해주지 않았습니다.
허무한 생각에 술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보았지만 남는 것은 상한 몸과 허탈한 마음 뿐입니다.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하니 친구도 다 떠나가고 아무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돼지 키우는 일을 했지만 배가 고파도 돼지 사료도 먹기 힘들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예전에 아버지 품에 있을 때 아무 걱정 없이 풍족히 살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늘 사랑으로 보살펴 주던 것에 대해 고마움을 모르고 젊은 혈기에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고 뛰쳐 나온 것에 대해 후회감이 몰려왔습니다.

 

결국 탕자는 다음과 같이 결심합니다.
"내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리라.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염치도 없지만 아버지가 날 받아주기만 한다면 집안 머슴이라도 해도 좋다."

거기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따뜻함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풍요로움이 있지 않은가?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를 위한다고 한 일들이 오히려 나를 망쳤다.
결국 나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탕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렇게 돌아온 아들을 혼내거나 내 쫓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감싸주고 잔치를 베풀며 환대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 의나 조건 없이 그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어려움만 몰려왔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행복하려고 했지만 불행한 일만 몰려왔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사랑하면서 살려고 했지만 미움과 다툼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선하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죄악과 타락만 쌓았습니다.

나 스스로는 죄악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는 동물적 본능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는 사탄의 주관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는 죄의 유혹도 뿌리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품을 떠나 방황하고 죄를 짓다 돌아와 하나님 은혜로 구원 받은 탕자의 입장입니다.
세상 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벌을 주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도 은혜로 살리고 복을 줍니다.

그런데 집을 나갔던 탕자가 대문을 박차고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와 안방을 차지하고, 잔치상을 내어 오라고 하면 아버지는 아직 정신 덜 차렸다고 내 쫓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 되었지만 마음은 종의 신분으로 내려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하며,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고, 형제를 섬기지 않으며, 오히려 군림한다면 하나님의 분노를 사 내 쫓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죄의 원인은 욕심과 교만이며, 이로인한 죄의 기원은 불순종입니다.
사탄과 아담과 사울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를 짓게 되었고, 결국 사망과 고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님과 같이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한 자에게 다시 채워 주시고 살리실 것이란 부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

 

고전 10/11 이제 그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끝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권면으로 기록되었느니라.

구약의 거의 모든 사건은 구원과 관련된 예표와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건은 구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집트 왕 파라오의 압제 속에 채찍질을 맞아 가며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 희망이 없이 참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직 누군가 인도자가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파라오의 양자였던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임을 깨닫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동족을 구하기 위해 왕자의 자리를 내 놓고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40년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 받은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 입어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려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독생자였던 예수님은 죄로 인해 사망의 고통속에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40일동안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의를 세우셨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원주로 받아들인 사람을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눈 앞에 홍해가 가로 막고 있고 뒤에서는 파라오의 군대가 전차를 몰고 쫓아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구름과 어두움을 내려 이집트 군대를 막아 주었지만 홍해를 건너지 않으면 곧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갈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이집트 땅에서 완전히 빠져 나올 수 있었고, 뒤따르던 파라오의 군대는 바다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사탄의 권세에서 완전히 빠져 나오게 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로 들어섰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으며,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사막 생활은 뜨겁고 배고프고 힘들었고, 이집트의 안락한 생활이 떠올라 모세를 원망했으며, 다시 이집트의 이방신을 섬기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에 은혜의 복음을 듣고 기쁨에 넘치지만 주를 믿고 따르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괴롭고 힘든 일이며, 불만이 쌓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결국 다시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게 됩니다.
이는 내 몸 안에 아직도 육신의 본능과 사악한 마음인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며, 광야에도 이민족이 있었듯이 죄사함 받은 후에도 악의 세력이 나를 핍박하고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진리 말씀을 변질시켜 온전히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고 살거나, 다시 세상(이집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겪게 되며, 이 시험을 이기는 자만이 온전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광야에서는 온전히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먹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먹으면 내 영은 성장하지 못하고 부패하게 됩니다.
또한 광야에서는 집을 짓고 농사를 하며 정착하지 말고, 장막을 짓고 양을 키우며 옮겨 다녀야 합니다.
거듭남의 기간에는 한 곳에만 머물지 말고 진리 말씀을 찾아 나서야 하며, 나그네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평했던 이집트에서 나온 1세대들은 모두 벌을 받아 광야에서 죽고,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2세대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요단 강도 물이 깊어 건너기 힘들었지만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언약궤를 메고 건너니 물이 얕아져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요단강은 신구약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문둥병에 걸렸던 나아만 장군은 엘리야의 권고에 따라 요단강에서 7번 목욕을 하고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과 침례인 요한 모두 요단강에서 침례를 주었고,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침례인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에서는 구제불능의 죄인인 내 옛 사람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 지낼 때까지 연단을 받게 됩니다.
출이집트는 모세가 이끌고 가나안 입성은 여호수아가 이끌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을 받지만 성령(예수님의 영)의 인도로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 거듭남으로써 온전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온전한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나의 옛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나를 사망으로 이끄는 고집과 관념과 본능과 욕심과 습관과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 구원만 받고 안주해 품성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교만한 마음과 특권의식만
늘어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악해지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견고한 여리고 성에 다다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높고 견고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오직 하나님만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7번 돌고 나팔을 부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6천년의 경륜을 거치고 온전한 진리 말씀을 깨달아 전 세계에 전파하면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천년왕국을 여시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은 계시록의 영원한 복음이나 작은 책에 해당하는 말씀이며, 입에서는 다나 배에서는 쓴 말씀일 것입니다.
온전한 진리 말씀으로 깨끗이 단장된 신부된 그리스도인은 대환난 전 들림 받아 하늘 혼인잔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으로 의로 훈육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함입니다.

로마서 7/12 그러므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사람을 바르게 양육시키는 것은 바로 선악을 구분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시해 놓은 율법과 계명입니다.

따라서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7/18 이는 앞서 있는 계명이 참으로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여졌음이라.

그러나 구약 율법은 그 가지수가 너무 많고, 형식적인 것도 많으며,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앞의 계명(율법)이 연약하고 무익함으로 폐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되기를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고 하였도다.

갈라디아서 5/4 율법으로 의롭게 된 너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무용하게 되고 은혜로부터는 떨어져 나갔느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죄인이 되어서 '율법의 저주'(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음)를 받으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구약시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예수님의 은혜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구원주 되심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요한 13/3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마태 22/37~3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고 하시더라.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모든 형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엑기스를 짜 내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요한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  

요한 14/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들을 지키리니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 또 우리도 그에게 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 정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나의 말들을 지키지 아니하느니라.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신약시대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천사들이 그의 거처를 마련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이며, 그의 계명들은 절대로 율법과 같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부부가 사랑으로 맺어져 결혼해도 바람 피지 말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계명을 지켜야 결혼생활이 유지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구원은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 받지만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구원 받은 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은혜(칭의) 구원과 관계가 있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성화 구원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형제들과 더불어 화평함과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화평함은 형제 사랑이고, 거룩함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13/4~8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조건적인 사랑과는 다른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께서 그러한 사랑을 2000년 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예수님의 마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인 사랑을 품고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율법의 목적은 육신(옛사람)의 죽음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최초로 주어진 계명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밖에 없었는데, 아담은 그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계명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를 짓는 것이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또한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고, 먹고 살기 위한 노동과 해산하는 고통이라는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면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이 있는지도 모르고 육신의 본능에 따라 각종 욕심과 쾌락을 좇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왔고 저주 아래 놓였기 때문에 이 저주를 푸는 방법도 사람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따라서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평생 죄를 짓지 않은 예수님은 스스로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사 모든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쓰고 대신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영원토록 효력있는 속죄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그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자신의 모든 죄들을 씻고, 사탄의 주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육신은 계속 죄를 지으려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육신(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냄으로써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진리와 은혜 가운데 거룩히 자라가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영화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인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죄인은 저주 받아 죽고, 의인은 복을 받아 영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요구를 십자가에서 이루시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육신(옛사람)을 처리하고, 하늘로부터 난 새생명(새사람)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심과 율법의 도움으로 내 옛 사람이 구제불능의 죄인임을 깨닫고 정욕에 따른 옛 사람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었다고 믿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핍박을 달게 받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7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변질의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옛 사람이 변화되어 거룩함에 이르는데 있지 않고, 내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지내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진리와 은혜 가운데 자라난 새 생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로부터는 옛 사람에 해당하는 육신의 습관과 혈기와 본능과 욕심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며, 오직 성령의 열매만 흘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인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본진상 진노의 자녀인 내 옛 사람이 처리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원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나니...(교만과 겸손)

 

누가 5/30~32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의 제자들에게 불평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더라.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경멸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지적하며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 환자가 몸 전체로 암 세포가 퍼져 가는데 자신은 건강하다고 버티며 의사에게 몸을 믿고 맡기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내가 근본적인 죄인이고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깨닫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회개하며 나를 맡기지 않고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서 의인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정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족할 것이 없고 편리하고 즐거운 현대 생활 속에서 괴로움과 애통함을 느끼고 예수님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지금 깊은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병의 이름은 '죽음'으로 20세가 넘으면 남녀 모두에게 걸리고, 특효약이 없으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여지껏 수천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아왔지만 이 병을 이긴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병의 특징은 20세가 넘어 성장을 멈추면 생성되는 세포보다 죽는 세포가 많아져 주름살이 생기고 늙어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힘이 줄어들고, 이빨이 시리고 빠지며, 밥 맛도 떨어지고, 잠도 잘 안오며, 우울해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거나 빠지며, 허리와 관절이 아프고, 침이 마르고, 기억력이 떨어지고, 눈이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립니다.

간혹 건강식품이나 약이 나와서 그 진행속도를 늦춰 준다고 하지만 시한만 연장할 뿐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은데 많이 살아봐야 100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죽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희어지면 염색을 하고, 주름살이 생기면 보톡스 주사를 맞으며, 피부 미용에 좋다면 기꺼이 거금을 주고 화장품을 사거나 피부관리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로는 내 내장의 기능이 점차 쇠약해지고, 면역능력이 떨어지며, 뇌세포가 파괴되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위 사람이 죽거나 상가집에 다녀 오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나도 귀납법적으로 생각할 때 죽음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Dispair, Hopelessness)이란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어떤 무엇으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고, 사람은 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소망(Desire)과 희망(Hope)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데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고등학생은 대학가는 것이 소망이고, 대학생은 취직하는 것이 소망이며, 직장인은 결혼하고 승진하는 것이 희망이고,  전세집에 살면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이 소망이며, 부모가 되면 자식이 잘 되는 것이 희망입니다.

반대로 대학에 떨어지거나, 취직을 못하거나, 결혼을 못하거나, 실직하거나, 집을 장만하지 못하거나, 자식이 잘못되면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대학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승진하고, 집 장만하고, 아이 낳고 잘 키운다고 진정으로 행복하고, 근심 걱정이 없어질까요?

오히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소원을 이루었는데 마음 속에 불안과 공포가 몰려 오고,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기며, 허탈한 기분을 느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이는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 환자가 잠시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불안과 공포를 잊었는데, 게임에 이겨도 다시 자신의 현실이 떠오르며 자괴감에 빠지고 절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 사람들은 절망에 부딪칠 때 크게 세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 이를 받아드리지 않고 반항하며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막 살아보자."라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앙심을 품고 병을 더 퍼뜨리는 것이 이런 예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잊기 위해 항상 쾌락을 추구하거나 취미생활을 갖습니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거나 게임을 하면서 괴로움을 잊습니다.
그러나 이는 잠시 고통을 잊혀줄 뿐, 술 먹은 다음 날 머리만 아프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됩니다.

둘째, 절망으로 인해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걸려 방 안에 혼자 지내거나 급기야 자살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망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셋째, 내 힘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뭔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와 같은 문제로 고민한 사람들의 책을 뒤져 보고, 성경을 살펴 보거나 교회를 기웃거리며 뭔가 있지 않을까 부딪쳐 봅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때로는 속기도 하지만 조금씩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을 느끼기 전까지는 무엇인가 애타게 찾지 않으며, 가장 문제가 큰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느끼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빙산에 충돌해 서서히 침물해 가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침물하는 배의 특실 안에서 최고급 의상을 입고 최고급 음식을 먹는다 해도 마음에 별로 위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서로 구명 조끼나 보트를 뺏으려고 아귀 다툼을 벌입니다.

그러나 설령 보트에 타더라도 차거운 겨울 바람에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긴급히 'May Day!', 'May Day!'를 타전하고 다른 배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절망 속에 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주 예수를 믿고 그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 주여, 제게 손을 내밀어 주소서!"
"오 주여, 제게 빛을 비춰 주소서!"
"오 주여, 제게 길을 일러 주소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나가는 배에서 내려준 사다리를 잡지 않고, 혼자 힘으로 노를 저어 대서양을 가로질러 육지에 이르겠다고 생떼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아무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이토록 간절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을 닮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재다능하고 자신감에 넘쳐 자신이 하나님인 양 착각하고 웬만해서는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주로 죽을 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거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수족을 못 움직이는 비참한 지경에 처해야 애타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아니면 극심한 환난을 당하거나 몸이 극도로 아프거나 악령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거나 죄(중독)에 빠져 허덕일 때 간절히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위에 해당하는 최악의 조건을 모두 겪은 후에 옛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주신 사랑과 생명과 말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 전에 예수님 옷자락을 붙드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거나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다가 심판 받아 지옥에 가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 온전히 주님만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결국 사울왕 같이 자기 멋대로 행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때문에 주님은 자신을 낮추고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주님을 찾는 죄인을 찾으시는 겁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자신의 신부로 맞이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뭐든지 해 줄 수 있는 새 신랑처럼 여러분께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 입니다.

 

누가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더라. 그 바리새인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하더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도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이는 자신을 높이는 자마다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니라.


교만한 바리세인은 자신의 의를 자신 있게 내세우고, 죄인인 세리와 비교하며,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세리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애통한 마음과 죄인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한 사람은 스스로 의로운 바리새인이 아닌 죄인된 세리였습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보시기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정욕으로 가득 찬 별 차이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입니다.

 

우주에 은하가 1000억개가 있고, 한 은하에는 별이 1000억개가 있습니다.
20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 크기에 비하면 지구의 크기는 모래알 만하고, 별의 갯수에 비해도 지구에 있는 수 많은 모래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구의 크기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입니까?

얼마 전 TV에서 이불 속에 사는 진드기에 대해 나왔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수 많은 작은 진드기가 비듬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비듬 1그램만 있으면 진드기 수백마리가 몇 달동안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 진드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존재입니다.
게다고 우리는 더러운 돈과 자원과 권력을 놓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뺏고 뺏기며, 속고 속이며 삽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은 이 넓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아름다운 꽃과 나비를 만드셨고, 이름다운 새 소리를 만드셨으며, 풍성하고 맛있는 과일을 만드셨고, 조화로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그런 높고도 위대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세리와 창녀를 위로해 주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급기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내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에 비해 저는 모래알에 붙어 비듬을 먹고 사는 진드기였습니다.
진드기 같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엄청난 고초를 겪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이 더럽고 냄새나는 이 지구를 끝장 내는 것은 우리가 라이터로 모래알 태우는 것만큼이나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인류를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길게 참으시고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는 바로 '교만'입니다.

연약하고 죄많은 내 처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함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결코 교만에 빠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루시퍼(사탄)를 아름답고 지혜롭게 창조했지만 교만에 빠진 루시퍼는 결국 재물과 권력에 욕심을 부려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피조물로서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렵다고 불평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켜 온전한 의인으로 키우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자는 가장 좋은 곳에서 모든 피조물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통치하며 지낼 것입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까?

10년동안 고생하면 대기업 총수를 주겠다고 제안하면 아무도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대기업 총수는 결국 늙어 죽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짧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영원한 하늘왕국을 상속시켜 주시고, 영화와 복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인자하시며 홀로 높으신 하나님께 무릎 꿇고 찬양하며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성에서 빠져 나오라!' (세상과 나)

 

창세기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가 말하기를 "네 목숨을 위하여 도피하라. 네 뒤를 돌아보거나, 어떤 평지에도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그래야 소멸되지 않으리라."

천사들은 소돔성에서 머뭇거리는 롯에게 손을 잡아 이끌며 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소돔성을 빠져나와 산으로 대피하라고 하였습니다.
롯이 사위들을 설득했지만 사위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아내와 딸들도 반신반의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밤이 지나 날이 밝아 오고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에 천사들은 억지로 롯과 아내와 딸들의 손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창세기 18/20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들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

전에 하나님은 두 천사와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 심판하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50명이 있어도 소돔을 멸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의인이 50명뿐만이 아니라 10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의 죄악을 정탐하기 위해 온 두 천사는 소돔 성문에 앉아있던 롯의 간청으로 롯의 집에 초대받게 됩니다.
롯은 평소에 선량한 마음으로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이런 평소의 선령한 태도가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소돔 사람들은 잘생긴 남자천사 두 명이 롯의 집에 들어가자 그들과 동성연애를 하기 위해 롯의 집으로 몰려들어 갔습니다.

두 천사를 내어 달라는 소돔 사람의 협박에 롯은 차라리 내 딸들을 범하라고 하였지만 소돔 사람들은 듣지 않고 롯을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습니다.
이에 두 천사들은 롯을 집 안으로 잡아당긴 후 문을 닫고,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의 죄가 크므로 주께서 성을 멸하실 것이니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하라고 하였습니다.

롯이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렸으나 사위들은 롯이 농담하는 줄 알고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롯은 천사들의 강권으로 반신반의하면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소돔성을 빠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평지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해야 한다고 했지만 롯은 도주하기 가까운 작은 성읍으로 대피하기를 원하니 천사가 허락하여 소알이란 성읍으로 대피하게 됩니다.

누가 17/32~33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으면 보존하리라.

롯이 소알에 들어가 해가 중천에 솟았을 때 하나님은 소돔 위에 불과 유황을 비처럼 내려서 소돔과 고모라와 주변 평지의 모든 사람과 생물들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쳐져서 소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어나 소돔지역을 살펴보니 그 지역은 화산재로 뒤덮혔고 연기가 피어 올랐습니다.

 

성경 속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소돔의 멸망이야기가 성서 고고학에 의해 진실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동지역에 있는 사해(Dead Sea)는 물이 증발해 소금기만 남아 있는 곳으로 소돔지역으로 의심되었던 곳입니다.
1920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사해 북동쪽 고대 유적지인 툴레이랏 엘-기술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수천년 전에 건설된 신전과 형형색색의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1965년에는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사해 동편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밥 에드라'라고 불리는 고대도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은 서기 전 2000년경에 수천명이 거주하던 대도시임이 밝혀졌습니다.
고대 사해 변 싯딤 골짜기에는 5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소돔과 고모라는 그 중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다섯 왕이 싯딤 골짜기의 다섯 왕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해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같은 지명이 등장합니다.
1973년 이 지역 탐사에서 서기 전 3000년경에 설립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다섯 도시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밥 에드라, 누메이라, 사피, 페이파, 카나지르로 이름 붙혀졌습니다.
다섯 도시의 특징은 모두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변에 건설되었다는 점입니다.

 

전도서 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악인들이 담대히 죄를 계속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은 살아서 받지 않으면, 죽어 영혼이 되서라도 수십배 수백배 이상 받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소돔지역을 비롯하여, 그리스의 크레타와 로마의 품페이가 대규모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멸망하였습니다.
이곳들은 모두 동성연애, 성적 문란, 매춘 등으로 성적인 범죄가 극에 달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고 의인이 없으면 대대적인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노아 때에도 사람의 사악함이 세상에 창궐하였고, 그 마음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의로운 노아 가족을 빼고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노아가 육지에 큰 배를 만들 때에 사람들은 비웃었으나 결국 그들은 40일 밤낮으로 내린 비에 의해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노아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고 7일 후 비가 왔듯이, 말세의 7년 대환난이 닥치면 정상적인 구원의 문이 닫힙니다.

세계전쟁이 일어나고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고, 순교로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온전히 거듭나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정결한 신부로 들림 받아 예수님과 하늘에서 혼인잔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선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던 우르 지방에서 나왔고, 롯이 소돔성에서 빠져 나왔듯이 일단 타락한 세상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딤후 3/1~5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고, 화해하지 아니하며,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고, 분별이 없으며,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말세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들이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고, 교만해져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고, 부모를 거역해 학대하고 살해하기까지 하며, 거룩하지 않고 타락하며, 정이 점점 매말라가며, 분하고 원통해 서로 고소하고, 절제하지 못해 사나우며, 악한 것을 좋아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치며, 조급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치 이 시대를 보면서 얘기하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들며, 하나님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이 소돔성이요, 크레타요, 품페이요, 우르지방입니다.
사람들은 성적으로 타락해 성매매와 원조교제 동성연애와 포르노가 횡행하고, 가정폭력이 난무하며,이혼율이 높아지고, 사람들은 알코올 마약 담배 인터넷 등 각종 중독에 빠져 살고 있으며, 사회범죄와 자살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여인들은 사치와 유행에 휩쓸려 다니고 있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과 인쇄물이 범람합니다.

 

요일 5/19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게다가 온 세상은 아담의 타락 이후 악마의 권세 아래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악한 본성과 사탄의 주관으로 점점 더 포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하고 무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이나 록 그룹들은 이젠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 법원 앞에 세운 십계명 돌판을 자유주의자들이 치워버렸습니다.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세상은 사탄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유행과 풍속을 좇는 일은 곧 사탄을 따르는 일입니다.
실제로 현대 문명에 큰 기여를 하는 한 세계적인 정치가, 재벌, 과학자, 발명가, 철학자, 예술가, 문학가 등은 대부분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 소속입니다.
이들은 물질 문명을 발달시켜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고 신을 멀리하게 만들었으며, 인본주의적인 사상과 진화론을 만들었습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야고보서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사탄이 소유한 타락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간음한 여자는 세상에 물든 교회를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누구든 세상과 벗이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선 일단 타락한 세상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로마서 7/24~25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해 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들 중 가장 열심이었던 사도바울도 영과 육신의 다른 속성 때문에 괴로워 했습니다.
영은 하나님을 믿고 싶고 말씀을 듣고 싶어하지만, 육신은 본능대로 살고 쾌락을 추구하길 원합니다.
사람은 영성보다 육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대로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육성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으니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육신의 본능에 이끌려다니기 때문에 육신에게 만족과 쾌락을 주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언제나 힘든 억지 신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주셨을까요?

요한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으니 거듭남은 구원의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 내 육신을 주관하고, 말씀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새 사람이 되며, 더 이상 악령의 주관을 받지 않고, 성령의 인도대로 살 수 있는 상태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육신의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니 늘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나기 위해선 먼저 온전한 진리로 무장하고,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선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말씀과 찬송과 기도로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다 보면 어느덧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육신의 본능이나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와 성령의 감동에 따라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한 때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늘 사탄에게 치이고,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제가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은 근심과 걱정, 불안과 공포, 실의와 좌절 뿐이었습니다.
또한 제 육신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얻은 것은 후회와 절망, 병듦과 죄악 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마약과 같습니다.
한번 맛을 들이면 짜릿하지만 점점 중독돼 몸과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이 세상은 늪과 같습니다.
한번 빠지면 여간해선 내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내 육신은 침몰하는 배와 같습니다.
아무리 물을 퍼내도 점점 물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 육신은 길 잃은 어린 양과도 같습니다.
항상 어디로 가야될 지 몰라 늘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저는 찾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 사랑을!
저는 찾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저는 찾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 소망를!
저는 찾았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 평안을!

문제를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사망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쓰시기 위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연단하시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신 후에 이집트의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죄악은 나약함에서도 나오기 때문에 온전히 거듭나 강한 주님과 하나되면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즉 먼저 이 세상과 내가 분리돼 온전히 거듭나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야 흑암을 이기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나를 검게 물들이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방송, 폭력적인 게임이나 변태적인 음란물, 물질주의적인 세상의 사치와 유행, 술과 담배에 찌들은 타락한 세상 친구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요한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한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하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것 같이 우리도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세상에 묶어두기 위해 갖은 쾌락으로 유혹하고 환난으로 핍박하나 이를 단호히 뿌리치고 하나님께 내 몸을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요일 5/4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세상으로부터 태어난 옛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새 사람은 믿음으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거듭나고 나면 더 이상 세상의 유행이나 시류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 치더라고 창공을 차고 구름 위로 올라간 독수리 같이 이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 보게 됩니다.
내가 이전에 세상에서 느끼던 기쁨이 유치원 어린애들의 놀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즐거움은 사탄이 나를 지옥으로 이끌기 위한 꿀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에 묻혀 살면서 죽음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살려고 하지만, 지금 내 발 밑에 뜨거운 지옥불이 이글거리고 수 많은 영혼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 치고 있는데 어떻게 진정으로 평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쓸모 없게 되어 길에 버리우듯이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의 향기를 품지 않고 이 세상에 동화돼 살면 하나님께 버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과 싸워 이기려면 먼저 온전한 믿음부터 소유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믿다 돌아서면 잊어버려 세상에 얽매어 온갖 죄를 짓고 살면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을 수 있는 믿음이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며, 이 세상의 모든 핍박과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그 중에는 병고침만 받은 사람이 있고, 구원까지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혈루병 들은 여인과 농아와 소경은 병고침만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단지 자신의 병이 낫기만 바랬지 예수님을 전심으로 구원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을 감동시킬만큼의 믿음을 보인 자는 병고침과 함께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병고침을 받았으나 9명은 집으로 돌아갔고 1명은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받았으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욕심 많던 세리 삭게오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집으로 초청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부정하게 취한 재물을 변상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 받은 사람은 옛 행실을 버리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죄 많던 여인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눈물로 회개하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로 인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자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씀을 전심으로 계속 듣지 않으면 길가에 뿌린 것 같이 마귀가 은혜를 다 뺏어갑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돌밭에 뿌리운 자 같이 시험 환난에 넘어집니다.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가시떨기에 뿌리운 것 같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 욕심에 이끌려 구원에서 멀어집니다.
우리는 좋은 땅에 뿌리운 것처럼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품이 변화되고 복음을 증거해 수십배 수백배의 결실을 맺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마태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는 두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지만 이단교회나 자유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처럼 잘못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적힌 그대로 믿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이나 잘못된 교리가 첨가된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이집트 한 후 모세가 시내산에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크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우상이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만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말씀대로 믿지 않고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둘째는 단순한 믿음은 있지만 거듭나지 않은 신앙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초보적인 신앙을 벗어나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보화를 사야 합니다.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처럼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소유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내 고집과 관념과 욕심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태 12/33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고후 11/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에스겔 7/27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잘못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결국 그의 행위로 드러납니다.
영생교 같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결국 사탄의 조종을 받아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온전히 거듭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계시록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에베소서 4/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을 판별해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심판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늘 책에 적힌 그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것을 명심하고, 믿는 것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는 성숙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빛과 흑암의 역사

 

계시록 7/16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어떤 뜨거운 기운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아니하리니

전도서 12/8 헛되고 헛되도다. 전도자가 말하노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히브리서 2/15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라고 이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갖은 불행한 사건과 굶주리고 목마름과 힘든 노동과 병들고 쇠약하고 썩어짐의 고통과 인생의 허무함과 사망의 두려움과 흉악한 죄악 속에서 살면서 진정한 가치와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과 진정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갈망과 선에 대한 의지를 느끼라고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어두움이 깊을수록 빛을 갈망하고, 죄에 빠질수록 선을 지향하며, 절망에 허덕일 때 희망을 찾게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칠 때 진정한 평안을 찾으며, 깊은 슬픔에 빠져야 참 기쁨을 갈구하게 됩니다.

어렵게 돈을 번 사람이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며 살듯이 갖은 어려움과 연단 속에서 죄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참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다시는 어두움 속으로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좁은 길을 가면서 겪게 되는 어떠한 시험과 환난과 징계와 연단도 내 옛 사람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 사람을 덧입는데 도움이 되므로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

시편 126/5~6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귀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우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사야 55/8~9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

빛과 어두움, 평안과 재앙,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복과 저주, 의와 죄, 영원과 멸망,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 사랑과 미움 등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으로 먼저 나쁜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좋은 것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선하고 의롭게 창조된 루시퍼와 천사와 아담과 이브가 물질과 권력에 대한 유혹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선하게 창조된 존재는 악을 지향하고, 악하게 창조된 존재는 선을 지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악하고, 어리석고, 약하고, 썩게 창조했지만 구원주인 예수님을 통해 선하고, 현명하고, 강하고, 영원하게 만드시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무리 잘해 주어도 감사함이 없고 불평 불만 반항 불순종으로 가득했던 아들이 군대에 가서 부모와 떨어져 고생을 하면서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사랑이 싹 터 집에 돌아와 효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07/9~16 이는 그분께서 사모하는 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혼에게 선하심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이로다.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고난과 쇠사슬에 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계획을 멸시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그분께서 수고하게 하사 그들의 마음을 낮추셨으니 그들이 넘어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고난 중에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결박을 끊으셨도다. 사람들아, 주의 선하심과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할지로다! 이는 그분께서 놋 문들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들을 끊으셨음이로다.

고전 15/42~44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겨서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일으켜지며, 수치로 심겨서 영광된 것으로 일으켜지며, 약한 것으로 심겨서 능력 있는 것으로 일으켜지며, 육신의 타고난 몸으로 심겨서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지니라. 육신의 타고난 몸이 있고, 또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

욥기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악에서 벗어난 선은 다시 악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현명함은 다시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약함에서 벗어난 강함은 다시 약함으로 돌아가지 않고, 썩어질 것에서 벗어난 영원함은 다시 썩어질 것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해 어두움(죄, 거짓, 악, 미움, 고통, 슬픔, 사망)에서 건짐 받아 빛(의, 진리, 선, 사랑, 평안, 기쁨, 영생)으로 인도된 성도는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하며 충성하고 살 것입니다.

밤에 촛불을 켰을 때에는 촛불이 빛인 줄 알지만 낮에 강한 햇빛이 비추면 약한 불빛인 촛불을 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보시기엔 어두움인데 사람들은 이 세상이 빛인줄 알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구성요소(유행, 물질, 지위, 명예, 권력, 사탄, 육신, 죄, 본능, 감정, 쾌락, 애착, 자연법칙, 적자생존, 약육강식, 경쟁, 과학, 논리, 학문, 경제, 이성)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를 사망으로 이끄는 어두움에 속한 것임을 절실히 깨달아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지내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참 사랑과 말씀과 생명(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사야 9/2 흑암에서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죽음의 그림자의 땅에 거하는 자들 위에 빛이 비치었도다

요한 4/19~20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더 어두움을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요한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26/18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로 하여금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 가운데서 상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

에베소서 5/8~9 너희가 한때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라. (이는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리 안에 있음으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살전 5/4~6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니 그 날이 너희를 도둑같이 덮치지 못하리라. 너희는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이라.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자.

계시록 22/5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그들에게는 촛불도 햇빛도 필요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 무궁토록 통치하리라.

 

* 출력용 워드문서 : 영원한 복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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