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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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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링컨- 신앙의 빛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비추다
 

미국에서 최초의 대통령이 탄생한지 200주년이 되던 1989년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을 조사한 결과 16대 대통령
아므라함 링컨이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업적과 위기관리능력,성격과 도덕성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지도력과
정치력에서는 루스벨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흔히 링컨을 남북전쟁에 승리해 미합중국을 유지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인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웅변한 연설가였고, 전쟁중에도 끊임없이 유머를
구사했던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역사적인 업적과 인품,극빈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지위에 오르고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링컨의 생애 뒤에는 전쟁중에도 “내게 맡겨진 일이 많아 더 열심히
기도해야한다”며 늘 하나님을 찾았던 신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1809년 2월12일 켄터키주의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가난한 농부였고 어머니 낸시 행크스 링컨은 미혼모의 딸이었다. 부모는 둘 다 문맹이었다.

링컨이 9세 되던 해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부자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링컨은 어머니가 남겨준 흠정역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새어머니 새러부시 존스턴 링컨은 침례교인이었다.
새러부시는 에이브(링컨의 애칭)를 특히 귀여워 해 그에게 쓰기를 가르쳤다.
이 시절 링컨이 책 한 권을 빌리려고 먼 길을 걸어다니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세가 넘도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던 링컨은 한 때 그가 점원으로 있던 방앗간과 상점을 인수했지만 곧
1100달러의 빚만 지고 파산했다.

그 당시엔 파산한 사업자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만 하면 채무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링컨은 샐럼에 남아 우체부며
울타리 만드는 일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며 빚을 갚아갔다.
이 일 때문에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Honest Ave)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25세 되던 해 일리노이주 휘그당 의원으로 당선됐다.
독학으로 문법과 수학,법률책을 파고들어 1837년에 법률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젊은 시절 링컨은 당시의 무분별한 분파 싸움 때문에 기성 교회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1842년 11월4일 스프링필드에서 메리 토드와 결혼한 뒤부터 아내와 함께 장로교회에 다녔다.

메리토드는 명랑하고 재치있는 성격으로 남부 켄터키주의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는 늘 남편을 격려하고 그의 야망을 북돋웠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켄터키의 친척들로부터 적으로 취급받기도 했고 남편이 자신의 곁에서 저격당한 뒤 정신이상
진단을 받기도 했다.

1852년 한권의 소설이 미국과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다.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미국과 유럽에서 130만권 이상 팔리는
초 베스트셀러가 됐다.

북부 사람들은 이 소설에 환호했고 남부인들은 이 소설이 ‘양키(북부인을 얕잡는 말)’들의 거짓말이라고 비난했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대립이 점점 심각해졌다.

1854년 링컨의 정적 스티븐 더글러스는 노예제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제정한다.
대통령을 꿈꾸고 있던 더글러스는 남부와 서부의 표를 모두 잃지 않기 위해 이런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투표를 둘러싸고 대립이 더 극심해졌다.
이 때 링컨은 스프링필드에서 노예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피오리아 연설’을 한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산물이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 연설로 링컨은 삽시간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된다.
뒤이은 연방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더글러스에 패배하지만 1860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더글러스의
민주당이 분열한 덕분에 40%가 못 되는 표를 얻고서도 대통령에 당선된다.

젊은 시절 우울증에 시달렸던 링컨은 대통령이 된 뒤 주위사람들에게 늘 멋진 유머를 선사했다.
1m93의 큰 키에 깡마른 체구로 놀림받았던 링컨은 한 기자가 “사람에게 적당한 키는 얼마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발이 땅에 닿을 정도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그가 취임하기도 전부터 잇달아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남부연합과 연방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링컨은 전쟁에 뛰어나지 못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링컨의 연방군이 남부군보다 훨씬 뛰어난 경제력과 병력,무기를 갖추고도 4년동안이나 전쟁을
끌었던 일을 지적한다.

전쟁중 당시 중심도시였던 뉴욕에서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연방군 장군들은 부패 스캔들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링컨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늘 포용력을 발휘했다.
전쟁의 목적이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의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과 번영을 만드는 것임을 잊지 않았다.

링컨은 그의 내각에 대통령선거전에서 경쟁상대였던 상대당의 인물들까지도 끌어들였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인물이면 민주당 출신이라도 기꺼이 기용했다.

심지어 전쟁이 막바지에 달했던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민주당의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전쟁 이후의 국민 화합을 위한 그의 결단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링컨은 더 깊이 신앙에 몰두했다.
그는 역사를 이끄는 이는 하나님이며 자신은 그의 도구에 불과함을 잊지 않았다.
링컨은 전쟁중 때때로 국가금식일을 지정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또 고백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긍휼과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와 풍요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잊어왔습니다. 전쟁이라는 재난 앞에서 국가적인 죄를 자백하고 세상의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에서도 우리는 국가의 안위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링컨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호 아래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는 과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이 위대한 과제에 헌신해야 합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연방 재건을 막 시작하던 때인 1865년 4월14일 저녁 워싱턴 DC의 포드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의 총탄을 맞고 다음날 아침 사망한다.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 전 남부연합 대통령은 링컨의 장례식에서 “그의 죽음은 남부가 겪은 일 중
남북전쟁의 패배 다음으로 가장 암울한 일”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링컨을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라고 생각했다.
암살은 금요일에 일어났고 이틀 뒤는 부활절이었다.

그 해 부활절에는 많은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었듯이 에이브는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설교했다.
링컨은 살아있을 때 마태복음 12장 25절 말씀을 즐겨 인용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김지방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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