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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 죽음을 이긴 사랑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메노파 교도의 가정에서 1858년에 태어나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서울, 평야,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http://lord.kehc.org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과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


1. 머리말 - '한국 교회'

한국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기독교사에서 오랫동안 숙제로 남겨져 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물음은 감리교·장로교 등 모든 교파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교회의 경우, 각기 다른 기준에 의해 제시되어 자기 교회의 설립 상한선을 높이려는 작의성(作意性)으로 종종 나타났다.

우선 교회란 어떻게 정의되며 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는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 공동체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출 수도 있고 미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 공동체가 일정한 회집 장소나 건물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따라서, 외적 조건들의 갖추어짐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를 지속시켜 나간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믿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곧 교회 성립의 제일 요건이라는 뜻이다.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공동체를 이룩할 구성원, 곧 일정한 신급(信級 : 자격)을 갖춘 교인이 있어야 한다. 구성원이 있다는 것과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식(행위)에 의해 확인된다. 곧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집과 예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상징(세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증거(성찬)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는 공시(共時)적 혹은 교호(交互)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지속적 혹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그것은 교회가 이뤄졌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적인 불신사회에 복음이 전파될 때, 그러한 공동체적인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할 때, 교회의 시작(성립)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앞서 열거한 공동체적인 의식이 지속적 혹은 교호적으로 이뤄질 때 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문제를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시작(성립)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만주에서 수세(受洗)한 한국인들이 거기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전도한 결과 이루어진 신앙공동체(교회)를 거론할 경우, 서간도의 한인촌교회[金靑松]와 서울교회[徐相崙], 의주교회[白鴻俊], 그리고 소래교회[徐景祚] 등이 거론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885년경에 설립되었을 황해도 소래교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만주를 통해 들여온 성경에 의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도 아니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선교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 갔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말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는 1885년 6월 28일 저녁에 한국에서 가진 최초의 종교적 집회와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저녁 8시에 헤론 부부와 알렌 부부, 그리고 스크랜튼 대부인이 모여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늦어도 1년 반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외국인들의 집회에 한국인도 합석하여 예배를 드린 것 같다. 1887년 2월 27일(주일), 아펜젤러가 인도한 예배에는 50여 명의 외국인들이 참여하여 방이 꽉 찼으며 "한국인들이 우리 예배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 데서 어렴풋이 엿보인다. 문제는 외국인들만이 모였거나 외국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공동체를 '한국 교회'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졌던 신앙공동체를 한국 교회사의 한 영역으로 수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한국인이 주체가 된 '한국 교회'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 공동체는 한국에서 세워졌지만 아직 한국인과 접맥되지 않았거나,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운영에서 한국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인이 그 공동체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감당한 교회를 가리킨다. 초기에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한국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85년에 시작된, 외국인들만으로 이룩된 신앙공동체는 '한국 교회'의 출발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첫째, 한국인이 주체가 된 초기 '한국 감리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되어 갔는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둘째, 한국 감리교회 성립에 초석이 된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역할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로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에서 신앙공동체 성립의 중요한 요건인 구도자 훈련과 세례, 공중예배와 성찬 등의 공동체 의식(행위)이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된다. 여기에 사족을 달자면, 한국 감리교회의 요람이라 할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을 1885년 10월로 잡았던 결정에 대하여 새로운 검토를 요청하는 뜻도 없지 않다.

아펜젤러는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미 감리회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다.
아펜젤러에 관해서는 이미 전기와 논문들, 자료들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와 다른 여러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국 선교 초기의 실상과 한국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은 아직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아펜젤러의 기록은 한국 선교 초기에 관한 자료로서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도 그 자료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리피스(WM. E. Griffis)의 '아펜젤러 전기'(A MODERN PIONEER IN KOREA :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를 번역하고 그의 초기 교육·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 글 가운데서 배재학당의 설립 경위와, 교육의 이념과 제도, 신앙 훈련과 학생활동 등 그의 교육·선교 활동은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복음전도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 글은 복음전도 활동에 관해 이미 발표했던 글을 새로 보완하고 수정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이유는 앞서의 글이 소략하게 다루어진 면도 있지만, 그의 초기 복음전도 활동을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점이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과정에 있는 만큼, 그 시기도 아펜젤러의 입국 이후 3년간(1885∼1888)의 활동에 국한하였다. 이 기간에 구도자 훈련과 세례, 예배와 성찬 등의 신앙공동체의 의식(행위)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이 점은 바로 신앙공동체인 한국 감리교회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글에 사용된 자료는 '아펜젤러 문서'(H. G. APPENZELLER PAPERS) 중에서도 주로 '아펜젤러 일기' 부분이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답게 띄엄띄엄, 그러나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펜젤러 일기'에는 중간 중간에 '최초의 세례식', '최초의 감리교인' 등 그가 개척적인 선교사로서 중요한 기록과 평가를 남겨 놓아, 한국의 초대 교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 자료를 이용하면서, 첫 선교사의 분주한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기록을 남긴 아펜젤러 목사께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2. 초기의 전도활동 - 외국인

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신앙과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아직 건물을 바라보지 말라.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건물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감리교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꽃 피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내가 그것을 위하여 사는 기간이 최소한 1910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여, 그 기간 동안에 내가 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당신만 알도록 도와주소서. 나는 주께서 내가 이곳에서 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메시지이기에 나는 그것을 충실하게 전파하기를 원한다.……영혼을 구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대한 일이다.……그것은 영광된 일이 아니겠는가. 악마는 자신이 세워 놓은 조상숭배, 관습, 방탕 등으로 열심히 우리를 침범하나, 우리는 그를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된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아펜젤러는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 등에게며 그리고 남쪽의 농사꾼들에게 그들의 말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위의 글은 아펜젤러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당시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매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 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처음에는 복음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염원은 일찍이 그의 제물포 도착을 알리는 1885년 4월 9일자 편지에 보였으니,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그는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뜨겁고 간절한 신앙은 그의 가문의 신앙 전통에 뿌리한 것이다. 그의 부계(父系)는 스위스에서 이민 온 루터파의 신앙을 가졌고, 모계(母系)는 타락한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독일계의 메노나이트(Menonite)파의 신앙을 갖고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이러한 뿌리깊은 신앙이 이 젊은 펜실베니아인을 뜨겁게 하였다. 그는 프랭클린 마샬대학 재학 시절,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적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그 전에 출석했던 교회보다 감리교회의 분위기가 이 젊은 열정의 신앙인에게 뜨거움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아펜젤러는 초기에는 복음선교사가 행하여야 할 전도활동을 펼 수가 없었다. 복음전도는 입국후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가능하였다. 1885년에 미 북감리교 선교사로 왔던 그와 스크랜튼은, 교육과 의료 사업에 한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전 해 매클레이 목사가 와서 한국 정부로부터 허락받은 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복음전도 활동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아펜젤러는 한국 정부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면서 전도를 위한 집회를 조심스럽게 전개하였다. 그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언더우드 등과 함께 재한(在韓) 외국인의 예배를 인도하는 한편 일본인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두번째로 도착한 그 해(1885) 8월과 그 이듬해 4월에 이미 학교 일을 시작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앞서 1885년 복음선교사들의 입국에 맞춰, 알렌(Horace N. Allen)이 최초의 공식 주일예배라고 말한 주일예배가 1885년 6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선교사들만으로 모이는 주일예배가 정기적인 성격을 띈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그후 우리는 언더우드 형제 집에서 '정기예배'(regular service)를 드렸다"고 한 기록에서다.

아펜젤러는 같은 기록에서 "우리는 지금 외국인을 위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으며, "이 교회는 연합의 기초 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1886년 8월부터는 미국 공사관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정기예배 모임이 교회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886년 10월말부터인데, 아펜젤러는 다음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재한 외국인들의 '연합교회'(The Union Church)의 목회자가 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지난 주와 그 전 주에는 연합교회의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봉사하였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우리의 보고서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회중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오늘 밤에는 교회의 임원을 선출하기 위한 다른 모임이 있었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담임목사 아펜젤러……구성원간의 조화가 잘 이뤄지고 있는 연합교회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번영되고 성공적인 해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빈다."

재한 외국인 연합교회의 담임목사는 아펜젤러였지만, 그만이 예배와 설교를 주관한 것은 아니다. 설교의 경우, 언더우드와 교대했으며 다른 목사들도 설교하였다. 1886년 11월 추수감사주일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기독교사상 최초의 추수감사절 설교'를 했다. 그 이듬해 2월말에는 50여 명이 모여 예배실이 꽉찰 정도로 성장하였다. 1887년 12월 25일(주일)에도 교회는 만원이었다.

아펜젤러는 오전에 연합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봉사하는 한편 1886년초부터 오후에는 일본인을 위한 성경공부를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성경공부는 1885년에 한국에 온 일본 공사관의 직원 하야카와 데찌야(Hayakawa Tetzya)와 그의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시작하였던 것이다. 일본인 성경공부를 같이 시작한 하야카와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가을에 이 도시에 와서 우리와 친교를 맺고 주일에는 우리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우리 기도회에도 참석했고 내가 그에게 교회 출석을 권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다. 일본 북부에 있는 대학을 다닐 때 그는 이미 기독교에 관해서 배워 알고 있었다. 믿음 좋은 총장이 씨를 뿌렸고 나는 지금 그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우리 교회의 준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감리교회가 한국에서도 교인을 얻은 셈이다. 이곳 주민들이 하나님을 찾고 그들을 교회와 하나되게 할 날이 어서 오게 하옵소서."

일본인을 위한 이 성경공부는 이 해 4월초에도 3명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일요일 오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마태복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그 해 부활절에 그들 가운데 한 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기대하였고, 이런 예비적인 모임이 있은 후에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 '한국 최초의 세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펜젤러 일기에 의하면, 그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스크랜튼 박사의 딸 마리온(Marion Fitch Scranton)과 자신의 첫딸인 앨리스(Alice Rebecca), 그리고 일본인 하야카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마리온은 적어도 서울에서 최초 수세자의 영예를 얻었는데, 아마도 이 나라 전체에서도 그랬을 것이었다.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 성경공부 모임을 두고 그는 자신들의 선교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던 정기적인 성경공부는 1886년 9월에 이르러 일본 영사 유키 씨의 집에서 모이게 되었는데, 이 때는 7명이 모이게 되었다.

"오후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에서 성경공부반을 열었다. 영사 유키(Yuki) 씨는 종교에 관심이 많은데, 그렇지 않았으면 그의 집을 개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부인은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이 다시 설명되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두 명의 경찰관 혹은 무관이 들어와 함께 성경을 읽었다. 출석 인원이 모두 7명이지만 아마도 늘어날 것이다."

성경공부반이 영사의 집으로 옮긴 후에, 그의 예언대로, 1886년 가을에는 한 모임에 12명이 참석하였다. 이 사실은 일본 기독교계의 The Christian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해 크리스마스를 지난 다음날 주일(26일) 오후에는 일본인들과 함께 즐거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공부가 이제는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그의 성경공부반은 그 이듬해까지도 잘 운영되어 개종자들이 나왔다. 1887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는 일본 영사관의 무관 수기바시 고이치로(Sugibashi Koichiro) 씨가 세례를 받았다. 이 또한 꾸준히 계속된 성경공부와 아펜젤러의 설득의 결과였다.

아펜젤러가 한국인 선교에 앞서서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를 강화했던 것은 선교전략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 정부가 아직도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를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에 대한 선교는 한국인 전도를 위한 분위기 조성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선교사임을 노골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1887년 8월말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를 먼저 마련하려고 노력한 것과 관련, "일본인을 통해 들어가기를 추구하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것은 일본인들의 예배를 위해 잡아놓은 장소를 먼저 구입하고 그 후에 조용히 한국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한 정당하게 이뤄져야 하고 이뤄질 것이다"고 한 것은 바로 재한 일본인 선교가 한국인 선교에 연결되는 전략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일본인 성경공부반이 진행되어 가는 중에 서울에는 한 일본인이 '기독교서적판매소'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성경판매인인 기요노(Kiyono) 씨는 앞서 The Christian지에 아펜젤러를 소개한 데 이어 자신의 사업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나는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게를 얻었는데, 그곳에는 한국 정부의 관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나는 '기독교서적판매소'라고 쓴 내 가게 간판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을 알았다. 일본 영사가 나를 방문하여 그 간판을 당분간 철거해 줄 것을 정중히 요구하면서 그러나 판매는 전처럼 계속해도 좋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영사에게 그런 요구를 했던 것이다. 내가 기꺼이 그 요구에 응했으나, 내 사업은 전처럼 번창하고 있다. 한문과 일본어·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매일 다량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서울에는 벌써 상당량의 성경과 소책자가 퍼져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인 권서의 성경판매소에 관한 언급은 1887년 8월말에도 보이는데 내용은 위의 인용과 비슷하다. 1886년 12월 현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성경판매소가 서울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아펜젤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 다른 자료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위의 글에서 확인되는 대로 1886년말에 다량의 성경이 서울에 배포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중국을 통해 한문성경이 수입되었고 만주와 일본을 통해서는 한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한국인에 대한 전도활동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면서 일본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한국인에게도 복음선교를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학교의 출석인원이 3명밖에 되지 않던 1886년 6월 중순까지도 아펜젤러는 "종교를 가르칠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하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쳤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가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그의 일기 여러 곳에서 산견(散見)된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는 한국인들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할 수 없었다. 그가 재한서양인 신앙공동체(교회)를 인도하면서 재한 일본인의 성경공부반을 이끄는 데에 남달리 노력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색된 분위기로 알렌(H. N. Allen)이나 미국 공사관은 아직 선교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계속 만류하였고, 그런 상황에서는 재한 외국인에 대한 선교만이 그 젊은 선교사들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러다가 1887년에 들어서서 한국인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한다. 물론 그 결과로 한국 감리교회의 효시인 정동교회도 이 해에 탄생하게 된다. 이 해에 한국인에 대한 선교를 적극화한 것과 관련, 우리는 몇가지를 우선 유념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사회가 기독교 선교사를 호의적으로 맞아들인다는 증거들이 보인다. 1월 11일 고종의 왕비가 엘러즈(Ellers) 양을 통해 외국인을 초청, 궁안의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하고 고종 내외는 정자에 앉아 구경하며 정중한 식사까지 제공하였다.

아펜젤러는 이 초청 기록과 함께 "학교 일에 순조로운 한 주였다"고 썼다. 초청된 대부분이 기독교 선교사들임을 감안할 때, 이들이 내한한 후에 일관되게 취했던 의료와 교육 선교의 효과가 1887년에 들어서서 이렇게 왕실의 호의를 끌어내고 한국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또 1887년에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한불(韓佛)조약의 영향으로 선교활동에 어느 정도의 여유가 나타나고 있음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같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아펜젤러 자신은 1887년에 한국인 선교를 적극화하게 되는 계기를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곳에서 두 가지로 찾고 있다. 첫째, 그는 1887년 2월 21일에 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받음으로 자신이 이제는 "정부의 인정을 받아 한국인 앞에 떳떳이 설 자리를 마련"하였다고 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