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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 신앙부흥 일으킨 한국기독교의 선구자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월남 이상재나 백범 김구의 사례에서처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문화적 무기로 장려된 측면이 강하다.
서양이 부강해진 원인이 기독교에 있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 민족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길선주 목사(1869∼1935)는 뜨거운 성령 체험을 통해 기독교가 단순한
정신무장 운동이 아니라 생명의 진리라는 점을 깨닫게 한 한국 기독교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길목사는 기독교로 귀의한 뒤 2만번 이상의 설교를 통해 380여만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가 세운 교회는 60여개에 이르고 이를 통해 배출된 목사 전도사 장로 교사가 800여명,
세례를 받은 성도는 3000여명에 달한다.

1896년 3월15일 평남 안주 성내 후장동에서 태어간 길선주 목사는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19세 때에 사교에 빠져
여러 해 입산수도했다.

1890년 평양에 온 미국 북장로교의 새뮤얼 마펫 선교사를 만나 길선주 목사는 비로소 성경이나 천로역정같은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천로역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길선주 목사는 깊은 밤 기도하던 중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울며 회개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1897년 29세로 세례를 받은 그는 금식과 철야기도에 힘쓰고 손에 한번 성경을 쥐면 놓을 줄 모를 정도로 열중했다.

당시 외국 선교사는 우리 말에 능숙하지 않아 주로 그가 집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1903년 평양신학교가 문을 열자 그는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입학했다.
길선주 목사는 1905년 영국에서 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국에서도 그같은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의 갈등을 회개하는 집회를 계기로 불같은
부흥집회가 시작됐다.
신학생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앞장서서 복음을 전했으며 통회하고 자복하는 기도 속에서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때의 부흥집회는 ‘사경회’라는 말처럼 성경을 읽고 목사가 그 뜻을 풀이하는 형태였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군중심리에 의한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깊은 통회와 회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길목사는 이미 그 당시에 자주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양적인 팽창에만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랑이 없는 교회는 지탱할 수 없다”며 신앙의 성숙을 강조했다.

길목사는 부흥사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2년동안 옥고를 치렀다.
경제자립과 국산 장려,농촌 개발,금주운동과 같은 사회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다만 그 때까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이용해 사회활동을 했다면 길목사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그같은 운동에
뛰어든 것이었다.

1935년 11월20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 부흥집회에서 폐회 축도를 마친 길선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다.
뇌일혈이었다.
길목사의 장례식에서는 평소에 그가 즐겨 불렀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가 364장)이 울려퍼졌다.


김지방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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