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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과 천년왕국)

 

성경의 문자적 해석

1. 문자적 해석이란?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언어의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필자가 원래 의미한 바를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단지 성경언어의 통상적이며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성경의 원래 의미를 기록된 그대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적 해석은 글이나 말, 생각 등이 어떤 면으로 사용되었는지 모든 단어가 통상적인 용례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유리"라고 했으면 그것을 거울이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 유리라고 이해하는 것이며, "피"라고 했으면 그것을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다른 의미로 바꾸지 않고 실제적인 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은 때대로 문법적-역사적 해석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각 단어의 의미가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사실과 연관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은 문법과 문맥과 역사적 상황의 전후관계를 무시한 기계적인 문자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상징법이나 여러가지 수사법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상징, 비유, 예표 등은 모두 문자적 해석에서 통상적이고 평이하게 해석되며, 그것들은 문자적인 해석과 상치되지 않는다. 결국 비유나 상징에 있어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표현에 문자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자적인 해석에서 비유와 상징은 그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며, 그것이 독자에게 전해 주는 의미는 통상적이고 평이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문자적 해석은 '비유적' 언어, 즉 '상징들'이 성경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영적인' 교훈들이 그 안에 진술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성경은 "통상적으로",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법칙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받았다고 믿지 않는 학자들과 그렇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대해 자연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문자적 해석을 배제하고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한다. 풍유적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는 관계없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려는 바는 무시되고 해석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은 부차적이고 해석자의 의도가 일차적으로 되어 버린다. 펜테코스트(J.D. Pentecost)는 풍유적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올바로 평가했다.

"풍유적 해석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려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리스 철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합하려는 요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정통적인 성경해석의 자녀'가 아니라 '비정통적인 이단적 성경해석의 자녀'이다."

이러한 풍유적 해석은 이교도들의 산물로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B.C.20-A.D.54)는 대표적인 풍유적 해석자이다. 그는 성경의 각 부분에서 "표현이 이중적일 때, 이미 알려진 사실이 반복될 때, 단어들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때..." 등의 경우에 다른 뜻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창세기 22:11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내세에서 살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했으며, 창세기 2:21에서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든 것은 신화적인 설명이라고 해석했고, 출애굽기 33:1,3의 "약속받은 카나안 땅"은 "육신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라고 했다. 결국 그에게는 문자적으로 "우유"였던 것이 풍유적으로 "고기"를 의미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필로 이후에 판태누스(Panteanus, A.D.18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155-215), 오리겐(Origen, A.D.184-254),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등에게 이 방법이 전수되었는데, 이들 모두는 초기 성경변개의 절정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오리겐은 "Mr. Allegorism"이라고 불릴 만큼 풍유적 해석을 했다. 그는 신약과 구약에는 모호하고 비이성적인 부분들은 물론 우화들과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한 예로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이 실재했던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신화라고 했으며, 창세기 18장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간 기록 역시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출애굽기 1:18-22에서(이집트에서 산파들에게 사내아이들을 강에 버리라는 문맥에서) "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혼의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기능들"로, "산파들"을 "구약과 신약 성경"으로, "남자의 씨"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는 영적인 지식으로 각각 해석했다. 이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이 적당하게 의미를 부과한 것이다.

 

2. 풍유적 해석

초기에 풍유적 해석을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계약신학자들이 "구속", 즉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모든 초점을 그리스도에 맞추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스러운 사실들이 모여 있는 것이 구약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318명의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종들의 숫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 318을 헬라어 알파벳으로 표시하면 T I H 인데, 여기서 T는 십자가의 모양이고, I H는 헬라어의 예수의 처음 두 글자라고 해석함으로써 318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어떤 하나에 자신이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를 자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풍유적 해석이다. 이러한 예는 해석하는 사람 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오늘날 행해지는 이러한 풍유적 해석의 예는 열거할 수조차 없이 많다.

이렇게 초기 성경변개자들에게서 유래한 풍유적 해석은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대 바실(Basil the Great),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 등에게 전수되어 이들 모두가 예외 없이 이 풍유적 해석을 했다. 특히 오리겐과 어거스틴 이후로 교계에 풍유적 해석이 넓게 유포되었으며 어거스틴은 이러한 해석으로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영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는 무천년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시기에는 루터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고 문자적 해석을 했으며, 그들은 한 본문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의미밖에 없음을 올바로 주장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성경 변개자들과 성경의 옹호자들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도 차이를 보이게 된다.

 

3.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이유

이미 성경의 기록과 연관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했지만 이 시점에서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은 언어 그 자체의 목적과 관습에 맞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인간과 교제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인간에게 전하기에 충분한 언어를 만드셨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대화와 성경 기록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언어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즉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충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 해석을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알 수 없다.

한 단어는 분명히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단어가 하나의 특정 상황 속에서 사용될 때는 통상적으로 하나의 의도된 의미만을 지닌다. 이것이 지각있는 사람들 사이에 상식적인 의사소통의 원칙이다.

화자나 필자가 말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자나 필자가 단어들을 주관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곧 성경해석에서 전제되는 문자적 해석의 근거이다. 이러한 근거가 올바른 것은 성경이 수수께끼가 아니라 계시의 책이기 때문에, 즉 열려진 책이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글을 읽든지 읽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언어의 관습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언어의 기능기기도 하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의 상징이나 비유나 은유, 또는 다른 형태의 표현은 늘 이차적인 것이다. 누군가 "나는 학교에 간다."고 말하거나 글을 쓰면, 사람들은 그가 선생님과 학생들, 교실과 책상과 칠판이 있는 실제적인 장소에, 곧 학교에 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기서 "학교"란 "배움과 학문과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실제적인 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지식을 얻기 위한 순례를 떠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는 화자나 필자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자기가 의도한 바를 말하기 위해서 단지 "나는 학교에 간다"는 말을 인용했을 뿐이다.

성경을 이와 같이 풍유적으로 해석하면 무지한 사람들은 "야! 깊이 있고 영적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다르게 해석한 것이며, 해석자의 사사로운 견해를 영적 양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자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둘째,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에 맞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언어에 관한 동일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기록된 단어가 통상적인 뜻을 지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에 부합하는 문자적인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세째, 문자적 해석은 그 해석의 타당성을 보증받을 수 있는 해석이다. 만일 평이하고 통상적인 문자적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해석한 것의 타당성은 상실되고 만다. 만일 기록된 글자 그대로의 성경 본문이 없고, 또한 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통상적이고 평이한 문자화된 기준이 없으면, 인간의 상상력이 초래할 수 있는 우화적 해석의 다양성은 상대적 진리를 낳게 된다. 성경에서 통상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해석은 성경의 기록된 의도와는 관계없이 해석자가 그 의미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

넷째, 문자적 해석은 성경예언의 성취를 올바로 증거하는 해석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 - 탄생, 성장, 사역, 죽음, 부활 등에 관한 예언들 -이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예언들이 비문자적으로 성취된 예는 전혀 없다. 이것은 문자적 해석을 강력히 지지해 주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재림에 관해서도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은 물론 성경 전체에 걸쳐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4. 문자적 해석과 올바른 적용

사람들은 해석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을 혼동한다. 이는 영감과 감동을 혼동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영감과 감동의 구분이 중요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 문자적 해석과 올바른 적용을 위한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① 각 단어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②단어 상호 간의 문법과 관련성을 분석해야 한다. ③ 가까이 있는 문맥과 멀리 떨어져 있는 문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작게는 앞뒤 몇 절의 문맥에서, 크게는 한 장 전체나 그 성경 전체와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직접적인 문맥의 연구뿐만 아니라 성경대 성경의 비교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법적으로", "문맥에 따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함으로써 위의 세 가지에 근거한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적용은 "교리적 적용", "역사적 적용", "영적 적용"을 나누어서 해야 한다.

(1) 교리적 적용은 성경의 모든 구절이 특정한 사람들(유대인, 이방인, 교회)에게,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다.

(2) 역사적 적용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역사의 어느 때에, 어디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3) 영적 적용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이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구절은 사람을 바르게 하거나 가르치기 위한 영적 교훈으로 적용하는 것이다.『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롬15:4).

이와 같이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기본적으로는 교리적 적용을 하지만 영적인 적용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영적인 진리가 담긴 말씀을 그리스도인의 교리로 가르치거나 그 반대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다 그리스도인의 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적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과 목사들은 영적 적용을 목적으로 풍유적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5. 문자적인 해석의 열매

문자적인 성경해석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할 목적으로 언어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여 그 메시지를 분명하게 해석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문자적인 해석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는 학자들은 성경의 일부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게 풍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풀러는 "구약의 예언들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이 얼마만큼 적용되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나에게는 여전히 매우 당혹스런 문제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일관되게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만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또 "기록된 그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천년주의자인 해밀턴(Hamilton)은 이러한 고백을 했다 : "우리는 구약성경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메시야의 지상왕국에 대해 전천년주의자가 그리는 바로 그러한 그림을 제시해 준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것이 구약의 약속들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야 왕국이었다." 이와 같이 헤밀턴은 만일 자신이 문자적 해석을 따랐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런 이유로 파인벅드(Feinberg)는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무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문자적인 해석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게 함으로써 성경에서 구분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게 한다. 즉 이 땅에는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고전10:32)과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서로 다른 경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일정한 시기가 나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전천년주의와 하나님의 경륜

일반적으로 종말론에 관한 세 가지 이론을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로 제시하곤 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 년"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관계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에서 나온 것으로, 각 이론들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요,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며, 무천년주의는 천 년이라는 기간은 불특정한 기간으로서, 하나님의 어떤 완성된 기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천 년이 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천년왕국 같은 세상이 일정 기간 지난 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 이론에 대한 극히 제한적인 지식일 뿐이다. 이 세 이론에 대한 진정한 차이점은 성경의 역사관과 성경의 해석 문제, 또한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에까지 관계되는 성경 전체에 대한 각각의 관점이다.

전천년주의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믿고 해석한다.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따라 발견되는 여러 다른 경륜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종말에 대한 자세에도, 단지 주님께서 천년왕국 이전에 오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한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이 없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이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구령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는다.

반면 후천년주의나 무천년주의 체계에서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 특별히 예언에 관한 부분에서 두드러지는데, 초림 때 이미 이루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믿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속한 예언 부분에서는 비유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종말에 관한 부분 또한 전천년주의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 두 체계에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신 다음에 천년왕국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천 년 또는 불특정한 일정 기간이 의롭고 아름다운 상태로 지난 다음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생각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개인의 구령보다는 오히려 사회와 세상에서의 역할에 더 초점을 맞춘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악하니까 떠난다."가 아니라 "악하니까 고쳐야 한다."이다. 심지어 세상 문화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전천년주의와 나머지 두 체계는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겠다. 천 년이라는 기간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후천년주의가 무천년주의보다 문자적인 해석을 더 취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후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언제부터 천 년의 시점을 잡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긴다. 후천년주의자들의 천 년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복음 전파와 개혁 등을 통해 세상이 의롭고 아름답게 되는 천 년인데, 언제부터가 천 년이었는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 천 년인가? 그렇다면 1313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어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할 때부터 천 년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2523년에 재림하시게 되니 앞으로 500년 이상이 남았다. 아니면 아직 그 천 년이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1000년 이상이 남았으니, 아주 요원할 뿐이다. 결국 후천년주의를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입으로라도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후천년주의보다는 무천년주의를 택한다. 무천년주의를 택할 때 이들은 매우 편리하다. 일단 요한계시록 20장의 천 년을 문자적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무 때라도 재림하실 수 있다는 "편리한"(?) 입장을 갖게 되고, 칠천 년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도 믿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되면 또한 왕국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이나, 모형들에 대해서도 믿지 않게 되며, 결국 성경은 전혀 나눌 필요가 없는 책이 되고 만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 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믿지 않지만, 종말에 대한 관점은 후천년주의자들과 동일하다. 즉 인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의롭고 화평한 세상이 이루어지면, 즉 세상이 점점 발전되면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또한 후천년주의도 무천년주의의 입장을 취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는 말은 없다. 아무리 복음 전파를 하고 아무리 사람들을 계몽하고 교육시켜도 세상은 악으로 치닫는다. 이 이론들은 이 악한 세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이 두 이론은 전천년주의를 반대하는 하나의 주의로 묶이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전천년주의는 단순히 재림의 시점만을 다루는 종말론 이론이 아니다. 전천년주의는 성경을 대하는 모든 관점과 관계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성경의 구도이다. 흔히 말하는 시대 구분이 바로 그것인데, 각 시대들은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달라지는 시기를 기준으로 삼아 나뉘어진다.

예를 들어 십자가 사건은 매우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경륜은 대폭 바뀌게 된다. 십자가 이전에는 율법이 있었고, 동물의 피가 있었고, 이스라엘이 다루심을 받게 되었으나, 십자가 이후에는 한 번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만 있게 되고, 율법 대신 복음과 자유의 법(약 2:12)이 있게 되며,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가 다루심을 받게 된다.

자, 성경이 이 십자가 사건 하나로만 나뉘어진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무천년주의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이 바뀔 만한 사건은 그 외에도 여럿 있다. 인간의 타락이 그것이고, 노아의 홍수가 그것이고, 아브라함의 선택이 그것이며, 출애굽도 매우 중요한 기점이다. 십자가 이후에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그로부터 1000년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또한 커다란 기점이다.

인간의 창조 때부터 타락까지는 그 기간이 매우 짧을지라도 한 시대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죄가 없었던 유일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때를 "무죄 시대"라고 하는데,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자유롭게 교제하셨다.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으며, 하나님의 경륜은 무죄한 인간을 다룰 때와 같을 수 없었다. 이들은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양심 시대"라고 불린다.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는 변화가 없지만, 홍수 이후에 노아는 마치 아담과 같이 아무도 없는 광활한 땅에 새로운 종족을 번식시킬 첫 인류가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노아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부터는 조금 다르게 경륜이 바뀐다. 홍수 이후에는 바벨탑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들이 연합하여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이 흩어졌을 때에는 여러 민족들을 이루어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물론 인간의 죄성이나 구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간의 양심을 다루시기는 하나, 왕국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시대를 "인간정부 시대"라 한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했던 적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처럼 온 인류를 멸하지 않으셨다. 이때 변한 하나님의 경륜은 온 세상이 아니라 한 민족을 택하시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될 한 민족, 즉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셨고, 그 민족을 온 세상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셔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심과 동시에 그분의 통치의 모델 국가를 만드시려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복으로 언약해 주셨고(창 12:1-3; 13:14-17; 15:18-21), 그 언약은 그의 아들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 간다. 이들에게 주신 민족적인 복은 아직 언약이었을 뿐이고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언약 시대"라고 하며, 다루어지는 사람들이 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이었기 때문에 "족장 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다가 이 언약이 구체화된 것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사건이었는데, 이때 그들은 민족적인 탄생을 하고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율법은 이 새로운 국가의 통치 기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으로 보자면 양심을 대체할 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거나 구원하실 때 구체적인 기준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은 여전히 양심의 통제를 받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의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이때를 "율법 시대"라고 한다.

십자가로 인해서는 교회가 탄생했고, 이때는 "교회 시대"라 불린다. 다른 말로 "은혜 시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약간 불완전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이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시대에 걸쳐 저변에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율법 시대에 아무리 희생제사로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왜 그 사람을 죄를 지은 즉시 죽이지 않으셨는가?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오직 은혜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때 주어지는 은혜는 다른 시대에 누구에게나 주어졌던 은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은혜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의 휴거로 끝나게 되는데, 그 후에는 왕국이 펼쳐지기까지 잠시 동안의 과도기로 "환난 시대"가 있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에는 모든 경륜들을 완성하듯이 메시야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천 년 동안을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 이 세상은 의와 화평으로 회복된다. 이때를 "왕국 시대"라고 한다. 그 후에는 잠깐 동안의 마귀의 반역과 그에 대한 심판으로 땅과 하늘을 소멸시키시는 것과, 백보좌 심판이 있게 되고, 드디어 영원히 그분의 왕국이 펼쳐지는 "영원 시대"가 있게 된다.

이것이 전천년주의의 기본적인 구도이며, 후 무천년주의의 관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들이 시대들을 나누는 것은 십자가를 기준하여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것인데, 사실은 이 둘도 제대로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를 전후하여 시대를 나누지만,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구원에 대해서는 차이를 두지 않는다. 즉 십자가 이전에는 오실 그리스도를 보고 구원받았고, 십자가 이후에는 오신 그리스도를 보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구약에 있는 동물들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므로,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를 믿었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은 유대인들이 다루어졌고, 신약은 교회가 다루어지는데, 교회는 영적인 유대인으로서 구약 유대인들이 범죄한 이후에 그들이 받을 모든 약속들과 복들을 교회가 취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유대인과 교회에 대한 구분도 없어졌다. 결국 구약 성도들과 신약 성도들에 대한 구분도 없어지고,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신약에 모두 성취되어버려 더 이상 성취될 예언은 없고, 하나님의 경륜은 엉망이 되고 만다.

이처럼 전천년주의는 시대 구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구분은 단순히 구분을 위한 구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이러한 시대 구분은 하나의 종착적인 결론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천국의 완성"이다. 바로 여기에서 후 무천년주의와 구별되는 전천년주의의 특징이 있다.

후 무천년주의자들에게 있어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로 인해 구속이 완성되었고, 사탄은 십자가에서 머리가 부숴졌다고 그들은 믿는다. 따라서 성도들은 승리한 기반 위에서 복음과 더불어 계속 전진에 전진을 할 것이고(계 6:1,2을 해석하는 그들의 방법에 따라), 역사는 지속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그 시점의 한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을 중심으로 삼는 후 무천년자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십자가에서 머리가 부숴지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단지 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지, 아직 형의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집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야 있을 것이다(롬 16:20). 따라서 전천년주의는 성경에서 십자가라는 하나의 축이 아니라, 십자가와 재림이라는 두 개의 중심축을 발견한다. 구약의 예언들은 더러는 십자가를 예언하지만, 대부분이 재림을 예언한다. 재림으로 펼쳐질 그 의로운 왕국,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을 이루시고자 그토록 여러 경륜들을 펼치시면서 시대들을 통해 역사를 주관하셨다. 아담에게 땅을 주신 것도 이 땅에 대한 그분의 통치권의 위임이요, 노아에게 다시 땅을 주신 것도 새로 펼쳐진 땅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들의 정부를 세워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그분이 통치하실 하나의 모델 국가로 삼으셔서 이방 위에 우뚝 서게 하셨으나, 그들은 반역하여 이방 국가들처럼 왕을 요구한다. 결국 인간들에 의해 잘못된 왕이 선출되었으나(사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다윗)을 주심으로 그분의 통치권을 회복하셨다. 다시 그 왕국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범죄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고야 말았지만, 때맞춰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려 오시어 천국을 전파하셨다(마 4:17). 그분께서 친히 그들을 다스릴 왕이셨다. 그러나 백성들의 거부로 그분은 대관식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인간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어떤 왕도 주어지지 않는다. 왕은 올라가셨고, 왕국은 연기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유대인)도 흩어졌고, 그 사이에 이 세상은 그 왕국을 차지하려는 이방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그분의 몸된 교회를 남겨 두시어 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지만, 그들은 영적인 백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백성들마저도 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흑암 속에 가리워져 버렸을 때, 인간이나 자연이나 망가질 대로 망가져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된 바로 그때에, 마치 역사의 클라이막스를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연출하시듯이 그분은 재림하시어 마귀를 멋지게 물리치시고, 처음부터 그분의 것이었던 그 왕국을 차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전천년주의의 역사관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누는 구도 자체는 전천년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지만, 성경 해석 방법에서 문자적인 해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또 전천년주의 체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평화와 세상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은 믿으면서도 세상이 악해진다는 것이나, 대환난이나 적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전천년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시대를 구분한다 하면서도 각 시대의 특징을 섞어 놓거나, 교회 시대에다가 구약의 규례를 적용하거나, 유대인의 경륜에 속한 표적들을 적용하거나(예를 들어 은사주의자들) 하는 사람들도 진정한 의미의 전천년주의자가 아니다.

전천년주의를 단순한 종말론의 한 부류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구약과 신약의 구원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체계 정도로만 인식해서도 안된다. 전천년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참된 성경 해석 방법이며, 성경을 참으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취해야 할 체계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와 관련해서 각 시대들과 언약들과 예언들과 모형들, 그리고 각 부류의 사람들과 사탄과 왕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부분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교회와 왕국

전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교회와 왕국을 구분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천년주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교회 시대가 펼쳐지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은 후 왕국 시대가 펼쳐진다고 본다. 반면 후천년주의는 십자가 이후로 교회 시대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그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이므로 교회 시대는 동시에 왕국 시대가 되며, 그 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철저히 전천년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1. 그러면 왜 후천년주의자들은 교회와 왕국을 동일하게 보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왕국에 대한 두 가지 면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다스리시는 것과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다스리시는 것과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둘 다 말씀하고 있지만, 후천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다스리심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영적 다스리심은 현재적인 사건이다. 반면 하나님의 실제적인 다스리심은 미래적인 사건이다. 미래라는 것은 분명히 예언을 다루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제적인 땅의 통치는 성경의 수많은 예언들 가운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이 예언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취된 예언들에 대해서는, 그 성취된 것들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이다.
설사 믿는다 해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사고는 "구약은 신약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생각들에서는, 구약은 모든 것이 모형이고, 신약은 모든 것이 성취이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들이 신약에서 성취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성취될 것이 없고, 그 성취된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예언되었던 모든 것들이 신약에서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은 전혀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교회만이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 비록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재림을 믿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재림과 관련해서 언급되어지는 모든 예언들은 철저히 외면하면서도 재림을 믿지 않으면 이단이 되니까, 단지 재림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뿐인 것이다. 

물론 구약이 신약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사법과 구속에 대한 말일 뿐이다. 분량적으로 말할 때, 구약성경의 대부분 예언인데, 이미 언급했듯이 그 예언들은 모두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면 구약은 성취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구약"이라고 말할 때는 "율법"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8:13은 『그가 말씀하시기를 "새 언약이라."고 하셨으니, 그가 먼저 것은 옛 것이 되게 하신 것이라. 이제 낡아지고 오래 된 것은 사라져 가느니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서 10:9도 『첫 번째 것을 폐하심은 두 번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율법에 따른 제사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모형이 되었던 수많은 동물제사들의 실체를 성취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의 용서나 구속을 위해서 동물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속죄" 사역을 수행하셨으므로, 로마 카톨릭처럼 매주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반복하는 미사를 행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서 구약이 신약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말은 율법에 따른 모형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는 율법이라는 모형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예언들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고 기다리는 것들이 있으니, 바로 재림에 관한 예언들이다. 구약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그 예언들까지 모두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2.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제시되는 예언들은 무엇인가?

예언들에는 초림에 관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예언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에 관한 것들이다. 어떻게 초림이 성취되지 않은 가운데 재림에 대한 예언이 함께 등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지자들의 관점에서 초림과 재림은 둘 다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한 사건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초림과 재림을 나누어 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오심"으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예언들은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언은 기본적으로 재림 때에 성취될 메시야의 지상통치에 관한 것들이다. 이 왕국은 그들의 백성인 유대인들과 함께 하고, 메시야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이 되시며, 그들을 책망도 하시지만 결국은 그 민족을 구원하신다(호 1:9-11). 그들의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다(렘 31:31,3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분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오셨던 것이고(요 1:11), 사도들 및 당시의 사람들이 메시야와 함께 하는 실제적인 지상 왕국을 바랐던 것도 당연하다(행 1:6).

지상 왕국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7:12-16에서는 "다윗의 보좌"로 대표되고, 창세기 15:18-21에서는 문자적인 팔레스타인 땅에 대해 언약을 주셨으며, 에스겔 48장에서는 그 언약이 성취되는 예언을 주셨다. 시편 2:8에서는 메시야께서 받으실 땅과 이방에 대한 유업이 예언되어 있고, 요엘 3:17-21에서는 이스라엘 땅의 번영과 주변 이방들에 대한 저주가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등장하는 수많은 예언들은 모두 메시야의 지상 왕국을 말하고 있지, 영적 왕국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영적 왕국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신약에 와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코데모에게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롬 14:17)는 말씀으로 인해, 이 왕국은 물리적인 나라가 아니라 거듭나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 왕국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신약에서 실제적인 왕국의 개념이 통째로 영적 왕국의 개념으로 바뀌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신약에서도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왕국의 개념은 얼마든지 등장한다. 산상설교에서는 천국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서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천국은 율법으로 통제받는다는 것과(마 5:19,20), 심지어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위임하실 때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신다. 즉 이 왕국은 구약에 그렇게도 예언되어있던 바와 같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메시야 왕국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약에서는 두 가지의 왕국, 즉 영적인 왕국과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왕국이 둘 다 제시된다. 그러나 여기서 후천년주의자들과 무천년주의자들은 실제적인 왕국은 무시하고 영적인 왕국만 부각시키고, 실제적인 왕국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도 영적으로 해석해 버려, 교회를 위한 영적 축복으로 가져오고 있다. 그들은 누가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니라... 보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라.』(눅 17:20,21)는 말씀만을 가지고, 영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왕국만을 말하지만, 성경은 또한 『... 여기 서 있는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막 9:1)고 말씀하시어, 눈에 보이는 왕국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두 왕국이 있다. 또한 그들은 마태복음 21:43의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소출을 가져올 민족에게 주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 왕국은 이스라엘이 거부했기 때문에 영적 백성인 교회에게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구약에 제시된 모든 왕국의 축복들이 교회에게로 주어졌다고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성경이 두 개의 왕국을 제시하고 있는 이상, 교회가 받은 왕국은 영적인 왕국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실제적인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3. 이때 우리는 교회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특별한 유기체로서(마 13:45,46), 그분의 몸이고(엡 1:23), 그분의 신부이다(엡 5:31,32).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분의 백성들인데, 이는 교회의 구성원들이란 각자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로서 영적인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여기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받는다. 따라서 비록 이 세상 정부에 속해 살고는 있지만, 우리의 참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목표로 살 게 아니라, 비록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상급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받은 영적 왕국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그분의 왕국에서의 삶이다.

물론 교회는 미래에 이 땅에 천년왕국이 세워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의 통치권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몸이니,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것(딤후 2:12)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것도 역시 미래에 세워질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왕국으로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세우시는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는 것일 뿐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유대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대적함으로 인해 멸망하거나, 아니면 유대인들을 대적하지 않은 경우에 그 왕국에 들어가 유대인들이 누리는 빛 아래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교회와 왕국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교회가 이 시대에 영적인 왕국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왕국이 곧 교회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국과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구분들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영적인 왕국과 실제적인 왕국이 둘 다 왕국으로 불릴 수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영적 왕국은 신약의 일부에 해당하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실제적인 왕국의 의미가 훨씬 강하므로, 수식어 없이 단순히 "왕국"이라고만 불리면 그것은 이 땅에 속한 실제적인 왕국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용례를 보이고 있다.)

(1) 왕국은 하늘로부터 세워진다(set up). 왕국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발전되거나 건설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는 것이다(단 2:44). 반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건물로 세워져 나간다(엡 2:20).

(2) 왕국에는 "왕국의 상속자들"이 있다. 『...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신 것이 아니냐?』(약 2:5). 반면 교회에는 상속자가 없다. 교회라는 것 자체가 상속의 개념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상속이란 일반적으로 이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마 5:5, 히 11:8).

(3) 왕국에는 "왕국의 자녀들"이 있다. 『그 왕국의 자녀들은 바깥 흑암에 던져져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마 8:12). 반면 "교회의 자녀들"이란 것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롬 8:16)이지 "교회의 자녀들"이 아니다.

(4) 왕국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이 왕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왕국을 누군가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귀인이 왕국을 받아서 돌아오려고 먼 나라에 가게 되었더라『(눅 19:12). 그러나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사람들이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 왕국은 몸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몸이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몸이며(엡 1:23), 진주같은 유기체이다(마 13:45,46).

(6) 왕국은 성전이 아니다. 반면 교회는 성전이다(엡 2:21). 물론 교회 건물이 성전이라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이며, 그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 각자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들이다(고후 6:16).

(7) 왕국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왕국이 임하도록 구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마 6:9,10). 그러나 교회는 임하거나 오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다. 초청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께서 오시는 날, 주님은 그분의 몸인 교회를 "부르실"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교회가 "임하도록" 기도하거나 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직 "불러냄을 받은 무리"(called out assembly, 에클레시아)이다. 무엇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는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성별된) 사람들이며,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이 세상과 완전한 결별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교회와 왕국은 여러 모로 다르다. 교회는 절대로 왕국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며, 따라서 교회 시대와 왕국 시대는 절대적으로 다른 시대이다. 왕국 시대라고 말할 때 제시되는 천년왕국은 절대로 영적 왕국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천년통치를 거부하는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는 완전히 비성경적인 교리이다. 성경적 구도에 따르게 되면, 율법 시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끝나고, 교회 시대가 온 다음, 교회의 휴거를 기점으로 땅에서는 대환난이 펼쳐진 후,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으로 말미암아 천 년간의 왕국 시대가 도래하고, 그 후에는 백보좌심판과 더불어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현재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재림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 참고 사이트 : http://www.bsbbc.com/biblesay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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