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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1

 

마틴 루터

루터 성경

독일 루터 교회

 

마틴 루터가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나타났을 때 유럽은 여러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당시 유럽의 중심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였다.
다시 말하자면 전유럽의 막대한 권력과 부는 이들 몇몇 소수의 나라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림잡아 인구 4백만의 영국, 인구 8백만의 스페인, 1천 6백만의 프랑스 시민, 1천 2백만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대략 2천만의 독일 시민들에게는 종교의 문제가 곧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 나라 중 유독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인 독일인들만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지 못하여 도저히 단합되고 통일된 힘의 집중을 형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압도적으로 많은 시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군대 하나 제대고 유지하지 못했다.
이러한 힘의 약세는 어쩔 수 없이 분열된 봉건 영주의 권력구조를 형성시킬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는 고통까지 수반하였다.
약삭빠른 로마 교황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열망속에서 강력한 통치기반을 확보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보다는 당연히 분열된 독일에서 더욱 더 엄청난 재정적 착취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가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이신칭의(i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교리를 주장하기 전 이미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과연 적법한가?'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독일인들은 전적으로 루터를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의 환호 속에는 단순히 교황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그 동안 쌓여왔던 반항 뿐만이 아니라 독일인의 민족적 자부심에 먹칠한 교황청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와같은 정치 경제적인 요소 이상의 더 절박한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세 말기 이후 산발적으로 터져나왔던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감을 하나의 집약된 혁명적 세력으로써 나타낸 결정적인 것이다.

루터는 이 혁명적인 세력을 종교개혁 초기에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 진행 중에는 대부분 독일 귀족들로부터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심연에서 시달리는 수 많은 영흔들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은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원리 곧,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오찌 민음만으로(sola fide)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중세의 한 제도 교회와 그 제도 교회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체계를 붕괴시키는 철퇴를 가하였던 것이다.

 

Ⅰ. 시대배경

15세기 말과 16세기 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 영국의 토마스 모어 같은 정치사상가가 배출되었고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과 같은 탁월하고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들이 선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신세계를 발견하여 전 유럽인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우뚝 서있었으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여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혁명적인 신이론을 체계화한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였다.
시대의 대세는 이미 변화와 창조적 활동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변화만으로 그 동안 묶여있던 중세사회 체제를 단숨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이 곁코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발전적 인간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사산이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해결할 수 없어 내버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 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의 영주들은 매년 군사를 동원하여 이 거지떼들을 자기의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무정해졌고 강퍅해졌으며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16세기 초엽의 유럽인들은 영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기로 앞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 기아과 흥수, 한 번 걸렸다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는 저주의 흑사병, 어린아이들의 조기사산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화가나 조각가들이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잘 묘사한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구세주인 대신 무지개 위에 앉아 죄인을 하나 하나 정죄하는 무서운 심판자로 그려졌다.
그림 속 그리스도의 오른쪽 귀에는 백합, 왼쪽에는 칼이 있었다. 칼은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백합화는 부활하여 천국을 향해 가는 구원을 상징하였다.

이런 그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을 피해 구원받는 길을 찾고자 했다.
교회는 이러한 절박한 심령으로 무거운 짐을 메고 찾아오는 자들에게 오히려 "최선을 다하라" 곧 행동으로 백합화를 얻으라고 말해 무거운 짐을 더 언지는 것을 조장했다.

그 당시에 구원이란 개인의 최선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래서 순례, 구걸, 성자와 성물숭배와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이들의 영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술 더 떠 성인의 뼈나 머리털을 수집하여 진열하기까지 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하였다.
만약 고해성사를 게을리하면 결국 연옥으로 떨어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고 으스름을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십자군 전쟁시에 고안된 면죄부는 16세기 초에 대단히 유행되었다.
얼마나 죽음과 심판의 공포가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이 절망의 깊은 나락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II. 루터의 생애

1. 루터의 출생과 초기교육

루터는 1484년 11월 10일 인구 4,000명에 달하는 평범한 농촌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der)는 원래 농부였으나 세상에서 행운을 잡기 위해 의지적으로 광부가 되었다.

광부생활 7년만에 만스펠트의 번성하는 구리 광산의 소유주가 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이어서 그곳의 시의원이 되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아들 루터 또한 자기처럼 출세시키기로 확고 부동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만스펠트의 라틴어 학교에서 문법과 논리학 그리고 수사학의 기초를 주입식으로 교육받았다.
루터는 그 당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라틴어 문법표를 잘 외우지 못해 회초리를 맞았던 적도 있었다.

1497년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막데부르그의 공동생활 형제단으로 들어갔으니 이 형제단은 네덜란드 개혁 운동의 하나인 근대적 경건(devotio modana)이라는 평신도 분파에 속해 있었다.
이 형재단은 학교교육 뿐만 아니라 주택공급과 집을 떠난 남학생들을 관리하는 데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루터는 이 형제단으로부터 경건 속에서 학문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배웠다.

1년 후 아이제나하 성 게오르그 학교로 옮기게 되었으니 이 학교의 선생들은 루터에게 회초리의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대신 꿈과 상상력을 키워 주는 열린 교육을 제공하였다.
루터는 여기에서 수필과 시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배양했교 이솝, 테렌스 그리고 버질과 같은 뛰어난 고전작가들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루터는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충실하였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성가대에서 찬양했으며 보통 사람 이상의 경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1501년에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하였다.
1502년 9월 문학사, 1505년 1월 22에 17명의 학우들 중 차석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좋은 성적을 빛내며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5월부터 동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루터는 이 대학에서 논변이나 대중토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날카롭게 사물을 투시하는 지적 분석력을 함양하였다.
그는 가장 우수한 학생 중의 하나였다.

1505년 여름 부모를 만나고 난 후 루터 홀로 에르프르트(Erfiuz)대학으로 다시 되돌아가던 중 슈토트테른하임(Stottemheim)마을 부근에서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갑자기 만나게 되었고 무섭게 몰아닥친 천둥소리에 놀라 꼬꾸라져버린 루터는 두려워 소리쳤다.
"도와주소서, 성 안나여(St. Anne)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왜 루터는 이렇게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수도사 되겠다는 비장한 말을 했을까?
한스 힐데부란드(Hans J. Hillerbrand)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루터는 구원에 대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심정을 이렇게 표출하였으리라.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루터가 수도사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 그 보단 훨씬 전이었으나 아직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이 천둥 번개로 인하여 루터의 수도사 서원이 구체화되었턴 것이다.

 

2. 루터의 회심

수도사가 되기를 서원한 후 그가 22살 되던 해인 1505년 7윌 17일 에르프르트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the black cloister of the Augustinian hermits)에 들어갔다.
이 수도원을 일명 검은 수도원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검정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지 2년도 채 못되어 신추에 서품(1507년 3월)되고 첫번째 미사를 집례하기에 이르렀다.
이 짧은 기간에 그는 엄격한 수도원의 모든 규정들을 다 만족시켰다.
키텔슨은 루터의 수도원 훈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랜 기간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으며, 또한 수면도 취하지 않으면서 뼈를 깎는 추위 속에서 옷을 입거나 담요를 뒤집어 쓰지도 않은 채-게다가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수행하는 것은 진지한 수도승의 삶에 있어서 일상적인 일이었으면 또 그러한 일이 요구되기도 하였다.

그는 단순히 기도나 금식, 궁핍, 탐욕의 흉내만 내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그것을 추구하였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루터는 만년에 병 때문에 매우 고생을 하였는데, 이것도 아마 자신의 육체적 요구를 너무나 엄격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격한 수도원의 규율을 거의 완벽하게 이행하여 그렇게도 빨리 정식 사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영적으로 여전히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양심은 지속적으로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이 죄를 사함받기 위해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가슴 아파하며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루터는 인간이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사랑과 자기이익에 기초한 한정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 . .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7-39)는 결단코 문자적으로 완벽하게 지켜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녀들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녀의 성공을 통해 자기만족이나 야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안에는 결국 자녀에 대한 강한 소유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자신 안에도 이와 동일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부분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헌신을 하나님께 드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단 말인가?
그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지서오가 헌신을 바로 옆에서 귀중하게 지켜보았던 어거스틴회 수도원장이자 비텐베르크 주교인 슈터우 피츠(Johannes von Staupitz)는 끊임없이 고통하는 루터에게 신학공부를 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는 루터의 관심을 고행이나 금욕에서부터 성경으로 돌리게 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성경에로 심취하게 되었고, 1509년 성경학사, 1512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르렀다.
신학공부 도중인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그는 로마를 방문하였다.

이 방문목적은 그가 소속한 수도원이 비텐베르크 주교좌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 수도원으로 남을 수 있도록 로마 교황청에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대표로 뽑혀 수도원의 독립에 청원하는 쪽에 있었지만 일단 교황청이 이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하자 비텐베르크의 주교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스승인 슈타우피츠 주교에 아무런 적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루터는 학문에 심취하였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이 당시의 교회 박사들의 책들을 탐독해 나갔다.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그는 말년에도 그 책들을 줄줄 외우면서 인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으로 루터는 독일 신비주의 영성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의 제도나 의식 그리고 선행보다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내면적 순례를 주장하던 타울러의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그는 타울러의 [독일신학]을 편집해서 출간할 정도로 타울러에게 매료되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박사가 된 루터는 스승의 자리였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신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시편강의(1513-15), 로마서 강의(1515-16), 갈라디아서 강의(1516-17), 히브리서 강의(1517-18), 그리고 다시 시편 강의(1518-21)를 하였다.
이들 강의를 하는 동안 루터에게 새빛이 비추어졌다.
그 새빛은 루터가 그렇게도 고민하던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이 빛은 신비주의자처럼 명상을 통한 하나님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나 성례전이나 순례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면죄부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구원을 주는 새 빛은 다름아닌 후술하게 될 "오직 신앙만으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만으로"를 의미하였다. (롬1:17, 이신칭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초점을 맞춤으로 그의 길고 긴 고통과 불안한 양심을 치유받았다.
루터는 그의 샘솟는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모든 박사들의 전통과 관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란 표현을 철학적으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의롭게 되시고 죄인과 불의한 자들을 벌하시는 소위 "형식적인"--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여 "능동적인"--의로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것을 혐오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혐오했다 .
나는 하나님이 매우 불쾌했다.
은밀히 하나님을 모독하기까지 하며 나는 정말이지 몹시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죄로 영원히 저주받은 비참한 죄인들이 십계명의 율법을 통한 온갖 재난으로 압박 당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복음을 통해서조차 고통 위에 고통을 더하시고 그의 의와 또 복음을 통한 진노로 우리를 위협하셔야만 하는가? . . .
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의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까지 밤낮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후에 나는 의인이 믿음을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그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하여 나타났다.

즉, 우리는 소위 "수동적인" 의를 받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은총과 자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 . .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으로 느껴졌다. 문들이 활짝 열렸고, 나는 낙원으로 들어섰다.

 

 

Ⅲ. 루터의 면죄부 논쟁

1517년 가을 어느 한 날, 요한 테첼이란 순회 설교자가 그를 호위하는 무장군대를 거느리고 독일에 나타났다.
이 키가 작고 뚱뚱한 설교자는 교황청과 교황 레오 10세의 문장을 앞세우고 당당히 행진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은 후에 면죄부 판매대금인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당신들의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외쳐댔다.

테첼이 독일땅에 면죄부 판매를 시작하게 된 내막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은밀한 이유가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화려하고 장엄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건축을 위해서 그는 막대한 자금이 긴급히 필요했다.
어디서 이 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교황 레오에겐 교회의 성직을 고액에 파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다.
마침 독일 막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의 주교인 알베르트가 마인쯔의 대주교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협상은 비밀리에 신속히 이루어졌다.

독일의 대부호 푸거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이 알베르트 대신 교황청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였다.
그 대신 알베르트는 면죄부를 팔아 그 대금의 반은 교황청에 지불하고 나머지 반은 자기가 차지하도록 미리 계획하였다.
이 면죄부 판매 대금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푸거은행의 대부금액도 갚을 예정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정치 협상을 까맣게 몰랐으나 그는 신앙적인 이유에서 도저히 면죄부 판매를 찬성할 수 없었다.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에 루터는 면제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성 교회 정문에 내걸었다.

논제는 라틴어로 쓰여졌지만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루터는 마인즈의 대주교에게도 이 논제의 사본을 보냈고, 대주교도 그 사본 하나를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그러나 교황청은 루터의 95개 논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한 미친 수도승의 입을 막으라는 명령 하나로 모든 일이 진정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교황청의 의도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추기경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원장인 카예탄이 멀리 독일에 나타나 루터에게 말하기를 "나는 뉘우친다"(revoco)라는 말 한마디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단호히 거부했을 때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란 교서로 루터를 또 다시 위협하였다.

이 교서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오 주여 일어나서 당신의 입장을 밝히소서.
야생의 산돼지가 당신의 포도나무를 침범했나이다 . . .
모든 성자들과 우주적 교회여! 일어나소서.
당신들의 성경해석이 침해받았나이다.

이 교서 접수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에 출두하여 자신의 모든 잘못을 모든 인정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루터는 불태워 버렸다.
교황청은 1521년 I월 3일 "로마 교황이 하는 일은 옳다" (Decet Romannum Pontificem)란 교서로 루터를 파문했다.

1521년 4월 17일 루터는 보름즈(Worms)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 서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새로 황제가 된 찰스 5세(그는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함)는 교황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신앙적으로는 독실한 카톨릭이었다.

황제를 위시하여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의 대표자들과 질문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그가 쓴 책의 저작권을 인정할 것인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중에 지금이라도 뉘우칠 부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기 앞에 놓여진 책들을 보고 "이 책들은 모두 다 내 것이고 나는 이것 외에도 쓴 책이 더 있습니다"고 용기를 내어 단호하게 말했으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응답했다.

루터는 간신히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루터에게는 자신의 저술 중 자신의 생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을 번복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루터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이브 여러 높으신 분들이 간단한 답을 요구하시니 번잡한 이유없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한 저는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모순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성경과 이성에 의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타당한 근거 없이 설사 목숨이 위태하게 될지라도 결코 그의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확신에 찬 믿음을 보라!
참으로 그는 말씀만의 신앙을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람의 용기와 확신은 배울 가치가 있지 않는가!
그러나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교황과 마찬가지로 루터를 파문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있는 곳에서는, 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파문을 받은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요새인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을 은신처로 삼아 피신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고 곧 이어 구약 번역도 시작되었다.
경이롭게도 총 12년이나 걸려 1534년 9월 최초의 완역본인 비텐베르그 성경이 출판되었다.

그에게도 매우 특별한 날이 있었으니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카타리나 폰 보라 수녀와 결혼하게 됐다.
수도원의 해체로 말미암아 수녀들이 결흔을 시작했으나 보라수녀는 루터 외에는 도무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인문주의자들이 빈정대는 말, 곧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와 한 수녀의 연합으로 끝났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다.
루터는 보라를 깊이 사랑하여 "나는 나의 카티(Katie)를 프랑스 베니스하고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카티, 당신은 당신 사랑하는 정직한 남자와 결혼했소 당신은 황후요"라고 고백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에 63세의 나이로 아이스벤에서 사망하여 유해는 비텐베르그 성 교회(the Castle Church)에 안치되었다.
그의 말년은 그의 개혁초기와 같이 매일 매일 분주하였다.

끊임없는 편지답장, 계속되는 강의와 설교, 교회지도 등이 그를 여전히 바쁘게 했다.
게다가 만성적 귓병, 담석증과 같은 질병도 계속적으고 그를 괴롭혔다.
또한 그가 진정 원치 않았던 개신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그의 마음을 몸시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초지일관 성경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가 젊었을 때부터 가졌던 신앙의 자세로 무지한 농민과 욕심많은 정치가들, 자신과 의견이 다른 형제들을 지도했다.
그는 만스펠트 백작 영지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태어나고 세례받은 아이스레벤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그의 동역자가 임종 직전 "선생님, 선생님께서 평생에 가르치신 교리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루터는 육신이 연약한 중에도 온 힘을 다해 큰소기로 "오! 아멘"하고 말하였다.
새벽 3시가 되어 종교개혁의 불꽃이었던 루터는 장엄히 운명하였다.

그의 수제자이자 후계자인 멜랑히톤은 루터의 죽음을 표현하기를 "아! 마부는 갔다. 이스라엘의 마차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였다.
참으로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운 하나님의 위대한 용사였다.

 

 

IV. 루터의 사상

1. 오직 성경으로

루터에 의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최고이며 최종의 권위는 단연 성경이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번잡스러운 스콜라 신학이나, 성유물, 성자 숭배에서 나오지 않는다.
또한 로마 교황이나 교회 회의가 교회의 최종 권위는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이나 교회 회의도 인간들의 모임이기에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류 없이 교회의 성토를 지도할 유일한 원천은 성경 뿐인 것이다.

루터가 "오직 성경"이라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의미가 가미되어 있음도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첫째, 성경 저자들의 저술사항의 특징(율법, 역사, 기도, 시가, 예언 등과 같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의 커다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이 통일성은 다름이 아닌 성경 전체가 오직 그리스도에게 정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성경이 그리스도에게만 정향되어졌다고 믿을 수 있는가?
루터는 "성경이 스스로 자신을 해석자"(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로 "성경에는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Christus Dominusac Rex Scripturae)만을 관계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은 성경 각부분에 대한 신학적 비판이 허용되었고 "성경은 자기 자신의 비판가"(Scriptura sacra sui ipsius critica)가 되어 성경 안에서도 참된 성경이라는 가치 구별이 생기고 말았다.

루터는 말한다:

당신은 지금 당장 모든 책들을 구별하고 어느 책이 가장 좋은 책인가를 결정할 입장에 놓여 있다.
모든 책들 가운데서 참된 핵과 정수, 제일 칫째로 꼽혀져야 할 책들은 요한복음과 성 바울의 서신들, 특히 로마서 그리고 성 베드로의 첫 번째 서신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들을 먼저 그리고 매우 자주 읽는 것이 좋고, 매일 성경 통독을 통해 자신의 일용학 양식처럼 친숙해지는 것이 좋다.
당신은 이 책들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이적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없고,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죄와 죽음과 음부를 정복하며 생명과 의와 구원을 주는지에 관한 뛰어난 설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 .
요약해서 말한다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바울 서신서들, 특히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책들이다.
그 책들은 당신이 그밖의 다른 책이나 다른 가르침을 듣거나 보지 않더라도 당신의 구원을 위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가르쳐 준다.

루터의 "오직 성경"이란 말이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오던 교회사의 전통을 모두 부정하는 말이 결코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루터는 성경에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이 없는 경우에는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유아세례가 그 좋은 예가 된다.
루터는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명백한 규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아세례의 보존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어린이의 복음"에서 그리스도가 어린 아이들을 자기에게 오게 할 정도로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셨음을 근거로하여 유아세례를 부정한 이유가 없다고 했다.(마18:1, 막10:13-16, 눅18:15-17).
또한 루터는 예수님의 세례명령(마28: 19)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전가족 동시세례에서 유아세례의 원형을 되았다.
이상과 같이 루터는 성경에 반하지 아니한 교회사의 전통, 관습, 교리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이며 또한
매우 관용적이었다.

 

2. 오직 믿음과 은혜로

루터에 의하면 "오직 믿음과 은혜"라는 말의 뜻은 사람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중세교회의 성례전에 기초한 죄사함, 행위구원, 면죄부에 의한 죄의 경감이나 구원, 사제를 통한 죄의 고백을 하기 위한 고백성사와 같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과정을 단숨에 제거해 버린 인류역사의 대 자유헌장과 같은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오직 믿음과 은혜"의 헌장을 선포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위대한 인물이다.

"오직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조건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결코 율법, 할례, 희생제사,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구원은 은혜로, 값없이 이루어진다.(롬 3:24f).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단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경험한다.
그리서 (이 의는) 믿음의 의 . . . 수동적 의라고 할 수 있다.

수동적인 의란 지금까지 지었던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죄를 덮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시지 않으심을 말한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 인간을 "죄인이자 의인이라" 부르며 그리스도를 통해 의가 전가(inputatjon, not impartation) 되었다고 한다.

의의 전가는 다른 말로 법정칭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법정에서 실제로 죄가 있는 자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릴 때 죄인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3. 십자가의 신학

"오직 믿음과 은혜"라는 루터신학을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의 선한행위는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보여지기 쉽다.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오직 믿음과 은혜이니 신자는 선행과 전혀 관계없이 천국행 입장권을 이미 받았다는 억지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루터 사상을 터무니없이 왜곡시킬 뿐이다.

루터는 결코 선한 행위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여기 증거가 있으니 1518년 하이델 베르그 논쟁에서 루터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과 십자가의 신착 (Theological cruc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영광의 신학이 인간을 윤리적 행적과 율법의 성취로써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한 행위자로서 인도하지만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이 고난과 수난에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는 이제 그 자신이 무엇인가를 행하려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절시키시고, 자신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이끄심에 맡긴다는 의미이다.

루터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재성의, 그의 은총의, 그의 구원의 . . . 그리스도의 교회의 올바른 인식을 위한 척도를 제공한다.
또한 십자가는 이러한 실재성들이 전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숨어계심이다.

이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비굴과 무력, 불행과 재앙, 그기고 처참한 곤경을 말해준다.
그래서 세상적인 체험과 이성은 십자가를 증오하고 경멸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 때로는 가련함으로 동정을 받을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에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담겨져있다.

이 비밀은 무엇인가?
세상 철학이나 이성 그리고 경험세계가 설명할 수 없고 오직 신앙의 시각에서 알려지고 이해되어지는 비밀이다.
멸시, 저주, 무력, 절망, 재앙과 같은 부정과 모순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죄인의 몸으로 고통받는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이 새로운 발견 위에서 루터는 십자가의 시련속에서 보여주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은총에
감격하였다.

참으로 놀랍고 깊은 진리가 여기 있으니 십자가의 "허약함 속에서 강한 능력이 있고 비굴함 속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죽음속에서 참 생명력 있는 삶을 창조한다는 사실, 바로 이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과 하나님의 신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성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다.
십자가를 마음을 열어 영접한 성도의 전 실존은 이제 그 방향이 달라진다.
행위에 기초한 교만이나 의로움이 소멸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으로 체험된다.
한량없이 은혜로우시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이 체험된다.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은혜로 즐겁게 질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비굴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저주받은 이 십자가를 통해 나날이 창조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선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행위가 십자가를 통해 신자의 삶속에서 분출된다.
이런 의미에서 선한 행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십자가를 지는 성도의 자연발생적 사건이 된다.

 

4. 만인제사장 주의

루터에게는 세례받은 모든 성도가 전부 제사장이다.
카톨릭 교회의 사제의 허락이나 동의가 없어도 성도는 스스로 성경을 볼 수 있고 마치 거울을보는 것처럼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의 지침을 비추어 볼 수 있다.
또한 사제나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의 기도를 통해 단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의 직분은 불필요한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성경은 주께서 "혹은 사도고,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엡4:1) 그리고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1-2)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이 말씀들과 만인제사장주의와는 상치되는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다.
루터에게 교회의 직분은 만인제사장 주의와 조금도 상치되지 않는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위하여 말씀과 성례전에 봉사할 특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직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설되고 명령되고 질서지어진 것이지만 이 직분이 어떤 특수 계층으로 자리를 잡아 권력을 휘두르는 기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특수 소명을 받았지만 그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자신들의 직분을 단지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에만 사용해야 한다.
부름받은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는 기능적인 직분 상의 구별만 있을 뿐 신분이나 존재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개신교 성직 임명은 카톨릭이 말하는 성례전의 일부가 견단코 아니다.

 

 

V. 정리

루터의 종교개혁을 평가해 보자면 다른 일반역사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신약성경(특히 바울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이 이미 주장했던 믿음으로 칭의되는 원리의 재발견이다.
둘째,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를 제도 교회나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인정하여 중세 천년 동안이나 가두어둔 말씀에 얽혀있는 사슬을 풀어 모든 사람이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모든 개개인이 제도나 의식의 중개없이 하나님께 단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넷째,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성속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배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제나 수사가 평신도 보다 더 고귀하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섯째,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영국인 틴 데일의 영어성경이 좋은 예이다.

여섯째, 루터는 화목하고 따뜻하며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몸소 이룸으로써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곱째,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한편으로는 부패했던 카톨릭 교회에 직, 간접 영향을 줌으로써 카톨릭 내부의 갱신과 개혁을 이루게 했다(counter reformation)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다.

루터에게 아쉬운 점은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포함되었다(The Word of God contain in the Bible)고 함으로써 성경의 총체적 권위와 절대 무오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성경의 선별적, 차등적 권위를 인정하였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했다.
이러한 성경관은 성경의 권위를 축소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틴 루터는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모순을 비판하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구호로 종교개혁을 이끈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원래 로마 카톨릭 사제였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인정하는 등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루터는 칭의, 죄사함, 중생, 성화,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 중 가장 첫 단계인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를 수 많은 연구와 고통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죄사함과 ,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연합해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중생에 대한 명확한 언급도 없습니다.

루터의 가장 큰 실수는 믿음만 강조하다 성화와 행함을 경시하였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며 평가절하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성경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자신의 의견에 맞지 않는다고 성경의 특정부분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마태 4/4 그러나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3/3 또 너희는 우리가 섬긴 그리스도의 편지임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이는 잉크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육신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베드로후서 1/20~21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는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에 따른 사사로운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가 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더니 주께서는 몹시 놀라고 괴로워하기 시작하시더라.

야고보서 2/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

더군다나 야고보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중요한 사도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12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입니다.
야고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누가 6/46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들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요일 2/6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해야 하느니라.

요일 2/9 그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두움 가운데 있느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주인)로 믿으면서도(영접하였으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 뜻(말씀, 계명) 대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거나,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미워하면 그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22 믿음이 어떻게 그 행함과 더불어 작용하였으며,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음을 네가 보느냐?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그 믿음이 실체화 되어서 행함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 보면 절로 믿음이 굳건해지기 때문입니다.
저도 선교와 관련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계속 굳건한 믿음을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었다고 믿어도 내 육신의 본성은 계속 나와 죄를 짓고 나를 괴롭게 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내 옛사람이 죽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내 옛사람의 악한 본성이 서서히 죽게 됩니다.

히브리서 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고전 4/20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진리말씀을 확고히 믿으면 그 믿음이 내 앞에서 실체적으로 나타나고, 그 믿음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이 보여지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마태 7/21 마태 7/21~23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에베소서 4/1~3 그러므로 주의 죄수 된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릐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되,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

행함의 중요성은 야고보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바울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만 있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라 했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

계시록 22/14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계시록 22/15 그러나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누구든지 거짓말을 즐겨 행하는 자는 모두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마지막 때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따라 심판하는 이유는 행함이 바로 믿음(씨(말씀)를 심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한 행위에 따라 상을 받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킨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각종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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