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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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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1


 

 

 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 존 스토트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는 현존하는 탁월한 설교가이자, 복음 전도자이며, 기독교 학자이고, 저술가다. 그는 20세기 후 반에 기독교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계 복음주의 신앙의 대표적인 목회자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 복음주의 신앙 운동을 주도했으며, 세계복음주의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를 창설하여 그 시대를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평생을 영국 런던의 한 복판에 자리한 올소울스 교회 (All Souls Church)의 설교자로 사역했다. 특히, UCCF(한국의 IVF)와 국제복음주의연맹(IFES․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복음주의 학생에 깊이 관여했으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복음주의 선교 운동 로잔회의(Lausanne Congress, 1974)의 산파역을 맡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입안했다. 존 스토트는 설교와 강연을 통해 복음에 대한 충실한 증거를 하였으며, 무엇보다 여러 기독교 교리에 대한 도전에 대해 올바른 응전을 하도록 애썼다.

지난 1999년, 필자는 존 스토트를 만난 기회가 있었다. 동양권에서 최초로 열리게 된 IFES 의 세계총회인 ‘World Assembly 99’ 주강사로 선정돼 내한한 그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한국의 영적 성장과 부흥을 격려하며, 지나간 역사와 다가오는 새 천년을 앞두고 이 시대야말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가장 확고한 복음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한 가지 있다. 그가 새를 좋아한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나는 단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서문이 아닌 강한 명령문으로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도 큽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시골의 숲으로 가서 ‘입은 다물고 귀를 크게 열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과 아버지의 훈련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새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로 다니면서 각 나라의 새를 관찰하고 배웁니다.”

필자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비단 그의 사역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저서『현대 교회와 설교』에서 제시한 ‘다리 놓기’ 설교 이론을 통해 신학도와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감과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평생을 그의 사역지에서 성경적인 설교에 헌신해온 설교가이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전 세계의 격변기에 태어나다

존 스토트의 아버지 아놀드 스토트(Arnold Stott)는 명성이 높은 의사였다. 영국의 전문 의료진이 모여 있는 할리(Harley Street) 가에 진찰실을 두고 있었다. 아놀드 스토트는 교육과 계몽주의 신봉자였으며 인도주의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만한 신랄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언어 사용도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과학적 세속주의자요, 세심한 자연주의자였으며, 전문적인 식물학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런 영향을 받아 어린 존 스토트는 어린 시절부터 나비 수집에 관심을 가졌고, 조류 관찰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Timothy Dulley Smith, John R. W. Stott, p.47). 아놀드는 의사로서의 특전을 행사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씩 교회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머니 릴리 홀랜드(Lily Holland)는 정기적으로 자녀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냥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남편과 잘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이 부부는 서로에게 헌신했고 자녀들에게도 헌신했다. 그녀도 역시도 남편처럼 강한 성품을 가진 여인이었으며 원칙에 충실했다. 하지만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홀랜드 여사는 매우 창의적이었으며 자녀들에게 손수 물건을 만들도록 가르쳤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었으며, 그 목소리는 존 스토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녀는 존 스토트를 데리고 여러 강연에 참석했고, 자녀가 잠자리에 들 때 기도를 가르쳤다. 존 스토트는 10대 중반까지 어머니에 의해 신앙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스토트의 부모가 결혼 초 웨스트 캔팅턴 에디슨 가에 살 당시인 1921년 4월, 존 스토트가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조안, 로즈메리, 조이 등 세 누이들이 있었다. 그는 외아들로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반면, 그의 바로 위 누나는 상대적으로 설움을 받고 자랐다. 존 스토트는 태어 난지 한 달 후에 할리가로 이사했다.

존 스토트가 태어난 1921년 전후의 10년은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격변기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75년에 걸친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면서 소련이 생겨났다. 1918년 제1차 대전이 종결되었고, 1919년에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을 만들었다. 1920년에는 미국 주도의 국제연맹이 창설되었고, 1921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영국 역시도 많은 격변을 겪는데, 1920 영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4년에는 노동당 정부가 세워졌다. 전후 경제 불황이 닥치고 26년 총파업이 일어났다. 조금씩 종교적 세속화의 과정이 일어나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필두로 전통적인 종교 관념을 침식해 들어갔다. 1930년대는 독립된 교회들이 모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영국 국교회가 생겨났다. 결론적으로, 1920년대는 현대로 들어서는 하나의 출발점이었는데 그 중요한 시기에 존 스토트는 안정되고 행복한 가정에서 아동기를 보냈다.

새를 관찰한 오클레이 홀 시절

존 스토트는 어린 시절부터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존 스토트는 1929년 만 여덟 살 반이 되던 해 글로스터셔에 있는 오클레이 홀에 진학했다. 이 과정은 그의 아버지가 다닌 사립학교 럭비에 가기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이 학교는 런던에서 160km 떨어져 있었고,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을 예비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의 기숙사 생활은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 적응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오클레이 홀은 특히 기독교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학교였다. 학교 예배당에서 들리는 예배 외에도, 하루 일과는 빅 스쿨에서의 아침 기도로 시작해서 저녁기도로 끝이 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친구 제라드 어빈을 통해서다. 제라드 어빈은 학교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존 스토트는 주말에 친구 집을 방문하기 좋아했고, 어빈에게서 기도와 무릎 꿇는 방법 등 신앙의 행위들을 배웠다.

오클레이 홀에서 존 스토트는 새의 관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고, 노트를 기록했으며 글과 책을 남겼다. 이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오클레이 홀 학교 주위는 전원적인 곳이어서 자연과 새들을 관찰하기에 적절했다. 존 스토트는 1930년 8-9월 사이에 40개 정도의 새 관찰 목록을 기록했다.

럭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한 장소

그 후, 존 스토트는 럭비 학교에 진학했다. 럭비에서 존 스토트는 학생회장으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시절은 평생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지한 시기였다. 존 스토트는 럭비 학교에 간 이후 첫 번째 학기를 제외하고 여전히 새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사학회 조류학 부문의 시험을 보고 회원이 되면서 새에 대한 관찰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과 두 명의 친구가 주축이 되어서 지역 사회에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 ABC학회를 설립하였다. 이 학회는 사회로 복귀하려는 부랑자들을 목욕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회심을 하기 전에도 존 스토트는 이렇게 그 안에 사회적 양심이 있었다. 그것은 그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정정당당한 경기 태도를 매우 중시 여겼으며 세상이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는 매우 격분했다.

1936년 대량 실업이 발생하면서 존 스토트는 노동자 계층과 더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존 스토트를 계속해서 기쁨을 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럭비 채플과 학교에서 인기 있는 바리톤 독창자였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음악이 존 스토트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존 스토트는 언제나 함께 했던 새외에도 방학동안 많은 것을 즐겼다. 테니스와 롤러 스케이트와 수영을 즐겼다. 그는 또한 방학이면 부모들과 함께 낚시도 즐겼다. 존 스토트는 37년까지 새에 대한 관찰을 계속했다. 럭비 학교생활 37년쯤에는 캠브리지에 입학할 정도의 자격을 갖출 만큼 학업에도 열심이었다.

 

 존 스토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과 그가 다닌 학교의 종교교육 덕분에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룬 것은 1938년, 그가 16세가 되던 해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선배 존 브리저였다. 존 브리저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이 모임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음 밖에서 문을 두드리심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님께 완전한 통제권을 드리면서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간청하게 되었다.

존 스토트는 이 회심 사건이 자신의 삶의 방향과 질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읽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확실한 성경관을 갖고 성경적 설교를 하는 기초가 되었다.

전쟁을 거부한 비폭력 평화주의자

존 스토트가 21세기 복음주의의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두드러진 그의 인격과 사역의 탁월성 때문이다. 전 세계인은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전해진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럭비학교 재학시절, 전쟁이 발발했다. 그 당시,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다. 다른 젊은이들이 징집서약을 하면서 군대에 지원했지만 그는 지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국교회 목사로 안수받기로 결단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안수 후보생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법정에 출두하지 않고도 군 복무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규정은 본인이 사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규정이다. 존 스토트는 이 규정을 사용하여 징집서약을 거부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들의 이런 결정으로 인해, 존 스토트와 아버지는 상당기간 동안 불편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이 입대하지 않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신실하기 위해, 둘째는 전후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들의 군 복무가 면제되듯이 성직 수임 후보자들은 전후 영혼의 질병 치유를 위해 군 복무를 피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군 입대를 거부하면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인가?’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성경 중심, 전도 중심, 기도 중심으로의 체질 변화

1942년 여름부터 존 스토트는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1945년 캠브리지 대학에서의 수학이 끝나갈 무렵, 올소울즈 교회의 교구목사 헤럴드 스미스 목사의 청빙을 받고 그해 12월부터 부목사로 부임했다. 부목사로 부임하기 직전, 목사 시험에서 존 스토트는 수상할 만큼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올소울즈 교회 담임목사인 헤럴드 스미스는 매우 개성이 강하고 좋은 신앙심의 소유자였다. 더불어 용기와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인들을 사랑했고, 성도들로부터도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존 스토트는 탁월한 목회자 헤럴드 스미스 목사를 자신의 목회 멘토로 삼았다.

존 스토트는 안수 받은 지 이주 후 베레가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첫 교구 설교를 한다. 1956넌 중반부터는 존 스토트 스타트의 설교 중 하나를 요약해서 정기적으로 싣기 시작했다. 그는 대체로 긴 설교를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책을 저술하는 것을 시작했으며 출판 사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1947년 언 쇼우 스미스는 병으로 목회를 그만두게 되었고 1950년 3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올 소울즈 교회는 왕실 소유였으므로 6월 12일 국왕으로부터 담임목사 승인을 받고 9월 26일 정식으로 그는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소울즈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헌신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복음 전도에 정력을 쏟았다. 그는 자신의 교구를 넘어 더 넓은 사역지를 내다보고 있었다.

1950년, 그의 친구 모리스 우드는 헤럴드 우드의 성베드로 교회에서 선교대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의 지병으로 인해 존 스토트에게 선교대회 주말모임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존 스토트는 만사를 제쳐놓고 이 일에 헌신했다. 이때부터 올소울즈 교회는 복음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11월에는 런던 시내에 있는 한 교구가 다른 교구를 대상으로 회중선교를 시도하였다.

그 무렵, 존 스토트는 빌리 그래함을 만나면서 전도에 열정을 쏟게 된다. 빌리 그래함이 주축이 된 헤링게이 전도집회 중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동맹위원회 회원으로서 전도집회의 실행위원으로 섬겼다. 그는 헤링게이 집회 때 빌리 그래함에게 쏟아진 비난에 대해서 변호하는 글을 쓸 만큼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지지했다. 이처럼 존 스토트가 담임목사가 된 첫 십년 동안은 해마다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 소울즈 담임목사로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올 소울즈 교회는 그의 담임기간 동안, 제도나 조직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갔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반 위에서 기도 중심, 문서 중심, 설교 중심의 교회로 체질을 변화시켰다.

대학생 선교대회 강사

존 스토트는 대학생 선교대회에 헌신했다. 그 당시, 대표적인 대학생 선교단체인 CICCU는 3년마다 전국 규모의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1952년에 존 스토트가 이 선교대회의 주강사가 되었다. 이 대회는 존 스토트가 앞으로의 우선순위를 대학생 선교에 두게 한 분수령이다. 존 스토트가 전 세계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를 말하라면, 바로 대학생 선교 대회 사역이다.

존 스토트에게 이 캠브리지 선교대회는 향후 그가 참여한 수많은 학생 선교대회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후 그는 25년 넘게 정기적으로 영국과 북미,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곳곳에 있는 대학에 가서 선교대회 강사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신학 노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빌리 그래함이 주도한 케임브리지 전도집회에 참석한 것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다. 당시, 영국 언론과 목회자들은 빌리 그래함을 근본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신학과 학문을 탐구해야 할 대학에서 편협한 근본주의자에게 강의를 하게 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논쟁에서 존 스토트는 빌리 그래함을 근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가진 근본주의의 정의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근본주의가 성경적인 모든 비평을 거부하고 기계적 영감을 주장하며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견해로 정의한다면, 빌리 그래함은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님을 밝혔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이야말로 복음주의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권위를 인정하며, 교회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자임을 강조했다. 결국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을 억압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앞에 겸손히 지성을 굴복시키는 자들이라고 변호했다. 이를 볼 때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자 이면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노선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탁월한 신앙 저술가

존 스토트는 1952년 그동안 자신이 수시로 야영을 즐긴 훅시즈라 불리는 한 계곡의 농가를 별장으로 사들였다. 여기에 1960년 올소울즈 교회의 한 건축업자가 존 스토트를 위해 농가의 절벽 근처 에 그만의 연구 공간을 지어주었다.

그곳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가 좋아하는 새를 관찰 할 수 있는 전원이었다. 존 스토트가 은근한 자연주의자이자, 경이로운 창조질서를 바랄 볼 줄 아는 관조자의 눈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즐겼던 자연의 삶과 훅시즈의 삶 때문이다. ‘은자의 집’으로 불리는 이 집에서 존 스토트는 1990년까지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면서 독서와 집필에 몰두했다. 지금까지 훅시즈에서 쓴 초기의 책들 중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기독교의 기본진리』다. 이 책은 1950년대 세계 곳곳에서 열린 대학선교 대회의 설교들이 기초가 된 내용이다.

존 스토트는 자신보다 20년 연상인 마틴 로이드 존즈 박사와 함께 IVF와 학생 전도사역에 동료이자 동반자로 헌신했다. 복음주의적 연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따듯한 우정과 존경을 보냈다.

 

존 스토트는『현대교회와 설교』(Between Two Worlds)란 책에서 자신의 설교론에 관한 모든 것을 피력한다. 이 책에서 그는, 설교에 대한 자신의 모든 사상과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설교에 관한 존 스토트의 신학적 기초

존 스토트는 설교자의 신학이 설교의 방법론에 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교에 대한 신학이 없이, 설교 방법에만 치중하면 설교자는 연설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잘 풀어내는 설교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와 설교자가 설교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설교자가 설교에 대한 분명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설교자가 왜 설교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스토트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위해 성경적인 설교를 할 수 있기 위한 다섯 가지 확신을 설교신학으로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현대 신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행위뿐 아니라 설명적인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신하지 못한 설교자라면 입을 다무는 편이 더 낫다고 한다.

둘째, 성경에 대한 확신이다. 존 스토트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가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함을 말한다.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심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가 전하는 하나님은 죽은 존재나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수세기 전에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날에는 침묵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또한, 교회가 말씀에 관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존 스토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교회를 지으시고 지금도 말씀으로 교회를 유지시키시며 지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개혁하시며 새롭게 하신다. 설교자의 임무는 말씀을 통해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넷째, 목사 직분에 대한 확신이다. 존 스토트는 목사직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영구적인 특수 직분임을 강조한다. 목사는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주님의 성도들을 주님의 몸으로 온전히 세워가는 주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직분이라는 것이다.

다섯째, 설교에 대한 확신이다. 존 스토트는 모든 설교자들은 해설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해설이란 무엇인가? 본문의 내용을 끌어내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노출시키는 것이다. 본문이 길든지 짧든지, 성경 해설자인 설교자는 가감 없이 본문의 메시지를 확실하고 명확하며 정확하고 적절하게 전달하도록 본문을 개방하라고 주문한다.

해설 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한정하게 하고, 정확한 성경적 설교를 하도록 성실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또한, 설교자가 본문의 의미를 벗어날 부주의와 본문의 의미를 왜곡할 함정을 줄일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존 스토트의 설교론은 해돈 로빈슨이 주장하는 강해설교와 맥을 같이한다. 해돈 로빈슨이 강해설교를 설교 형태로 보지 않고 설교철학으로 보았듯이, 존 스토트 역시 해설을 설교의 신학으로 삼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해설은 성경을 구절구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잘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

존 스토트는 설교를 ‘두 세계 간의 다리 놓기’(bridge-building)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성경의 세계와 현대 사이에는 공간적․시간적 차이가 만든 문화적 차이로 인해 깊은 골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골은 동시대에 살고 있는 문화적인 골보다 훨씬 깊고 멀다. 그러므로 설교란, 시․공간의 차이가 만든 문화적 간격을 메워주기 위해 성경 세계에서 현대 세계로 다리를 놓는 것이다.

스토트는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시대의 청중들에게 그 말씀을 듣도록 하는 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설교자를 ‘통보자’, ‘씨 뿌리는 자’, ‘그리스도의 대사’, ‘청지기’, ‘목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이해한다.

그가 말한 정의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등장한다. 그것은 모든 정의가 ‘받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통해 설교자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단순한 통보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들려지도록 해야 함을 전제로 깔고 있다. 씨 뿌리는 자는 좋은 씨앗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좋은 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스토트의 설교 정의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가진 상반된 설교에 대한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성경에 집중하고 그곳에서 안식을 누린다. 현대보다는 성경에 관심과 연구를 둔다. 그래서 스스로 현재에서 격리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현재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이곳에 집중한다. 그들은 유행하는 풍조에 민감하며, 그들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설교가 성경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그들은 현대 세계에서 성경 세계로 다리를 놓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장점을 살린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통해 온전한 설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다리 놓기의 실제

존 스토트가 말하는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 세계에서 현대 세계로 다리 놓기를 말한다. 이 주제는 설교자가 들은 말씀을 청중들에게 어떻게 들리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적용의 문제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실제적이고 중요한 지침들은 다음과 같다.

▲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예를 들어, 인간의 존재 목적, 인생의 의미, 초월적인 것에 대하여, 진정한 자유에 대해, 사랑, 성적 만족, 증오, 정욕, 복수심, 자기 부인, 죽음에 대한 태도 등과 같은 주제들이다. 존 스토트는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말할 것을 종용한다.

▲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윤리를 다루라. 스토트는 설교자들이 흡연, 음주나 오락에 대한 문제와 같은 미시적 윤리에만 치중한 나머지 진짜 중요한 윤리 문제를 외면하는 것을 경계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율법과 성경의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가르침으로써 현대 세계에 연결할 수 있음을 말한다.

▲ 사회적․정치적인 이슈들을 설교하라. 그는 설교자가 시대가 당면한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분명히 설교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에 사회와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설교해야 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압제와 자유, 가난, 굶주림, 문맹과 질병, 환경과 오염, 자연 보호, 노동과 여가, 실업, 인권과 시민의 자유, 관료 정치에 의한 비인간화, 범죄의 증가, 범죄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 인종차별, 민족주의, 폭력과 혁명, 무기경쟁, 핵 공포, 세계 전쟁의 위험 등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토트는 설교자가 이런 문제들을 제외시킨다면, 신앙을 생활에서 분리시키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로부터 물러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정치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덧붙인다.

▲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을 다루라. 그는 수많은 논쟁적인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과 어떤 입장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슈들을 설교할 때 결론을 내기보다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청중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설교자가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원리들과 원칙들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비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또한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제시한 선택과 그 선택을 지지하기 위해 논증한 것을 청중들에게 설명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설교자의 탁월한 통찰력과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편, ‘다리 놓기로서의 설교’는 성경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에 따라 존 스토트는 목회자가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모든 성경을 귀납적으로 연구할 것, 성경을 설교자의 편견으로 왜곡하지 않도록 열린 마음을 가질 것 그리고 즐거운 기대를 가질 것 등을 주문한다.

그가 제시하는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도 세 가지다. 섬기는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및 영광과 비극을 제대로 이해할 것, 일간지나 주간지 그리고 텔레비전 등과 영향력 있는 미디어나 영화 등과 같은 문화적 트렌드에 관심을 가질 것, 독서 그룹을 통해 정보를 나누고 자극을 받을 뿐 아니라 특별한 주제에 대해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자원그룹을 둘 것 등을 주문한다.

권영삼 032kwon@naver.com

교회와 신앙

 


 

존 스토트(John R.W. Stott)

 수년 전 어느 고독한 소년이 하나님을 찾고자 작고 어두운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훗날 그 소년은 마침내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내어 드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헛되고 버림받은 인생들의 쓰레기더미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그의 인생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데 쓰임받고, 우리를 살리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분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제 긴 생애를 돌아보면서, 저는 무엇이 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지 종종 묻곤 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것은 제 부모니의 양육이나 저 자신의 독립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문을 두드리며 문 밖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로 관심을 돌리게 하신 그리스도 그분이셨습니다"

- 존스토트의 간증-

 
존 스토트 목사는 20세기의 탁월한 복음주의자이자 설교자이며 학자입니다. 그리고 저술가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국제적인 목회자입니다. 복음전도와 선교, 학생운동, 지성사회 복음화 등 다방면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우리 시대으 영적 거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수 년 동안 런던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를 담임하였으며, "로잔언약"작성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현재는 런던 현대기독교 연구소 소장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의 저서로는 신약성경 주석 시리즈 [성경은 이 시대를 말한다]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기본진리], [성경이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산상교훈 강해], [성경의 권위], [로마서 강해] 등이 있습니다.


성령에 의존

존 스토트는 설겨작성의 전 과정을 통해서 그가 성경을 연구할 때 그리고 그가 설교를 하는 동안에 항상 성령을 의지하는데 성령은 말씀에 의해 그리고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보 제공에 있지 않고(Piper, 1992:42)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데 있기 때문에 존 스토트는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선포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실제로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설교의 감동은 설교자의 감동에 의존하며,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만약 성령의 불이 우리의 심령 안에서 불붙지 않고 우리가 성령과 함께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는 결코 감동의 불길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반응은 성령의 감동하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현대 교회와 설교]에서 존 스토트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스펄전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혀를 못쓰게 될 때까지, 호흡이 다하여 죽기까지 설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성령께서 사람의 의지를 바꾸시는 그 신비로운 능력으로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결코 단 한 영혼도 회심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오, 여러분! 만약 성령이 영혼을 회심시키는 능력으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는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철벽을 향한 것이 될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또한 설교가 구체적인 경우마다 성령에 의해서 특별히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그는 적용 없이 강해설교를 하도록 요구받을 때면 현실에 말씀을 적용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께만 나의 믿음을 두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말씀의 진리를 적용하는 것은 항상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존 스토트는 성령이 감동시킬 때 사람들이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메시지가 전달 될때 "성령은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을 생생하고 강력한 말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설교는 듣는 자들의 마음을 부패와 타락에서 생명과 새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만약 성령이 우리의 설교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청중들이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이ㅡ 임재 안에서 겸손해지도록 설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나타낼때 그분의 성려은 심령들을 부드럽게 하시고 녹이시며 그의 뜻에 순응하게 하십니다. 차펠은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도록 모셔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벤터는 "설교작성을 위한 절대적인 요건은 성령의 인도를 위한 기도인데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영감을 더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을 위해 말씀의 뜻을 나타내고 말씀을 위해 설교자들의 마음을 여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또한 회중을 위해 말씀의 뜻을 나타내고 회중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존 스토트는 열심히 권고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은총을 얻기 위해 더욱 끈기있고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계몽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이해와 성령의 증거하심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에 의하면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설교자와 설교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전 설교사역을 통해서 설교할 때마다 성령의 능력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모든 생애 동안 그렇게 뛰어난 설교자일 수 잇었던 이유입니다. 그가 보여 준 좋은 예는 모든 설교자들로 하여금 성령에 깊이 의지하면서 직분을 감당하게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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