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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이자 외교가인 헨리 키신저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인 키신저는 닉슨 행정부에서 1968년 국가안보 보좌관을 시작으로 국가안보협의회 의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긴장완화정책 즉 데탕트(detente)를 추진했고, 전략무기제한협정(SALT)를 성사시켰습니다.

키신저는 1972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최초로 중국과 접촉해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시켰습니다.
그는 1973년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상을 이룬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저술활동과 강연, 기고, 자문역, 컨설팅 등으로 국제외교에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음모와 범죄를 저질렀고, 프리메이슨 300인 위원회 회원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헨리 키신저는 현실주의 정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실주의는 윤리나 명분보다 실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국제외교에 있어서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 배신, 협작, 암살, 학살 등을 자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1970년 이후에 세계에 일어난 수 많은 전쟁과 암살과 쿠테타와 학살과 납치의 배후에는 헨리 키신저가 있습니다.

키신저는 미국의 해외 정치공작을 총괄하는 '위원회 40'의 의장이었습니다.
지난날 키신저의 해외 비밀공작을 담은 기밀문서가 30년이라는 기밀 보호 기한을 넘기면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키신저는 장관 임기가 끝나자 자신의 외교 사료를 자신이 죽은 후 5년이 될 때까지 공개할 수 없다는 조건을 붙혀
국회 도서관에 외교자료로 기증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비정부기구(NGO)인 국가안보사료실은 재판을 통해 키신저 사료가 정부문서임을 인정받았고, 그
문서를 완전히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밀보호 기한을 넘긴 문서를 통해 키신저가 피노체트를 지원한 물증이 드러난다면 유럽과 미국과 남미에서 그를
재판에 회부하라는 주장이 계속될 것입니다.

 

* 목차

1. 헨리 키신저 (백과사전)

2. 베트남 전쟁

3. 방글라데시

4. 칠레

5. 동티모르

6. 미국·유럽 거물들 비밀리에 모였다. (빌드버그 회의)

 

 

1. 헨리 키신저 (백과사전)

 

Henry A(lfred) Kissinger

1923. 5. 27 독일 퓌르트~ .

미국의 정치학자.

1969~76년 안보문제 전문가로서 리처드 M.닉슨과 제럴드 R.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는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키신저의 가족은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43년 미국 국적을 얻은 그는 뉴욕의 시티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한 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전후에는 독일 주둔 미군청정에서 일했다. 1954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1962년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1959~69년에는 방위연구계획(Defense Studies Program)을 주도했다. 1955~68년 키신저는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L.B.존슨 행정부를 두루 거치면서 여러 기관에서 안보문제 고문으로 일했다. 그는 1957년 〈핵무기와 외교정책 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을 출판한 이후 미국 전략정책의 최고 권위자로 부상했다. 그는 소련의 공격에 대해 '대량 핵 보복' 정책을 주장하는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에 반대하여 전술적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함께 사용하는 '유연대응전략'을 제창했다. 또한 그는 전략적 요구에 맞는 무기와 기술의 개발을 주장했다. 〈핵무기와 외교정책〉은 '유연대응전략' 개념을 재래식 무기에 한정시키고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격차'를 경고한 저서 〈선택의 필요성 The Necessity for Choice〉(1960)과 함께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학자로 명성을 얻은 키신저는 1968년 12월 닉슨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1969~75)과 국무장관(1973. 9~1977. 1. 20)을 역임했다. 키신저는 곧 닉슨 행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으며, 특히 중국·소련·베트남·중동 등지에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소련과 미국 간의 긴장완화정책, 즉 '데탕트'(détente)를 추진했고, 1969년에는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을 성사시켰다. 1971년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친(親)파키스탄 정책을 실시했고, 1972년에는 소련과 무기협상을 추진하여 SALT I을 체결했다. 또한 그는 1972년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개선시켰는데, 이것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래 중국에 대한 미국 최초의 공식 접촉이었다.

처음에 그는 베트남에서의 강경노선과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폭격(1969~70)을 지지했으나, 나중에는 남베트남에서 미국 군대를 철수하여 이를 남베트남 군대로 대치하는 '월남화' 정책에서 주요역할을 했다. 수개월 동안 파리에서 북베트남 정부와 협상을 벌인 끝에 1973년 1월 23일 키신저는 미군 철수를 제시하고, 남·북 베트남 사이의 영구적 평화정착 기구의 토대를 마련한 정전협정을 초안했다. 이처럼 베트남 분쟁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73년 북베트남 협상대표 르 둑 토[黎德壽]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토는 수상을 거절했음). 1973년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키신저는 서로 대치하는 적군을 철수시키고 교전국간에 휴전협정을 장려하기 위해 '왕복외교'(shuttle diplomacy)를 펼쳤다. 또한 1967년 이래 소원해진 이집트와 미국의 외교관계를 재개시켰다. 그는 1974년 닉슨이 사임한 뒤에도 계속 국무장관으로 일하면서 포드 대통령 밑에서 외교업무를 주도했다.

19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국제적 고문·작가·강연자로 활동했다. 1983년에는 로널드 W.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중앙 아메리카 전국위원회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키신저의 후기 저서로는 〈미국의 외교정책 American Foreign Policy〉(1969)·〈백악관 시절 The White House Years〉(1979)·〈공식으로 For the Record〉(1981) 등이 있다. 전기로는 마빈 캘브와 버나드 캘브가 쓴 〈키신저 Kissinger〉(1974)가 있으며, 시모 허시는 키신저의 공직생활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권력의 가격 The Price of Power〉(1983)을 썼다.

http://preview.britannica.co.kr/

 

 

2. 베트남 전쟁

키신저는 미국과 베트남의 평화협상을 방해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폭격을 명령함으로써 수 많은 미국 군인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민간인을 희생시켰습니다.
1968년 존슨 민주당 정부는 대통령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할 목적으로 베트남과 파리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가 평화협상을 대통령 선거 사흘 전에 거부해 무산되므로써 닉슨이 당선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닉슨 진영이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남베트남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테니 존슨 정부의 평화협상안을 거부하라고
남베트남을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닉슨 진영이 민주당의 비밀협상을 알아차린 이유는 키신저가 닉슨의 정적이었던 록펠러의 외교자문을 맡고 있어서
민주당 진영이 키신저에게 자문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키신저는 닉슨의 인간됨과 정책을 노골적으로 경멸했기 때문에 존슨 대통령이 파견한 파리 평화회담 대표단은 키신저를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키신저는 록펠러의 수석 외교정책 보좌관으로서 하노이에서 프랑스 대표단을 접촉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닉슨 진영의 방해로 인해 평화회담 중 북베트남이 합의에 근접할 때마다 남베트남은 더 높은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키신저는 민주당의 선거전략을 공화당 닉슨 캠프에 누설했고, 파리협상을 깨졌으며, 전쟁은 4년이나 더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4년 뒤에 닉슨 행정부는 파리 평화회담 당시에 제시된 조건과 동일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결지었습니다.
연장된 4년의 전쟁기간 동안 미국은 2만명, 베트남도 수십만명의 희생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키시저의 배신과 닉슨의 잘못된 결정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희생되었습니다. 

미국상원 난민소위원회는 4년 동안 인도차이나에서 3백만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거나 집을 잃은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미군은 4년 동안 2차세계대전 전체 폭탄 투하량 2백4만4천톤 보다 많은 4백5십만톤의 고성능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이밖에도 미군은 엄청난 고엽제와 살충제를 살포하였고, 엄청난 지뢰를 매설하였습니다.
닉슨이 집권한 처음 2년 6개월 동안 CIA의 게릴라 소탕 '피닉스 프로그램'에 의해 35,708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닉슨의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이 된 키신저는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북베트남의 근거지이므로 이곳에 폭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립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대량폭격을 자행함으로써 라오스에서 35만명, 캄보디아에서 60만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런대도 키신저는 북베트남과 평화협상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3. 방글라데시

1970년 12월 파키스탄 군부는 십년만에 공개선거를 허용했고, 1971년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에서는 최초의
민주선거가 있었습니다.
벵골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독립주의자 단체인 아와미 동맹의 지도자 샤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압승을 거두었고, 
동파키스탄 국회에서 169석 중 167석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서파키스탄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축출 위기에 직면한 군사정권의 우두머리 야햐칸
장군은 1971년 3월 1일에 3월 3일에 개회하기로 예정되었던 국회소집을 연기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래서 동파키스탄에서는 대규모 항의시위와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3월 25일 파키스탄 군대는 벵골의 수도 다카를 공격하고 라만을 체포하여 서파키스탄으로 끌고 갔으며 라만의 지지자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서방 기자들은 사전에 다카에서 추방되었지만 당시 상황은 미국 영사관이 사용하는 무전기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
다카 주재 미국 총영사 블러드는 파키스탄 정규군이 대학의 여학생 기숙사에 총을 난사한 사건 등을 국무부와 키신저의
국가안보협의회에 보고했습니다.
용기 있는 기자 앤서니 매스커리너스가 런던의 타임스에 제공한 기사들도 전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강간, 살인, 사지절단, 아동살해가 고의적인 억압과 위협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나중에 작성된 자료에 의하면 3백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힌두교도가 파키스탄의 회교도들에 의해 살해 위험에 빠지자 1천만명의 난민이 인도 국경을 넘었습니다.
민주적으로 치루어진 선거가 부정되었고, 대량학살이 이루어진 국제적으로 큰 사건이었습니다.

인도 뉴델리 주재 미국 대사이자 뉴욕 출신의 전직 상원의원이었던 케네스 키팅은 1971년 3월 29일 행정부에 이러한
야만행위를 즉시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비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닉슨과 키신저는 거꾸로 발빠르게 움직여 다카 주재 블러드 총영사를 즉시 소환했습니다.
닉슨은 키팅 대사가 인도인의 술수에 넘어가고 있다고 키신저에게 말했습니다.

1971년 4월 말 대량학살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키신저는 파키스탄의 야햐 칸 장군에게 신중하고 빈틈 없이 행동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던 미국이 반인륜 범죄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동조까지 한 이유는 당시 미국이 파키스탄 군부를
통해 중국과 접촉해서 파키스탄 군부를 자극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은 북경에서 시합을 갖자는 중국의 초청장을 받았고, 4월 말 중국 정부는 베이징 주재 파키스탄
대사를 통해 닉슨에게 사절단을 파견해달라는 서한을 전달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비밀외교를 담당했던 파키스탄의 야하 칸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자신이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닉슨과 키신저가 공개외교가 아닌 비밀외교를 선택한 이유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자신들의 공적으로 내세우려면
비밀유지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닉슨은 인도의 판디트 네루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에 대해 개인적으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의 적국인
파키스탄을 지지하고 무기도 지원했습니다.

키신저는 방글라데시 위기를 처리하는 문제로 언론으로부터 혹평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방글라데시 국민과 그들의
지도자 라만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키신저는 1973년 국무장관에 임명된 직후 1971년에 대량학살에 항의하는 서한에 서명했던 사람들을 좌천시켰습니다.
1974년 키신저는 라만을 압박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고, 라만과 포드 대통령 사이에 약속되었던 15분간의 접견도
무산시켰습니다.

키신저는 황폐해진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라만이 요구한 미국의 비상식량 지원과 부채감면 지원에 반대했습니다.
키신저는 방글라데시가 미국의 우방인 파키스탄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스스로 버텨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1974년 11월 키신저는 아시아 순방 중 8시간을 방글라데시에서 머물렀고, 기자회견도 가졌습니다.
키신저가 출국한 뒤 다카의 미 대사관 직원들은 라만에 반대하는 쿠테타를 계획하는 방글라데시 장교들과 접촉했습니다.

1975년 8월 14일 방글라데시에서는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고, 라만과 그의 가족 40명은 살해되었습니다.
라만과 가까웠던 정치적 동료들도 몇 달 뒤 감옥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라만을 살해한 젊은 장교들에 의해 방글라데시의 새 대통령으로 추대된 사람은 아와미 동맹 내부의 우익 지도자인
콘다카르 무스타크입니다.

무스타크는 쿠테타가 일어나리라고 생각지 못했고, 300명의 특공대를 이끈 젊은 소령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며,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장교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언론인 매스커리너스는 쿠테타 기념일에 라시드 소령과 인터뷰를 가졌고, 라스드는 쿠테타 이전에 무스타크를
만났다고 진술했습니다.

키신저는 선거에서 이긴 아와미 동맹을 분열시키고 독립요구를 희석시키기 위해 아와미 동맹의 소수파를 이끌고 타협할
의사를 가진 무스타크에게 비밀리에 접근했습니다.
그 결과 무스타크는 1971년 10월 방글라데시에서 가택연금을 당했고, 무스타크와 접촉했던 미국 행정관 조지 그리핀은
10년 뒤 뉴델리 주재 미대사관으로 배치되었을 때 기피인물로 지정되었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의 다카 주재 미국 총영사는 국무부에 '미국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학살극의 공범이었다.'고
전문을 보냈습니다.
미국의 닉슨과 키신저는 방글라데시의 학살 뿐만이 아니라 군사 쿠테타까지 지원하므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이나 민주정의는 중요하지 않다는 그들의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4. 칠레

남아메리카의 칠레는 유럽과 같이 다양한 정치사상이 존중되던 국가였습니다.
보수당, 사회당, 기독교민주당, 중도주의 정당 등이 고르게 분포되었습니다.
1970년 9월 칠레 좌파 후보가 36.2%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우익세력은 분열했으며, 소규모의 급진정당과 기독교 정당은
좌파를 지지했습니다.

60일 후에 살바로드 아옌더는 아무 문제 없이 대통령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칠레에 좌파가 집권하는 것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는 것같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사회의 공익성과 국민복지가 강화될 뿐입니다.
그러나 칠레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의 대기업과 금융기관과 CIA는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닉슨은 존미첼 로펌의 뉴욕지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펩시콜라와 인연을 맺었고, 도널드 켄달 사장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키신저는 켄달, 체이스 맨해턴 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와 대응 방안을 논의한 뒤에 헬름스와
함께 아옌더가 집권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1970년 9월 15일 닉슨과 면담한 후에 키신저는 아옌더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두 궤도' 정책을 고안했습니다.
궤도1은 위원회 40이 고안하여 실시한 반(反) 아옌더 선전 및 정치 프로그램입니다.
궤도2는 위원회 40, 국무부, 칠레 대사 코리에게는 비밀로 부친 상태에서 칠레 군사 쿠테타를 지원하고 도발하기 위해
수행된 비밀활동입니다.

쿠테타를 시행하기 위한 장애물로는 칠레 군부의 정치 불간섭 정통과 레네 슈나이더 장군이었습니다.
칠레 군 참모총장인 슈나이더는 선거 과정에 군부가 개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1970년 9월 18일 슈나이더 장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미국 정부의 계획은 칠레의 장교들을 선동해 슈나이더를 납치하고 아옌더 지지세력이 납치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덮어 쒸워서 칠레 의회가 아옌더의 취임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음모에 가담할 야심 많은 장교를 구하기 위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5만 달러를 뿌렸습니다.

CIA 국장 헬름스와 비밀작전 책임자 토머스 캐러메신즈는 키신저에게 상황이 비관적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군부는 동요하고 분열했지만 여전히 슈나이더 장군에게 총성하고 칠레 헌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키신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을 계속 추진하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 9월 15일 키신저는 로베르토 비아눅스라는 극우파 장군으로부터 "납치 기한은 충분하며, 아직 여유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비아눅스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조국과 자유단'과 관계가 있었고, 슈나이더 장군을 제거하라는 미국의
비밀지령을 따르는 인물이었습니다.

 

기밀해제된 문서에 의하면 CIA가 키신저의 궤도2 그룹에게 1970년 10월 18일 보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1. 지국 요원 2명이 2명의 칠레 장교와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10월 18일까지 8~10개의 최루탄과 48시간 이내에 500발의 실탄이 장착된 45구경 기관총 3정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2. 장교들은 의심을 받고 있고, 아옌더 지지자들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빨리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3. 지국 요원은 장교들에게 공군과 접촉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고, 장교들은 공군과 접촉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접촉할
것이라고 답했다.

4. 지국은 6발의 체루탄을 요원을 통해 장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5. 45구경 기관총 3정과 탄약을 특급우편으로 선적할 것을 요구한다.

 

이같은 전문에 대해 10월 18일 다음 내용이 회신되었습니다.

10월 19일 오전 7시에 워싱턴을 출발하여 10월 20일 야간이나 10월 21일 오전에 도착하는 정기 특급운송편을 통해
소형 경기관총과 탄약이 발송될 것임. 부주의로 작전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 특급운송편을 이용하는 것이 나음.

 

비아욱스는 10월 13일 CIA 지국으로부터 2만 달러의 현금을 받았고, 25만 달러의 생명보험을 약속 받았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백악관이 직접 승인한 것입니다.
아옌더가 취임하기 며칠 전에 닉슨은 "아옌더의 대통령직 당선을 막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1970년 10월 19일 저녁 발렌수알라 그룹은 비아욱스 그룹의 도움을 받고 CIA가 제공한 체루탄으로 무장한 다음
공식만찬 자리를 떠나는 슈나이더 장군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슈나이더가 관용차량에 타지 않고 자기 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CIA 본부는 칠레 지국에게 본부가 10월 20일 오전에 고위층에 답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비아욱스 장군과 그의 부관 마셜 해군대령은 다시 슈나이더 장군 납치를 시도한다는 조건으로 각각 5만달러를 받았습니다.
10월 20일 저녁 그들은 다시 슈나이더 장군을 납치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0월 22일 기관총이 슈나이더 장군을 납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렌수엘라 그룹에게 전달 되었고, 같은 날 늦은 시간에
비아욱스와 발렌스엘라 일당은 마침내 슈나이더 장군을 살해했습니다.

나중에 칠레 군사법원에 의해 비아욱스는 납치와 쿠테타 유발 음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발렌수엘라는 쿠테타
유발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훗날 닉슨-키신저 행정부가 아옌더 정부를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어 1973년 9월 11일에 발생한
군사 쿠테타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1970년 11월 9일 아옌더가 대통령으로 인준된 직후 키신저는 칠레에 대한 정책을 검토하는 국가안보협의회의 '결정
각서 93호'를 작성했습니다.
경제원조와 투자를 중단하는 것을 포함하여 다양하고 일상적인 제재 조치들이 제안되었습니다.

키신저는 칠레 주변국의 군부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칠레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고, 칠레 내부의 반대세력을
육성하였습니다.
키신저가 상원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는 과정에 아옌더 정부는 유혈낭자한 쿠테타에 의해 전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키신저는 외교위원회에서 미국 정부가 쿠테타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허위주장을 했습니다.

칠레 주재 미국 군사고문단 해군국이 제공하고 미국 해군 무관 패트릭 라이언이 작성한 상황 보고서 2호에 의하면
라이언은 자신이 아옌더 정부의 전복에 참여한 장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1973년 9월 11일을 우리의 D-데이라고 환호했으며, 칠레의 쿠테타는 완벽에 가까웠다고 기술했습니다.

집권한 피노체트는 사상 유례 없는 학살과 납치와 고문과 핍박을 자행했는데 키신저는 피노체트의 잔악행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입수하고도 방관했습니다.
미국은 오히려 미국이 지원하는 남미 군사 독재자들 사이의 비밀 음모인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을 통해 이를
지원했습니다.

콘도르 작전은 칠레의 피노체트, 파라과이의 스트로에스너, 아르헨티나의 비델라 등 군사 독재자들이 이끄는 비밀경찰들이
공조한 국제적인 암살, 유괴, 고문, 협박 수단입니다.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피노체트에 반대하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살해당한 칠레의 카를로스 프라치 장군과 역시 살해당한
볼리비아 장군 호세 토레스, 이탈리아 여행 중 손과 발이 잘린 칠레 기독교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베르나르도 라이통 등입니다.

 

키신저는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독재자 피노체트와 밀월관계를 지속했는데 당시 피노체트의 국제적 지위는
불안정했습니다.
피토체트는 추방당한 칠레의 야당 지도자 레텔리에르가 미국 의회를 오도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키신저는 미국 의회를 대신해 사과했고 선거가 실시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암시를 주었습니다.

키신저는 피노체트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당신의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이후 석달만에 미국으로 망명한 칠레 반정부 지도자 오를란도 레텔리에르가 워싱턴에서 자동차 폭발 사고로 죽었습니다.
칠레 비밀경찰 콘트레라스 장군은 훗날 이 범죄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피노체트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명령 없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5. 동티모르

1974년 4월 포루투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면서 포루투갈의 식민지는 빠르게 붕괴되어 갔습니다.
포루투갈은 중국 해안의 마카오에서만 지배력을 유지했고 그나마 베이징 조약에 의해 2000년 중국에 반환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사회주의 경향의 해방운동 세력이 게릴라 전술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군도에 자리잡은 동티모르에서도 탈식민화 직후에 동티모르 해방전선이라는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동티모르 해방전선과 그 동맹세력은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 장군으로부터 큰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적 책임을 갖고 있었던 포르투갈은 내부 사정이 불안정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도네시아군의 동티모르 침공과
초토화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반(反) 동티모르 해방전선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1975년 12월 7일 군대를 투입해 동티모르를 침공한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 영토라고 선언했습니다.
동티모르인들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에 맞서 광범위하게 저항했지만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초기에
전체 인구의 1/6인 10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한 1975년 12월 7일은 포드 대통령과 국무장관 키신저가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
군사정권과 공식회담을 마치고 하와이로 이동한 날입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군사장비의 주요 공급국이었기 때문에 동티모르 침공을 승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이에 도착한 포드 대통령은 직답을 회피했고,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고만 밝혔습니다.

키신저는 인도네시아에 머무르는 동안 미국은 동티모르 해방전선이 선포한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그 문제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 뒤에 보도된 동티모르에서의 대량학살, 강간, 굶겨 죽이는 행위 등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잔악행위를 보도한 호주 기자들이 살해되었고, 수도 딜리는 공수부대 등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동티모르 해방전선은 회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1989년
11월12일 인도네시아군은 딜리의 산타 크루스 공동묘지에서 M-16으로 시위군중에 발포해 271명이 사망했습니다.
결국 동티모르에서는 20만명이 희생되었고, 세계적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UN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하비비가 대통령이 되자 1999년 국민투표에 의해 동티모르는 독립이 되었습니다.

정보자유법에 따라 공개된 국무부 공식 문서 사본에 의하면 1975년 12월 6일 키신저와 포드 대통령은 동티모르 침공
문제를 수하르토와 협의했고, 미국정부를 대표하여 동티모르 침공을 승인했습니다.
1975년 12월 18일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키신저는 인도네시아 침공이 불법이며 국제법 위반일 뿐 아니라
미국 무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조약위반(미국 무기는 방어에만 사용할 수 있음)이라는 국무부 법률고문 라이 씨의
조사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한 부관들을 몹시 꾸짖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학살이 시작되자 키신저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군사원조를 두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고, 모이니언 대사에게
동티모르에 대한 UN의 조치를 무력하게 만들라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키신저는 인도네시아 이리안 자야에서 세계 최대의 금광을 운영하는 프리포트 맥모란사의 이사로 재직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유로 인도네시아 군부를 지지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 참고서적: 키신저 재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아침이슬)

 

 

6. 미국·유럽 거물들 비밀리에 모였다. (빌드버그 회의)

럼즈펠드, 그린스펀, 키신저, 오릴라 노키아 회장
 

빌더버그 회의가 열린 독일 남부 뮌헨 인근의 도린트 소피텔 호텔.

지난 5일 독일 뮌헨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작은 마을 로타하 에거른. 188개의 객실을 갖춘 도린트 소피텔 호텔에 잇따라 낯익은 인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 데이비슨 록펠러 전 체이스 맨해튼 은행장, 도널드 그레이엄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 요제프 아커만 도이치방크 회장, 위르겐 슈렘프 다임러 크라이슬러 회장, 조르마 오릴라 노키아 회장 등. 하나같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춘 쟁쟁한 인물들이다.

 이날 저녁식사부터 8일까지 이들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편안한 차림새로 빌더버그(Bilderberg)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미국과 유럽 각국의 정계.재계.언론계 핵심 인사 120명의 비밀결사체다. 빌더버그란 명칭은 1954년 첫 모임을 연 네덜란드의 호텔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모임은 미국의 대외관계협의회(CFR)와 3자 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등과 함께 막후에서 세계의 현안을 주무르는 '그림자 정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CFR은 격월간'Foreign Affairs'를 발행하는 민간 연구기관이고 3자 위원회는 미국.유럽.아시아 지역의 전직 고위 관리, 학자 등이 주축인 연례 비공개 국제회의다. 빌더버그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논의됐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참석자들은 비밀 준수 서약을 하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 LA 타임스, ABC, CBS, NBC 등 미 대표 언론의 간부들도 참석하고 있지만 규정대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관계자들이 회의장소조차 쉬쉬하고 있을 정도라 현재 독일 언론에는 한 줄의 기사도 나오지 않고 있다. 호텔 주변은 경호원들로 철옹성처럼 에워싸여 있고 호텔 측은 회의기간 중 '방이 동났다'며 일반 투숙객을 받지 않고 있다. 워낙 비밀덩어리라 회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다소 부정적이다. 그래서인지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에티엔 다비뇽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이 회의는 세계를 주무르는 자본가들의 음모가 아니다"고 해명하고 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올해 개막 회의에선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주재로 '자유(Freedom)의 의미'를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란 용어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지난 취임 연설에서 언급하면서 국제적인 의제(Agenda)로 떠올랐다. 비민주적인 국가의 정권을 교체하는 데 나설 수 있다는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을 시사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
khyou@joongang.co.kr>

중앙일보 200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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