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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1

 

베트남 전쟁은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전쟁입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에 이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한 이념 전쟁입니다.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은 처음으로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산업기반도 없는 농촌국가와의 싸움에서 진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듯이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것도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전쟁에서 물량이나 기술보다 정치적인 안정과 군대의 충성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베트남 정부와 군대의 무능과 분열과 부정부패는 미국이 아무리 원조를 많이해도 소용 없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여론분열과 반전운동, 군대의 불복종과 타락, 3차대전을 우려한 소극적인 작전 등도 패인입니다.
1부에서는 주로 베트남 전쟁의 객관적인 전쟁사를 다룹니다.
2부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소개합니다.

 

* 목차

1.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와 월맹의 저항

2. 베트남의 혼란과 베트콩의 탄생

3. 통킹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의 시작

4. 게릴라 전쟁과 남베트남의 혼란

5. 테드 대공세와 케산 대격전

6. 평화협상과 흔들리는 미군

7. 햄버거 힐과 캄보디아-라오스 작전

8. 춘계 대공세와 라인베커 작전

9. 휴지조각이 된 휴전협정과 패주의 대열

10. 티우 대통령 사임과 사이공 함락

11. 베트남전 종전과 그 후

 

1.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와 월맹의 저항

베트남은 오랜 기간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이에 저항해 왔습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아시아 각국이 여러 열강에 의해 나뉠 때 베트남은 프랑스가 지배하게 됩니다. 1884년부터 70년간 베트남은 프랑스의 가혹한 지배를 받았고, 20세기부터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좌익 공산주의 계열과 우익 민주주의 계열의 저항세력이 있었습니다.

호치민과 보구엔 지압 장군

1930년대부터 활동한 공산당의 지도자 호치민은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입니다. 2차대전시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되면서 베트남의 권력공백을 틈타 일본군이 들어옵니다. 베트남인은 처음엔 일본군을 환영했지만 곧 일본이 악날한 압제자란 것을 깨닫고 항일투쟁을 합니다. 항일투쟁을 주도한 공산당의 '베트남 독립동맹' 즉 베트민(월맹)은 훗날 북베트남으로 발전합니다.

독일이 패전하자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온 프랑스군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가자 호치민과 월맹은 베트남 북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기갑사단을 충원받은 프랑스군은 공산반군을 토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호치민은 베트남인의 항전을 호소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처음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글로 숨어들어간 월맹군을 토벌하기 힘들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있던 월맹은 주민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고 기습공격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습니다. 공산화된 중국이 이웃한 베트남을 프랑스나 미국이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월맹에 대량의 무기와 은신처를 제공했습니다. 강화된 월맹군은 1951년 1월에 프랑스군의 거점인 하노이를 4개사단을 동원해 공격했으나 프랑스군의 우세한 화력에 패주했습니다.

수송기에서 디엔비엔 푸로 강하하는 프랑스 공수부대

디엔비엔 푸 전경

1953년 베트남-중국 국경에서 쫓겨난 프랑스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하노이 서쪽 450km 라오스와의 국경의 작은 마을 디엔비엔 푸에 대규모 공세를 위한 전초기지를 세웁니다. 이곳은 중국 국경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월맹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본거지를 타격할 계획이었습니다. 1953년 11월 2개 대대의 프랑스 공수부대가 강하한 이래 디엔 비엔 푸에는 2개의 활주로와 사령부, 지하병원 등을 갖춘 거대한 요새가 건설되었습니다.

외인부대까지 합쳐진 병력은 16,000명이나 되었고 반경 3km 이내에 8개의 전초기지가 세워졌습니다. 적의 포위공격에 대비해 100대의 수송기로 보급선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전차 10대에 곡사포 28문까지 갖춘 이 요새는 프랑스군의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월맹군은 51,000명의 병력으로 요새를 포위하고 다음해 3월부터 일제히 공격에 들어갑니다. 월맹군은 대포로 요새에 포탄을 퍼부었고 생명선인 활주로가 파괴되었습니다.

식량을 운반하는 북베트남 자전거 부대

험한 산 위로 대포를 옮기는 베트민

프랑스도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하루 백명 이상의 병력을 증파하며 적극적으로 싸웠지만 전세는 불리해져 갔습니다. 8개 전초기지가 1주에 하나꼴로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의 항공기도 월맹군의 대공포에 하나씩 떨어졌습니다. 기지 중심부로 밀려드는 월맹군에 맞써 외인부대가 육박전을 펼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5월 7일 프랑스군 생존자 8천명은 항복하였고 고국에 살아 돌아간 사람은 3천명에 불과했습니다.

디엔비엔 푸를 점령한 베트민

승리 퍼레이드를 펼치는 베트민

월맹군도 23,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의 패배는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디엔비엔 푸 함락 다음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와 월맹 사이에 회의가 개최되었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트남에 미련이 남은 프랑스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미국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랐습니다. UN의 지시에 따라 1년 뒤에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해야 했지만 미국의 지원으로 남쪽에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베트남은 공산주의 월맹이 세운 북베트남과 민주주의 남베트남으로 분단됩니다.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프랑스군

패전 후 수용소로 이동하는 프랑스군 포로

 

 

2. 베트남의 혼란과 베트콩의 탄생

사이공을 수도로 한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프랑스 이익을 대변하는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이었습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과 정부관료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하급관리였던 반면 북베트남 정부의 관료는 항불투쟁 투사 출신이어서 베트남전의 앞날은 예정된 듯 보였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하며 지주의 이익을 대변한 남베트남 정권은 인기가 없었던 반면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프랑스에 대항한 독립투사란 경력 때문에 공산독재를 펼쳤음에도 남북 모두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의 반정부세력이 비밀리에 모여 '남베트남 인민해방전선'(NLK)를 결성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베트콩(VC)입니다. 남베트남에 자주적 정부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자생적으로 결성되었지만 점차 북베트남의 도움과 지령을 받게 됩니다.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에게 이들은 '내부의 적' 또는 '후방의 적'이었고, 베트남 전쟁이 '국경없는 전쟁' 내지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라 불린 것은 베트콩 때문이었습니다.

남베트남 건국 직후부터 1,500명의 미국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어 남베트남 정규군을 훈련시키고 대게릴라 전술을 가르쳤습니다. 60년대 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남베트남에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 때문에 남베트남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실정이었지만 정부 고위층과 특권층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횡령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호화생활을 함으로써 국민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싫은 사람까지 해방전선에 가담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남베트남에 큰 혼란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납니다. 베트남은 불교국가인데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디엠정권의 고위층은 대부분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불교를 탄압해 많은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해산시켰습니다. 이는 정권의 부패를 비판한 불교 지도자들에 대한 보복적 성격도 있었습니다. 분노한 젊은 승려들은 무기를 들고 해방전선에 합류했고, 원로 승려들은 자기 몸에 불을 지르는 분신자살로 맞섰습니다. 매일 사이공 시내에 분신자살하는 승려의 모습이 보도되었고, 불교를 존중하는 베트남 국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비밀경찰의 총수인 '고 딘 누'의 부인 '마담 누'가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정치에 개입해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승려들의 분신을 보고 '그래봐야 눈하나 깜짝않을 바베큐들'이라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데모대가 사이공을 휩쓸었고, 미국은 이 정권을 밀어주는 것이 헛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1963년 11월 미국이 의도적으로 눈감아준 쿠테타로 고 딘 디엠 형제는 총살당했고, '돈 반 민' 장군이 남베트남의 새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게 잘보이면 언제든지 쿠테타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끊임 없이 쿠테타가 일어나게 됩니다. 남베트남의 정정불안은 베트콩의 조직과 활동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1만명 이상 무장한 베트콩은 소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한 100명 이내의 병력으로 남베트남군이나 경찰서를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베트콩은 낮에는 선량한 시민이나 농사꾼이다가 밤이 되면 게릴라로 돌변해 소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 군사고문단이 아이디어를 내서 등장한 것이 전략촌 전략입니다. 게릴라가 아닌 양민들만 전략촌이라는 외부와 고립된 마을에 모아 놓는 것입니다. 1962년부터 3천개 이상의 전략촌이 지어졌고, 남베트남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430만명이 이곳에 수용되었지만 역효과만 불러왔습니다. 전략촌의 경비는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허술한 민병대에 의한 것이어서 베트콩은 밤마다 침투하여 사상교육을 하고 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을 인민재판을 열어 처형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씩 들리는 정부군보다 밤마다 찾아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에게 죽창을 꽂는 베트콩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전략촌 계획은 디엠 정권의 붕괴로 좌절되었고, 이후에도 '촌락 재건' 등의 이름으로 계속되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1963년 베트콩이 정부를 전복할 수 있는 거대세력임을 증명하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1,500명의 남베트남 정부군이 베트콩의 거점인 '압 박' 마을로 진격합니다. 공군기와 포병대의 화력지원까지 받았지만 베트콩은 박격포와 무반동포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고 정부군 장갑차와 헬리콥터들은 하나씩 파괴되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베트콩은 이 지역을 벗어났고 정부군은 200명이 사상했지만 베트콩은 12명만 사상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 군사고문단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고, 고문군으로 승격되어 규모도 1만명이 되었습니다.

 

 

3. 통킹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의 시작

이무렵 미국은 이미 10만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64년부터 미군의 특수공작팀이 북베트남의 해안지대를 기습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통킹만 앞 공해상을 지나던 구축함 매독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공격을 당했는데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조작인 것으로 밝혀진 이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전쟁이 발발합니다. 미국 의회는 만장일치로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했고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공습을 명령합니다. 북폭 즉 롤링 썬더 작전으로 선전포고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1972년까지 120만번의 출격으로 200만톤의 폭탄을 북베트남 전역에 퍼부었습니다.

북베트남도 남베트남에 정규군을 투입하면서 전쟁을 시작합니다. 60년대 중반부터 남베트남의 정정불안으로 인해 남베트남 국토의 절반 정도가 정부의 치안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로 불리었습니다. 이곳에서 베트콩은 행정조직을 갖추고 정규군처럼 연대 사단 편제를 갖추었습니다. 북베트남이 장교와 무기를 지원하자 이들은 게릴라전에서 정규전까지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은 남베트남을 지원했지만 남베트남 정부는 부패했고 군대는 쿠테타를 일삼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베트남 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북베트남에 기습공격을 가할 것을 주장했지만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의 후견인인 중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NVA(북베트남군)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들은 65년 2월 7일 플레이쿠의 미 군사고문단 비행장과 장교숙소를 기습하여 100명의 사상자를 내고 70여대의 항공기를 파괴하였습니다. 며칠 뒤 미군이 사용하던 퀴논의 한 호텔이 대폭발로 무너졌고 미군이 있는 곳 어디서나 테러가 자행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는 것으로 맞섰지만 농업국인 베트남엔 파괴할 산업시설이나 도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생쌀 한줌으로도 며칠을 버티는 베트남인의 정신력도 놀라웠습니다. 중국과 인접한 최북단은 중국을 자극할 염려가 있으므로 폭격하면 안되었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경유하는 호치민 루트도 제3국이므로 폭격하면 안되었습니다. 그밖에도 중국이나 소련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는 항만도 중국이나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폭격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북베트남의 방공망이 강화되면서 미군기의 피해도 늘어갔습니다.  소련은 65년부터 90기의 SA-2 지대공 미사일과 MIG 17~21기 전투기 70여대를 지원했고, 이에 따라 미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격추되었습니다. 격추되어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한 비행사들은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평화협상 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대민봉사활동과 전투를 벌이는 한국군

본격적인 지상군 파병에 앞서 미국은 연합군을 모집했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방지란 명분으로 한국, 호주, 뉴질랜드, 대만, 태국, 필리핀 등 25개 나라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65년 2월 14일 한국의 제1외과병동과 태권도 교관을 포함하는 군사원조단, 경비대대, 공병대대, 수송중대 등 2,000여명의 비둘기부대가 베트남 파병되었습니다. 미국과 베트남이 한국에 전투병력을 요청하자 63년 9월 20일 맹호부대(수도사단)과 청룡부대(해병 제2연대) 파병되어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10월 8일 백마부대(9사단)이 마지막으로 파병되어 오작교 작전 등을 수행했습니다.

65년 3월 미군 비행장 경비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다낭에 해병대 2개대대가 상륙해 지상군의 파병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베트남에 최초로 파견된 사단급 전투부대는 제1기병사단입니다. 말을 타고 광활한 서부를 누비던 기병사단은 이제 헬기를 타고 베트남을 누비게 됩니다.

65년 8월 베트콩 탈영병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해 다낭 인근의 미 해병대를 기습공격하려는 베트콩 부대를 선제공격하는 스트라이트 작전이 시작됩니다. 물렁한 남베트남군과의 전투에 익속하던 베트콩은 강력한 화력과 치밀한 작전, 헬기의 기동성을 갖춘 미군과의 첫 전투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베트콩 1개연대가 미 해병대의 포위망에 갇혔고, 간신히 정글로 도망갔지만 700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이에 반해 미군은 5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65년 10월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증파되기 전에 3개사단을 DMZ에 투입해 플레이쿠와 안케와 퀴논을 점령하고 베트콩의 사이공 봉기로 남베트남을 점령한다는 동슈안 작전을 계획합니다. 공격로가 될 라드랑 계곡은 험준한 계곡과 정글로 뒤덮혀 있으므로 미군보다 북베트남군에게 유리할 것이란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습니다. 북베트남군의 의도를 간파한 미군은 남베트남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플레이쿠로 제1기병사단을 출동시킵니다.

미군이 전선에 네이팜탄 폭격과 B-52의 융단폭격까지 하자 북베트남군은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미군은 헬기로 적의 예상도주로에 미리 날아가 기다리고 있다가 북베트남군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북베트남군은 1,8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동슈안 작전은 실패하였습니다. 미군은 역사적으로 2차대전과 한국전쟁 등 낮선 곳의 첫 전투는 패배하였는데 베트남의 첫전투는 비록 240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승리하였습니다.

 

 

4. 게릴라 전쟁과 남베트남의 혼란

미군은 베트콩과의 직접적인 교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를 굳힐 수는 없었습니다. 격전 끝에 적을 몰아내면 남는 것은 농민들뿐이었고 지켜야 할 것이 없는 농촌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정글 속에 숨어 있던 베트콩이 다시 나타나 농민들에게서 곡물을 거두어 갔습니다. 미군은 아무리 전투에서 이겨도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군은 사이공 북쪽 20마일에 있는 벤캇, 벤 쑤억, 푸 추옹 등 3개 지점을 잇는 40 평방마일의 정글을 철의 삼각지대라 불렀습니다. 이곳은 월맹군이 대프랑스 전쟁을 할 때부터 사용하던 곳입니다. 철의 삼각지대에는 수천명의 군인을 수용하고 수개월치의 무기와 식량을 숨긴 지하터널이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베트남군과 미군이 몇차례 소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AK-47과 RPG 등으로 무장한 베트콩

미군은 이곳에 고엽제를 살포하고 정글을 불사르는 등 온갖 초토화작전을 실시했으나 땅속에서 베트콩 1개연대가 순식간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발을 들여놓기 싫은 곳이 되었습니다. 1965년 미 173 공수여단과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이 이곳을 공격해 지상을 불사르고 수많은 적을 죽이거나 생포하고 발견된 터널 임구를 폭파하거나 휘발유를 붓고 불살랐습니다. 연합군은 엄청난 무기와 문서를 노획하고 지하요새를 분쇄했다고 선언했지만 불과 3일만에 지하요새의 기능은 회복되었습니다.

1967년 1월 미군은 2개사단과 1개 공수여단과 기계화 여단과 B-52의 융단폭격까지 동원해 지하요새 섬멸작전을 펼쳤습니다. 좁은 땅굴을 수색하기 어려웠던 미군은 터널을 폭파하고 불도저로 밀어 묻고 땅을 거대한 롤러로 다졌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북베트남군이 나타났고, 일주일 뒤에는 지하요새의 모든 기능이 복구되었습니다.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와 분열도 베트남 패망의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부패와 독직을 일삼던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을 축출하고 수상이 된 두옹 반 민 장군으로부터 시작된 쿠테타는 전쟁 중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쿠테타로 인한 정국 혼미는 1965년 구엔 반 티우 대통령과 구엔 카오 키 수상의 양두체제가 확립되면서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쿠테타군 출신 지도자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대학생들의 저항이 심했습니다.

반정부세력을 조장해 정권을 얻을 욕심이 있었던 군부는 시위를 진압하기는 커녕 부추겼고, 후에와 다낭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방송국이 데모대에 점령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군대는 분열되었고 이들의 목적은 정권탈취였지만 명분은 민주화, 종교 자유, 전쟁 승리 등이었습니다.

심지어 남베트남 보병 1사단 전체가 현정권 타도를 외치며 후에 시내를 행진했습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키 수상은 남베트남 정예 해병대를 수송기에 실어 다낭 비행장에 파견했습니다. 미군 소유 비행장이 전쟁터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이곳을 지키던 미 해병대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당황했습니다. 결국 미군의 중재로 충돌 없이 사태가 진정되었지만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구엔 찬 티 장군은 계속 1군단장 자리를 지키며 정부의 명령에 공공연히 불복했고 이런 군대가 제대로 싸울리 없었습니다.

1967년 9월 북베트남 스파이까지 입후보한 아수라장 대통령 선거 끝에 티우가 대통령, 키가 부통령이 되어 정국은 다소 안정되었습니다. 쿠테타가 아닌 민의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정당성 때문에 정적들의 시비꺼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5. 테드 대공세와 케산 대격전

남베트남의 정치가 혼란을 거듭하자 북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을 뒤집을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북베트남군의 보 구엔 지압 장군은 군사경력이 없는 법학자였지만 프랑스를 데엔 비엔 푸에서 격퇴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전력을 다해 일시에 공격하는 대공세를 기획합니다. 1967년부터 전투의 규모가 커져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북베트남군(NVA)과 베트콩(VC)의 연계작전이 늘었습니다.

베트남 최대의 명절은 음력설로 베트남어로 테드입니다. 테드 기간 동안 남베트남군(ARVN)은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는데 1968년 1월 28일 명절에도 남베트남은 36시간의 휴전을 선언하고 대부분의 군사들이 귀향했습니다. 베트남 전역에 귀성인파가 급증하면서 검문검색이 느슨해졌고, 전국적인 축제 분위기에 미군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늘어난 교통량에 편승해 무기와 병력을 운반했습니다.

1월 30일 0시 30분 남베트남 주요 8개 도시에서 일제히 베트콩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미군기지와 남베트남군기지가 습격을 받았고, 시내 미군 위락시절에 베트콩이 뛰어들어 AK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남베트남군은 오전 10시에 복귀령을 내렸지만 군기가 해이한데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병사들은 잘 귀대하지 않았습니다.

구정공세(Tet Offensive) 후에(Hue) 접전의 미군과 남베트남군

북베트남도 실수를 했는데 원래 베트콩이 봉기하면 북베트남군도 일제히 공격해야 하는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연합공격은 31일 새벽 3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공격에 긴장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에 대비하고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격의 규모가 워낙 크고 전국적이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베트남 와조시대의 수도였던 후에시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의해 25일이나 점령되었습니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도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앞마당이 점령되고 대사관을 지키던 경비병과 직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베트콩들은 격퇴되었지만 이 사건은 미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반전여론이 확산되었습니다. 미국 TV 카메라는 대사관 직원이 기관단총으로 응사하는 장면과 RPG를 맞은 대사관을 방영했습니다. 기자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이 적에게 함락당했다는 멘트를 했을 때 미국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케산 기지 전경과 지하벙커의 미해병

베트남에서 미 해병대 최대의 격전지는 라오스 국경에서 10km 떨어진 고산지대의 작은 마을 케산입니다. 원래 이곳은 미군 그린베레의 훈련을 받은 산악부족이 지켜왔지만 67년부터 활동이 늘어난 북베트남군을 견제하기 위해 해병 3사단이 파견되었습니다. 케산에 수송기 C-130까지 이착륙할 수 있는 방어기지가 구축되었습니다. 1년 내내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인 산악지역이 적략적으로 큰 가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68년 1월 21일 북베트남군은 테드 대공세를 은폐하려는 양동작전으로 2개사단을 동원해 케산을 공격했습니다. 북베트남군은 해병대 진지에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치열한 백병전도 일어났지만 테드 대공세 이후에는 간헐적인 포격만 했습니다. 남베트남 석권에 실패한 북베트남군은 케산의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만들 계획으로 잔존병력을 집결시킵니다.

미국 언론도 케산이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보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화력은 프랑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습니다. 미군의 B-52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북베트남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B-52의 융단폭격은 1km 밖의 참호 속 병사가 내장파열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합니다. 폭격이 뜸해지면 북베트남군은 방어선을 뚫기 위해 자살공병까지 보냈고, 미군은 이들을 탐지하기 위해 지상감시 레이더까지 동원했습니다.

케산에선 첨단무기부터 대검까지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졌는데 고립된 지역의 생명선은 보급입니다. 케산의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한 미공군의 하루 150톤에 달하는 충분한 물자를 보급받아 물량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의 포격도 케산에 집중되었고 수송기의 피해도 늘어갔습니다. 미군 수송기는 착륙시 활주로에 멈추지 않고 뒤쪽 해치를 열어 화물을 흘리고 그대로 출력을 높여 날아가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북베트남군은 2월 7일 PT-76 경전차까지 동원해 케산 주변의 랑베이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랑베이를 지키던 그린베레와 산악 민병대는 3대의 전차를 파괴했지만 압도적인 병력의 북베트남군에 밀렸고 소수 대원만이 헬기로 탈출했습니다. 나머지 전차는 얼마 안가 미군의 항공공격으로 격파되었습니다. 미 해병대도 2월 8일 M48 전차로 진지 외곽을 돌파한 북베트남의 공격을 분쇄하기도 했습니다.

치열한 케산 공방전도 3월 중순부터 한풀 꺽였는데 정글 아래쪽이 송두리채 없어지는 엄청난 화력과 끝없는 소모에 북베트남군이 지쳤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육군 대부대가 헬기의 공중기동으로 포위망을 뚫고 진격해 4월 6일에는 해병대와 만났습니다. 미군은 도주하는 북베트남군을 101 공수사단을 동원해 라오스 국경을 따라 추격했습니다.

사상자수로 보면 케산 전투는 미군의 승리였습니다. 미군은 250명이 전사한데 비해 북베트남군은 15,000명이나 사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언론은 미군 사상자와 엄청난 물량전을 이유로 전쟁을 회의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베트남전에 수십만의 병력과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 4년이나 전쟁을 끌고도 이기기는 커녕 적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만 아니라 20만명의 추가파병 계획이 큰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6. 평화협상과 흔들리는 미군

미국 의회도 베트남 전쟁 비용의 삭감을 계획하자 존슨 행정부는 전쟁에서 이기기 보다 부끄럽지 않게 전쟁을 끝내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68년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북폭 중단을 지시하고 북베트남에 협상을 제안합니다. 68년 5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월맹군의 공세는 계속되었습니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남침과 베트콩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고 했고, 북베트남은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주장했습니다.

악화된 여론에 몸과 마음이 지친 존슨 대통령은 베트콩을 동일한 자격으로 평화회담에 참석시키고, 연합군의 공세를 중지시켰습니다. 69년이 되자 주월 미군 총사령관은 에이브람스 대장으로,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와 군을 성장시킨 후 철수할 계획이었지만 북베트남군의 요구는 강경했습니다. 북베트남은 연합군의 철수와 함께 미군 포로 석방에 대한 배상금 지급과 베트콩을 또하나의 정부로 인정할 것과 남베트남 정부의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베트남의 이웃국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중립국가였지만 북베트남은 이곳을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도피시키는 장소와 정글 속에 도로를 건설해 병력과 물자를 수천대의 트럭으로 운반하는 호츠민 루트로 이용했습니다. 닉슨은 69년 3월 호치민 루트를 B-52로 융단폭격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이는 오히려 반전여론을 증폭시켰습니다.
 69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반전시위에선 북베트남 수상이 미국 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낭독될 정도였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국내와 군사적 외교적으로 이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선의 군인들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이여서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해야 했는데 적을 먼저 찾아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은 베트남 국토를 여러 등급으로 나눠 가장 위협적인 곳들을 FFZ 즉 자유발포구역으로 분류해 기습을 받는 즉시 응사할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미군은 병사들은 FFZ를 적지로 인식해 총을 쏴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은 베트콩이고 나아가서 모든 동양인은 베트콩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동양인을 원숭이로 취급하던 인종적 편견에 문화적 충돌, 끊임 없는 기습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미군은 1968년 3월 16일 드디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쾅나이성의 밀라이 마을 주변에서 미군 1개중대가 마을 주민 거의 전부인 347명을 M60 기관총과 수류탄을 동원해 죽인 밀라이 학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아무리 이 지역이 베트콩 지역이고 사건을 벌인 20연대 1대대 C 중대가 사건 직전까지 베트콩의 잦은 기습으로 병사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해도 노인과 어린이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 사건은 미국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물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양민학살도 심각했지만 인권과 도덕의 수호자를 자처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이 사건은 북베트남과 미국 반전세력에게 절호의 선전거리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반전운동과 자유, 평화, 성개방,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히피문화가 확산되면서 미군도 점점 문란해졌습니다. 당시 미군은 지금과 같은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였는데 매일 반전대모를 하던 젊은이들이 징병을 기피하거나 군대에 들어가더라도 군대 물을 흐리는데 한 몫 했습니다. 탈영병이 급증하면서 군 수사요원이 사이공 시내를 뒤졌고, 일부 탈영병들은 중국에까지 가 미국 정부를 성토했습니다.

여기에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차별 문제까지 등장했는데 인구의 10%에 불과한 흑인이 군대에선 30%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백인이 흑인을 총알받이로 쓴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군대 내 불복종과 반란은 '프래킹' 즉 수류탄으로 소대장을 죽인다는 속어로 나타났습니다. 69년부터 72년까지 상관을 살해하거나 기도한 사건이 800건이나 보고되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점차 심각해지던 마약문제도 베트남에서 확산되었는데 미군들은 천혜의 마약산지인 동남아시아의 마약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글에 널린 자연산 대마초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아편, 그리고 아편에서 추출한 헤로인은 군 수사기관도 손댈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버렸습니다. 마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미군 병사들은 풍부한 보급물자를 빼돌렸고, 엄청난 양이 베트남의 지하경제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미군이 빼돌린 군수품 중 일부는 베트콩에게까지 흘러들어 갔습니다. 군대 전력이 될 수 있는 의약품, 식량, 무기 등이 부패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해 적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또한 미군은 전쟁 중에 초급 장교를 급격히 늘렸는데 자질이 떨어지는 이들 소대장 중대장 등에 의해 각종 사고, 학살, 불복종 사건 등이 일어나 전력을 떨어뜨렸습니다.

 

 

7. 햄버거 힐과 캄보디아-라오스 작전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햄버거 힐은 라오스 국경 1마일 지점 아싸우 계곡의 압비아 산에 미군이 붙인 이름입니다. 고도 후에와 베트남 제2도시 다낭이 이어지는 전술적 요충지이자 주요 보급로인 이곳은 원래 그린베레가 원주민 부대와 점령했으나 66년 북베트남군 2개연대가 점령했고 이후 몇차례 주인이 바뀐 곳입니다. 1969년 5월 미군 101 공수사단은 이곳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무자비한 폭격과 돌격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북베트남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서 미군은 애를 먹었습니다. 산 정상의 고지를 향해 소총을 쏘며 전진하는 육박전과 포탄과 수류탄이 오가는 끝에 많은 월맹군과 미군의 살점과 피가 땅에 얼룩지자 이곳을 햄버거 힐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6일간의 혈전 끝에 북베트남군 600명 미군 50명의 전사자를 내고 고지를 점령했지만 적들에게 둘러싸여 장기주둔하기 힘든 미군은 바로 철수합니다.

미군은 보병부대와 활약이 뛰어났음을 선전하려 했지만 이 전투는 오히려 역효과만 나았습니다. 영구점령할 곳도 아닌 곳에 큰 희생을 감수하며 무리한 공격을 하였고, 이런 식의 허무한 전투는 베트남전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증거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1968년 이후 반전여론으로 인해 베트남전에서 승리하기 보다 협상을 통해 흉하지 않게 물러날 계획을 세웁니다. 따라서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는 줄이고 남베트남군의 장비를 현대화하는 등의 간접적인 투자를 늘렸습니다. 이렇게 증강된 남베트남군의 능력을 시험할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지만 북베트남군의 은신처이자 보급로였습니다.

캄보디아의 국왕 시아누크는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점령군처럼 위세를 떨치던 북베트남군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등에 업은 무혈 쿠테타로 시아누크가 권좌에서 쫓겨나면서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새 캄보디아 정권은 미국에게 북베트남군을 자기 나라에서 쫓아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물러날 기회를 찾는 미군에게 대대적인 작전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남베트남군이 공세의 전면에 서고 미군이 그 뒤를 받쳐준다는 작전이 닉슨에 의해 승인되었습니다. 4월 29일 '토탈 빅토리'란 작전명으로 남베트남 3군단이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로 진격했습니다. 남베트남군은 헬기로 신속히 진격했고 미군의 지원으로 적 사살 11,390명, 포로 2,300명이라는 상당한 전과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북베트남군의 주력부대는 철수했고, 전과도 일부 부풀려졌습니다.

71년 1월 남베트남군은 라오스에서 '람손 719'란 작전을 벌였습니다. 미군의 항공지원에도 불구하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남베트남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적의 공세를 막아냈다는 명분으로 결국 라오스에서 철수했습니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군 모두 병력과 물자의 절반 가까이를 손실한 비긴 전투였습니다.

 

 

8. 춘계 대공세와 라인베커 작전

춘계 대공세 당시 남베트남 진지를 포격하는 북베트남 122미리 야포

1971년 북베트남의 후원국인 중국이 미국과 화해하면서 북베트남은 초조해집니다. 미국이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중국에게 북베트남 지원 중단을 요구하기라도 하면 북베트남은 끝장 나므로 전쟁을 단번에 끝낼 대공세를 준비하게 됩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철에 맞춰 미군의 개입을 최소화한 전쟁에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군은 정면대결하게 됩니다.

북베트남은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징집연령을 14세에서 45세까지로 늘렸고,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수백대의 전차, 중포, 군수물자를 지원받았습니다. 북베트남 15개 사단 중 12개 사단을 투입한 공세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총력전이자 정규전이었고, 게릴라전이 아니었습니다. 중포를 동원해 선제포격을 한 후 전차부대가 돌진하고 보병부대가 뒤따르는 전격전은 근대전 경험이 없는 북베트남군에겐 무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의 미군이 15만으로 줄어든데다 8월까지는 모두 철수할 상황이어서 해 볼만 했습니다. 미군도 71년 말부터 북베트남의 동태를 파악하고 비상태세에 돌입했습니다. 바짝 긴장한 미군이 풀어질 3월 30일 드디어 북베트남 12개 사단이 남침을 개시해 춘계 대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4월 2일 남베트남 최북단의 도시 동하이 외곽까지 위험에 처했지만 미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미군의 B-52 폭격은 여전히 위력적이었고, 남베트남 1사단과 해병대가 선전해 북베트남군의 진격을 저지했습니다. 기갑전을 해 본 경험이 없는 북베트남군은 기갑부대와 정규군의 엄청난 보급물자를 조달할 군수지원체제가 부족했고, 공격은 얼마간 중단되었습니다. 4월말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미군의 항공지원이 뜸해지자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재개되었고, 동하이가 함락되면서 쾅트리도 혼란에 휩싸입니다.

쾅드리 탈환작전 중인 남베트남 공수사단 M48A3 전차와 남베트남군 M-24 경전차

북베트남군이 공격하기도 전에 쾅트리 외곽을 방어하던 남베트남 병사들이 전선을 이탈해 시내로 몰려들었고, 3사단장도 부대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탈영한 병사들은 총을 든 폭도로 변해 피난민들을 약탈했습니다. 이때 미군이 인정하는 베트남의 군인 트루옹 장군이 이끄는 1군단이 사태를 수습했는데 탈영병과 약탈자들을 현장에서 사살하자 질서가 회복되었습니다. 북베트남군의 기세도 떨어져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B-52 폭격기와 AC-130 건쉽

1972년 안케 고지의 한국군만 선전할 뿐 나머지 지역에선 대치상태이거나 패배가 잇따라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남베트남군이 멀쩡한 전차를 버리고 달아나 북베트남군이 쓰지 못하도록 미군기들이 폭격을 하는 사태마저 있었습니다. 미군은 남베트남에 대량의 보급물자를 지원하고 전선에 폭격을 퍼붓는데 그치지 않고 4월부터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즉 북폭을 시작했습니다.

라인베커 작전은 북베트남 수도 하노이부터 발전소, 공장, 교량, 항만 등 모든 시설을 B-52 폭격기, AC 130 건쉽 등으로 폭격하는 것이었습니다. 6개 주요 항구에는 기뢰까지 공중투하되어 배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북베트남도 춘계 대공세에서 고전하면서 10만의 병력손실을 입은데다 북폭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자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개된 평화회담은 북베트남이 승리했습니다.

베트남에서 빨리 발을 빼고 싶던 미국은 1973년 1월 28일 북베트남과 다음 내용의 협정을 체결합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일체의 군사원조를 할 수 없고, 모든 외국군대는 철수해야 하며, 북베트남은 일체의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미군포로를 전원 석방한다는 것입니다.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은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팔아 넘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미국의 개입은 끝났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자기 힘만으로 싸워 이겨야 했습니다.

 

 

9. 휴지조각이 된 휴전협정과 패주의 대열

휴전협정 이후에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성사된 휴전협정이 휴지조각이 되는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북베트남은 언제 남베트남을 공격할지 저울질 하다1973년 11월 1개사단을 동원해 쾅독성의 남베트남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만약 미군이 폭격을 하면 공세를 미루고 미군이 가만 있으면 기다릴 것 없이 바로 공격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군이 아무 반응이 없자 새로 준비된 전투부대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전투준비를 했고, 미군이 기뢰를 제거해준 덕분에 북베트남의 항구에는 중국과 소련 배들이 무기와 탄약을 날랐습니다.

이에 반해 남베트남의 상황은 한심했습니다. 일치단결해 적을 막기는 커녕 고위층부터 해외도피 자금을 마련하기 바빴고 부정부패는 더 심해졌습니다. 전국민이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고, 강경파 닉슨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됩니다. 게다가 오일소크로 미국경제가 얼어붙으면서 베트남에 대한 경제-군사 원조가 급감했고, 남베트남이 갖고 있던 미국제 최신장비들은 부품과 연료부족으로 고철덩이가 되었습니다. 1975년 1월 미국 의회 조사단은 추가원조가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것은 남베트남에 대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전면공세 작전을 수립했고, 남베트남 통치방안까지 마련했습니다. 1974년 12월 사이공에서 13km 떨어진 푸옥롱성에서 북베트남 2개사단이 대규모 전파부대를 앞세우고 밀려들었습니다. 미국의 재개입 의지와 남베트남의 능력을 평가해 보려던 전투는 전면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티우 대통령은 이곳을 포기했고 미국도 항모 한척이 접근할 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80년대에 조국해방을 하려던 북베트남은 이재 앞으로 2년 안에 무력통일을 완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드디어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에 대한 최후의 대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중부 고원지대 반메투옷을 지키던 4개 대대가 하루만에 궤멸되고 반메투옷시도 그날 밤 10시에 점령당했습니다. 반메투옷이 완전히 공산화된 13일에도 남베트남은 현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할만큼 전황파악도 엉망이었고, 사이공 방송은 적의 공세를 성공리에 격퇴했다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주변을 지키던 플레이쿠와 콘툼을 지키던 부대는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패주를 시작했고, 1진이 철수하자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북베트남군은 뜻밖의 결과에 어리중절하다 사태를 파악하고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남베트남군이 숫자는 더 많았으나 승기를 잡은 군대와 전의를 잃고 도망치는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중부 고원지대의 2군단은 사라져버렸고, 무능한 군단장은 헬기로 탈출해 사이공에 도착해 신병을 핑계로 육군병원에 입원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열흘도 되지 않아 퀴논, 투이호아, 나트랑 등 남베트남 북부의 요충지들이 거의 저항 없이 함락되었습니다. 유일하게 군대다운 대열을 유지하던 트루옹 장군의 1군단도 밀려드는 수만명의 피난민으로 인해 방어태세를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1군단의 방어선이 뚫리면 다음 목표는 수도 사이공입니다. 군단장이 용장이라도 병사들은 저항할 의지가 없었고, 3월 19일 북베트남군의 돌격이 시작되자 1군단 병사들도 흩어졌습니다.

티우 대통령이 남베트남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거액의 해외도피자금을 북베트남으로 받았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병사들의 사기를 꺽었습니다. 방어선은 쾅트리로, 다시 후에로, 다시 다낭으로 하는 식으로 남쪽으로 밀려났고, 패잔병들과 피난민들은 수도 사이공으로 도망쳤습니다. 남베트남의 장교들이 탈영병에게 사살당하고, 판랑 지역의 공병대 패잔병들이 불도저로 대통령 아버지 묘소를 밀어버리는 등 사건이 속출했습니다.

북베트남군은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 사령부 상황지도에 진격상황을 표시할 수 없을 정도였고, 점령지구가 너무 빨리 늘어나 현지로 내려보낼 공무원이 모자라는 실정이었습니다. 3월 29일에 베트남 제2도시 다낭은 지키는 병사도 없는 상태에서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입성한 북베트남군이 발견한 것은 군단이 사용할 수 있는 탄약과 포탄과 식량이었습니다. 남베트남군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10. 티우 대통령 사임과 사이공 함락

북베트남군에 의해 포위된 사이공과 주변은 대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민족 반역자 티우 대통령을 사이공 시민들이 제거하면 총공세를 멈추고 연립정부를 구성하겠다'는 북베트남의 거짓제안에 넘어간 부수상 겸 공군참모총장인 구엔 카오키가 쿠테타를 시도하다 실패해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4월 8일에는 한대의 남베트남 공군 전투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한 후 북베트남에 귀순했습니다.  조종사 트룽 중위는 대학시절부터 북베트남에 포섭된 공산당원이었고, 이는 남베트남 군과 정부에 얼마나 간첩이 많은지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1975년 4월 9일 마침내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에서 69km 떨어진 작은 도시 쑤안록을 공격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북베트남군이 오랜만에 전투다운 전투를 벌였습니다. 약체로 알려진 18사단이 선전해 2개사단의 북베트남군을 1주일이나 막아냈습니다. 사이공 시민들은 오랜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티우 대통령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미 의회가 베트남 미국인 철수비용 3억달러를 승인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미국 대사까지 사임을 권유하자 티우는 부통령 후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대만으로 망명했습니다. 그의 뒤는 금괴를 가득 실은 베트남 공군기가 뒤따랐습니다. 남베트남 고위관료들은 이미 처자를 해외로 도피시키고 자기도 여차하면 비행기를 탈 준비를 했고, 이러한 모습에 시민들은 냉소를 보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흉흉한 민심 속에 술집이 오히려 호황을 누렸고 밤 8시 통행금지를 지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이공이 무너지면 휴지조각이 될 피아스타화를 대신할 달러수요가 폭발해 암달러 환율이 치솟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후옹 대통령은 1주일만에 물러났는데 북베트남이 티우의 잔당인 후옹과 대화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1963년 디엠 정권을 쿠테타로 전복한 전력이 있는 두옹 반 민이 다음 대통령이 되어 휴전을 제의했지만 북베트남에게 휴전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유일한 탈출로인 탄손누트 공항이 폭격으로 불탔습니다. 1주일을 버티던 쑤안록이 무너지자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에선 기밀문서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솟아 올랐습니다.

4월 26일 사이공을 포위했던 북베트남 5개군단이 일제히 돌격을 시도합니다. 끝까지 밀린 남베트남군도 최후의 저항을 했습니다. 사이공 외곽에서 베트남 육군사관 생도들이 무려 4일이나 북베트남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육군참모총장은 이미 미국으로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대부분의 군 지휘관이 도망쳤지만 쑤안록 전투에서 선전한 18사단장 다오 준장은 사이공 근교의 공군기지 비엔호안을 사수하다 전사했으며, 7사단장 트란반 하이 준장은 권총자살했습니다.

 

 

11. 베트남전 종전과 그 후

미국 대사관은 4월 19일부터 탄손누트 공항을 이용해 대부분의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을 철수시켰지만 대사를 비롯한 일부 직원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언론사 특파원, CIA 현지요원, 미국인과 결혼한 배우자, 우방국 국민에 이르기까지 구출해야 할 사람이 많았습니다. 수백대의 헬리콥터가 미국 대사관 옥상과 미해군 항모 사이를 오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헬기에 타기 위해 미국 대사관 주위로 몰렸지만 대사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미 해병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고 최루탄을 던졌습니다.

4월 30일 미국 대사관의 주요시설을 폭파한 후 폭파반과 미 해병대 경비병력이 마지막 헬기에 탑승해 탈출함으로써 미국의 30년에 걸친 베트남 개입은 막을 내립니다. 그로부터 한시간 뒤 민 남베트남 대통령은 라디오로 전군에게 발포중지를 명령함으로써 항복합니다. 민 대통령과 도망치지 않은 남베트남 각료들은 정장을 하고 북베트남과 정권인계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기다렸지만 전차 한 대가 대통령궁 철문을 밀어붙이고 들어섭니다. 북베트남 선도부대 지휘관은 관료들에게 전쟁포로와 의논하지는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이날 오후부터 사이공 거리에는 북베트남 병사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북베트남이 초강대국 미국과 100만 남베트남 군사를 물리쳤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점령군의 살인, 약탈, 강간 사건은 거의 없었고, 호텔을 배정받은 병사들은 침대를 두고 바닥에 모포를 깔고 잤으며, 시설이나 집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군율과 기강이 살아있는 군대를 지휘관이 앞장서서 도망가는 남베트남군이 이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베트남전 종전 후 사이공은 호치민시로 바뀌었고, 자본주의 물이 든 남베트남 시민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재교육을 받았고 이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모든 출판사와 신문 등 언론이 폐간되었고, 은행 예금이 동결되어 사유재산을 잃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남베트남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종교 지도자나 지식인 등 반정부 세력도 투옥된 사실입니다. 이들은 지지기반이 많고 북베트남에도 반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영화, 음악, 패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적인 것은 모두 금지되었고, 이런 사회분위기가 풀린 것은 90년대 베트남의 대외개방정책인 도이모이를 추진할 때에 이르러서입니다. 공산주의자의 탄압을 피해 많은 베트남인들이 몰래 배를 타고 빠져 나왔습니다. 이들이 보트 피플인데 처음엔 인도주의적으로 받아주던 나라들도 150만명을 넘어서자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전사 56,000명, 부상 20만명을 기록했고,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지불했으며, 극심한 국론분열을 겪었지만 남은 것은 패전의 악몽 뿐입니다. 남베트남은 전사 20만명 부상 50만명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피해를 한번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잇따른 폭격과 작전실패로 북베트남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전은 같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줍니다.

 

* 참고서적: 베트남 전쟁(홍희범, HOBBIST)

* 관련서적: 미국의 베트남 전쟁(조너선 닐, 책갈피)

* 관련사이트:

http://cafe3.ktdom.com/vietvet/main.htm

http://vetkor.com/index2.htm

http://www.vietnamwar.co.kr/home.htm

http://airwar.hihome.com/airwar/vietnam/viet-menu.htm

http://www.viet-vet.com/ 

http://blog.naver.com/recte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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