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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2 (관련자료)
 

‘통깅만 사건 조작’ 40년만에 밝혀졌다

[한겨레] 당시 국방부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함정 공격” 발표
국가안보국 중간간부가 정보조작…내부 연구관 밝혀내

미국의 베트남전 본격 개입의 빌미가 됐던 이른바 ‘1964년 통킹만사건’의 정보왜곡 진상이 40여년만에 밝혀졌다고 <뉴욕타임스>가 31일 보도했다.

당시 미 국방부는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각각 1964년 8월2일과 4일 통킹만 공해에서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8월5일 보복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매덕스호가 먼저 공격했다고 반박하는 등 사건의 실체는 완전히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후 역사연구에서도 8월4일의 두번째 공격은 없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2001년 미 국가안보국 역사연구관인 로버트 한요크는 당시 감청문서 등을 조사한 결과, 감청요원들이 전문을 잘못 해석한 뒤 국가안보국의 중간간부가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음을 밝혀냈다. 이는 정치적 동기보다는 실수를 덮기 위한 것이었지만, 존슨 대통령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의회의 북폭 결의안을 촉구하는 데 이를 이용했다.

남베트남 푸바이 감청소와 필리핀 산미구엘 감청소가 8월4일 입수한 북베트남의 전문 내용은 이틀전 상황과 관련해 “두명의 동무가 희생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청요원들은 “두 척의 함정을 잃었다”며 8월4일의 새 교전 결과를 보고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89)는 이날 <뉴욕타임스>와 회견에서 “전문이 변조된 것도 모르고 의회 증언에 나선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며 관련문서의 공개를 촉구했다.

한요크의 연구결과는 2001년 비밀로 구분돼 국가안보국 내부잡지인 <계간 암호해독>에 실렸다. 그러나 국가안보국 고위층은 이라크 침공을 위한 정보조작과 비교될 것을 우려해 대외적으로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는 국가안보국 인사들의 말을 이용해 보도했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한겨레 2005-10-31

 


 

 “1964년 통킹만사건은 美의 조작극”

 북베트남이 미군구축함 공격했다고 정보왜곡

 미국의 베트남전 확대개입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통킹만사건(북베트남의 미군함정 폭격사건)은 미국가안보국(NSA) 소속 감청요원들의 의도적 정보왜곡에 따른 조작임이 2일(현지시간) 밝혀졌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통킹만사건 전후 북베트남 관리들의 통화내역 감청자료를 분석한 로버트 한요크 NSA 역사연구관의 보고서를 인용, “그날 밤(통킹만사건 발발일·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으로부터 아무런 공격이 없었고, 다만 공격이 발생한 것처럼 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있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한요크는 통킹만 사건 전후의 북베트남 통화내역 감청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같은 보고서를 지난 2001년 NSA 내부에 발표했으나 NSA측은 이 논문을 대외비로 분류, 외부공개를 막았다. 그러나 한요크의 보고서내용 일부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보고서 공개요구가 잇따르자 NSA는 한요크보고서를 통킹만사건 문건 비밀해제 시기에 맞춰 지난달 30일 인터넷에 공개했다.

‘통킹만 사건’은 지난 1964년 8월 2일과 4일 북베트남측이 통킹만에 주둔 중이던 미군 구축함을 2차례에 걸쳐 공격했다고 발표된 사건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북폭 결정을 내리고, 미 의회는 베트남에 대한 전면개입을 승인했다.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개입, 미군 5만8000여명과 베트남민간인 200만명이 희생됐다.

한요크는 2001년 보고서에서 “통킹만사건에 앞서 NSA관리들이 북베트남 통화비밀 감청내역을 교묘하게 왜곡해 북베트남이 미국의 구축함을 공격했다는 정보를 정책입안자들에게 보고했고, 정책결정자들은 그같은 허위보고에 의거해 통킹만 폭격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한요크는 특히 통킹만 사건에 앞선 8월2일 교전의 희생자 보고와 관련, “두 명의 동료가 희생된 문장을 감청요원들은 두 척의 함정을 잃었다는 식으로 허위보고했다”면서 “감청내역의 90%는 정책결정자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대부분 교묘하게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NSA는 ‘정보부 중의 정보부’로 불릴 만큼 미국에서 가장 비밀에 싸인 최대 정보기구이며 요즘에도 메릴랜드 포트미드의 NSA본부에는 3만명의 컴퓨터전문가 등 감청요원들이 미국안보 보호를 이유로 미국내외의 전화 및 e메일, 팩스 교신내용을 감청하고 있다.

워싱턴=이미숙특파원
musel@munhwa.com

문화일보 2005/12/03

 


 

미국의 베트남전 패전 원인은 '언론'

[노컷뉴스] 2006년 08월 31일(목)

'미국의 베트남전 패전은 언론 때문이다'이야기는 없고 이미지만 남은 전쟁 보도에 대한 신랄한 보고서가 시청자를 찾는다.

EBS는 오는 9월 1일 밤 11시 방송의 날 특집으로 '다큐스페셜-전쟁의 이미지, 진실 혹은 거짓(원제 : Enemy Image)'을 편성, 베트남전을 보도한 기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전쟁보도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조명한다.

이 다큐는 호주의 월프레드 버체트, 프랑스의 로게 픽 등이 베트남전을 보도한 방식과 내용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미국의 미디어가 자국의 전쟁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파헤친다.

1965년 CBS 통신원 몰레 세이퍼 보도 후 美 정부 전쟁 보도 통제 베트남전 초기 미국 언론은 전쟁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며 취재했다. 하지만 1965년 미국 CBS 통신원 몰레 세이퍼가 미 해병대가 베트남 농촌을 공격해 방화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도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반전 운동이 시작됐다.

이 보도 직후 존슨 대통령은 방송국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네가 나라 망신을 시켰다'고 격노했고, 결국 전쟁에 패한 미국 정부는 패전 원인을 일부 언론에 돌리면서 이후 전쟁 보도권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 후 미국이 감행한 그라나다, 파나마, 걸프전에서 국방부는 일부 자료만 공개할 뿐 언론에게 전쟁 취재의 틈을 허용하지 않은 것도 정부가 전쟁 보도를 통제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진실 혹은 거짓'을 연출한 마크 다니엘스는 미국 방송사의 전쟁 보도 방식의 문제점을 파악해 2년간의 자료 수집 끝에 이 다큐를 완성했다.

그 중 '그라나다 침공 보도의 이중성', 이라크전 영웅으로 떠올랐다 사라진 '제시카 린치 일병 사건', 미국 해병에 의해 조작된 '후세인 동상 철거 장면' 등 왜곡 보도를 신랄하게 고발한 장면이 관심을 모은다. 이와 함께 반전 운동에 불을 지핀 몰리 세이퍼의 인터뷰도 담았다.

노컷뉴스 방송연예팀 이해리 기자 dlgofl@cbs.co.kr

 


 

증언을 통해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증언자 : 이선호박사
             
(1) 참전 당시소속 : 청룡부대
              (2) 참전 당시계급 : 해병소령
              (3) 당시 직책       : 청룡부대 제5대대 작전장교 및 청룡부대 작전참모 보좌관
              (4) 참전기간        : 1967년 11월부터 1969년 3월까지
              (5) 증언 일자       : 1999년 12월 15일
              (6) 증언장소        : 한국군사학회 회의실
              (7) 증언당시 직무 : 한국군사학회부회장
              (8) 증언 주제       : 베트남전쟁의 특수성과 대민피해 그리고 교훈

1. <질문> :

 청룡부대의 보병대대작전장교와 여단 작전보좌관으로 1년 4개월간 참전한 기간이 공산
군의 공세가 가장 치열했던 1968년 의 구정공세 (TET Offensive)때 였으며 그 당시 청룡
부대가 추라이 지역에서 휴전선 인근인 호이안지역으로 전술 책임지역을 이동한 직후였
으므로 매우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생각 됩니다. 먼저 베트남 전쟁의 성격에 대하여 전쟁
경험과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집약하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1)  매우 어려운 대답의 질문입니다만 저가 경험한바와 그동안의 관련서적을 통해본 결과 베트남전쟁의 성
        격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대전쟁으로서의 베트남전쟁은 1961년이래 미국이 이면 개입한
        특수전쟁에서 비롯되어 1965년 직접적인 전투부대 투입으로 확전됨으로써 미국화된 전쟁을거쳐 1968년
        이후의 월남화된 전쟁에이어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에 의한 휴전시까지 장장 12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전쟁은 다음과같은 엄청난 결과의 통계수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미국의 유일한 굴욕적 패전으로 기록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① 미국이 투입한 전비의 총액 : 1,600억달러
        ② 미군 전사자의 총수 : 5만 8천여명
        ③ 미군 전상자의 총수 : 36만여명
        ④ 귀국후 정신이상자 : 70만명
        ⑤ 귀국후 고엽제 후유증 환자 : 8만명
        ⑥ 남베트남 정부군의 전사자 총수 : 13만 6천여명
        ⑦ 남베트남 정부군의 전사자 총수 : 60여만명
        ⑧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전사자총수 : 70만여명
        ⑨ 베트남 민간인 사망자(추정) : 200여만명
        ⑩ 베트남 난민총수(추정) : 600여만명
        ⑪ 미국이 투입한 연병력총수 : 약 300만명
        ⑫ 전황절정시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병력수 : 55만여명
        ⑬ 미국이 파송한 해군함정 연척수 : 450여척
        ⑭ 미국이 투입한 항공기 연대수 : 1만 2천여대
        ⑮ 미국이 파병한 해병대 총병력수 : 12만여명(⑫에 포함)
         *  미해군 공군이 베트남 전역에 투하한 폭탄 및 총포탄 총량 : 1,600만톤
         *  고엽제작전에 의한 미곡피해 : 17만 2천톤


이상과같은 엄청난 결과를 빚은 베트남전쟁의 성격 규정은 그 시각과 접근방법에 따라 상이한 복합성과 함축성
그리고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는것을 유념해야 합니다.일본의 군사평론가인 고야마이쯔(小山內宏)씨는 그의
저서 「군사학 입문」에서 베트남전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읍니다. 내용인즉 베트남전쟁을 미군이 전술
적으로 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승리하지도 못한데 초점을맞춰 베트남의 판정승으로 결론짓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의미를 베트남전쟁에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① 철(鐵)과 흙(土)의 싸움, 기계와 인간영지(人間英知)의 싸움, 그리고 프로군대집단의 침략전쟁과 아마추어
      준군사 집단에 의한 인민전쟁의 대결이었다.
  ② 미국은 선진문명국가로서 최신형 무기와 군사조직을 대량 투입하였으나 후진 농촌지역의 대자연에서 뒷
      받침 받는 원시적이고 빈약한 무장세력의 저항의지를 압살할 수 없었다.
  ③ 미군은 대자연의 방해와 밀림의 장애조건을 제거하려고 소이작전과 고엽작전 그리고 전략폭격을 무차별
     적으로 강행했으나, 흙과 밀림의 방순물을 제거하고 , 민족해방전선의 저항거점을 초토화시킬 수 없었다.
  ④ 민족해방전선은 인민전쟁이 발휘한 강인한 인간 에너지와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의 지혜로 미군의 잔인
     하고 거대한 물량공세에 대항하여 상대적인 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조건을 극복하여 상대방을 굴복
     시킬 수 있었다.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제프레이 레코드(Jeffrey Record)는 「베트남전쟁의 회고」(Vietnam in Retrospect ;
Could we have won?)란 논문에서 베트남전쟁은 1973년에 끝났지만, 미국내에서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논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어 제2의 남북전쟁(Civil War)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시비가 엇갈리
고 있다고 자아 비판을 제기한 바 있읍니다.

아무튼 베트남전쟁의 성격(vietnam war's character)은 현대전략의 개념에서 조명해볼때 제한전쟁(limited war),
총력전쟁(total war), 내전(civil war), 국제전쟁(international war), 정규전쟁(conventional war) 그리고
비정규전쟁(unconventional war)의 6가지로 그 성격을 규정할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① 제한전쟁의 차원
      현대전쟁은 전장의 확대와 무기체계의 고도화 그리고 참가세력의 대규모화에 따라 대량소모와 무한계적
      파괴 및 살상이 이뤄지지 않을 수 없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전략적 입장에서
      볼때, 베트남전쟁은 그 전장이 남·북 베트남으로 국한되었고, 미군의 군사력은 전체의 50∼60%가량 투
      입된데 불과했으며, 비록 8∼12년간이나 전쟁을 계속했지만, 전쟁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북폭개시, 북폭
      중단, 휴전회담, 철군 등 일련의 무력행사에 있어서 제한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했을 뿐만 아니라, 확전방
      지를 위한 정치적 노력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형적인 제한전쟁인 한국전쟁과 연관하여 베트
      남전쟁을 「정글에서 싸운 한국전쟁」(Korean war with jungle)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② 총력전쟁의 차원
     총력전쟁은 국가의 군사적·비군사적 총역량이 투입되는 전쟁으로서 전쟁참가 세력이나 전쟁피해 대상이
     국가 전 영역에 미치는 전쟁입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국가총력전쟁으로서 국토가 초토화되고,
     엄청난 국가자원이 소진됨과 동시에 다수 국민의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총력전쟁이었음이
     맞습니다.

  ③ 내전의 차원
      베트남의 경우 남·북베트남이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
      남 내에 표범의 얼룩처럼 세력이 분포된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미군과 한국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군과 항쟁하여 시소게임을 벌이다가 1967년초의 구정공세(Tet Offensive)이후부터 공세의 주도권을
      확보 하였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은 북베트남군과 합세하여 남베트남 군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1973년의 파리평화회담을 성사
      시키는데 성공했읍니다. 이어서 행하여진 주월미군과 한국군의철수 2년만에 이들은 북베트남군과 합세하
      여 남베트남 정부를 함락 붕괴시키고, 공산정권을 수립한 일련의과정을 재음미할때, 외세의 개입 속에서
      도 동족간의 내전성격을 띤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④ 국제전쟁의 차원
      한국전쟁이 남북한간의 전쟁이었지만, 미·소 초강대국의 대리전쟁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한국을 지원
      했던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전투부대 파송국가와 스위스 등 5개국의 비전투부대 지원국가를 합쳐 모두
      21개국이 참전하였으며, 북한측도 소련과 중국이 공공연히 또는 암암리에 참전했던것을 전제한다면 25개국
      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국제전쟁이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베트남전쟁 역시 전투부대의 주력을 이룬 미
      국과 한국을 위시하여 필리핀, 태국, 대만,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6개국의 전투부대, 특수전
      부대 또는 비전투부대가 참가했으며, 일본과 서독은 병원선을 파견했으니 남베트남을 지원한 국가는 8개
      국이었고,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에게 군수지원을 제공한 중국과 소련을 합하면, 베트남전쟁 역시 남북
      베트남과 10개 외국의 군대가 참전내지 지원한 국제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⑤ 정규전쟁의 차원
      미국은 베트남전쟁 개입시에 남베트남의 재래형 군사력을 증강시켜 민족해방전선에 이어 북베트남 정규군
      과 전투를 행하도록 정책을 폈던 바, 8년 전쟁기간중(전투부대 투입이후만 산정) 초기의 미국화전쟁기
      간(1965∼1968년)에는 주로 탐색 및 섬멸(search and destroy)작전으로 대응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
      자, 후기인 월남화전쟁기간(1968∼1972년)에는 베트남의 평정(pacification)을 전제로 한 비정규전쟁 개념
      으로서 대분란작전(counter-insurgency operation)을 병행 실시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미국의 개입종식기(1972∼1975년)에 베트남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베트남전쟁은 미
      국이 정규전쟁 주도로 주로 비정규전부대와 대항하여 치른 특수전쟁이었음이 사실입니다.

  ⑥ 비정규전쟁의 차원
     전투부대 개입과 동시에 시작된 초기의 베트남전쟁 미국화정책은 정규전쟁을 전제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문화에 적응치 못한 나머지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68년을 기하여 비정규전쟁으로서 인민전쟁이며 혁명전쟁인 유격전법에 부응코자 「일면협상·
     일면전투(negotiate and fight)」란 방향으로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적 섬멸작전에 병행한 베트남 주민 복종화를 전제한 대분란작전에 의한 평정계획인데 베트남 주민의
     절대 다수가 민족해방전선 동조세력 혹은 가담·지지세력이었던바, 이역시 미군의 현대군사력이 지닌 한계
     성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작전의 전개과정에서도 미군의 피해와 상응한 베트남 민간
     인의 인명 및 재산피해가 수반되지 않을수 없었읍니다.
     
     특히 1965∼1968년까지의 기간중 행하여진 호지명 통로에 대한 무제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인민전쟁 방식에 의한 보급지원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베트남전쟁을 치러보지 않은 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전쟁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국론분열 현상을 보이는 남북한문제와 관련하여 베트남전쟁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은 세계 지도상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버린 남베트남, 민족독립을 되찾으려고 10여년이상 인민
     해방전쟁을 벌리며 결사항쟁 했지만 결국 북베트남에 의해 공산화되는 비운을 맞고 거세 축출당한 남베트
     남 민족해방전선, 남베트남을 붕괴시키고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을 무력으로 성취한 북베트남, 동남아의
     공산화와 전세계의 도미노 현상에 의한 공산화를 막는다는 대의명분으로 세계경찰 역할을 하려고 10년
     이상 거대한 물량공세를 하고도 엄청난 피해만 입고 패전을당한 미국 그리고 국가안보를 위한 자위역량을
     갖추지 못한 빈곤한 약소국가의 처지에서 국가생존과 이익을 도모코자 불가피한 선택의 파병을 강요당한
     한국의 입장은 서로 다르며, 베트남전쟁을 보는 시각 역시 차이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아병적이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사고나 시대착오적인 왜곡된논리 또는 부화뇌동한 국부적인 민중심리에
     영합한 궤변 그리고 국익과 공익에 반하는 기회주의적 발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해서도 안될 것입
     니다. 또한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참전·체험세대와 미체험 신세대간의 인식의 갭도 극복되어야 할
     난제라고 하겠다.

 

2. <질문>:
그러면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한국군의 여건과 작전환경을 중심
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답>
베트남전쟁을 현대전의 시각에서 접근하면서 그리고 한국군이 처한 특수국면을 중심으로 저는 다음 3가지의 그
특수성을 이야기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① 베트남전쟁은 대량파괴 및 대규모 피해가 수반되는 전형적인 현대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베트남전쟁을 동남아시아의 국지적 게릴라전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 입장에 불과하며, 전쟁을 주도한 미국의 견지에서는 비록 제한전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한국전쟁
     에 버금가는 거대한 물량공세에 의한 피아간의 대규모 피해를 안겨준 현대전쟁이었습니다.
     비록 샌들을 신고 조잡한 구식 개인무기로 장비한 전근대적인 민족해방전선이란 적대세력이었지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해병대가 베트남반도의 17도선 부근에서 악전고투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이들과 나란히 인접부대로 싸웠던 한국 해병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전은 초현대화 된 무기체계에 의한 제한된 전장에 대한 대량파괴와 인명살상의 초래가 특징의 하나이다.
     
     특히 베트남전쟁에서는 「무기화전쟁」이 시현되었는데, 무기의 개발·실험과 그 효율적 실용화가 전장에서
     진전되었다. 이는 신무기의 실전시험이란 차원에서 실험, 개량, 재실험, 실용화 및 재개량으로 순환되면서
     무차별적 전쟁관에 의한 섬멸전쟁으로 그 성격을 드러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968년에 실험된 유도형 폭탄이 충분한 양산과 체계화를 위해 스마트 폭탄으로 개량되어 1972년의
     북폭재개시 대량투하되어 북베트남을 황폐화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은 항공전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대규모 공군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제2차 세계대전시 투하한 폭탄의 총량은 베트남전쟁의
     그것에 비하면 1/3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B-52전폭기를 주축으로 한 미공군기에 의한 전략폭격은 「감정없는 전쟁」으로 표현될 정도로 냉혈적이고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의 표본을 보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네이팜탄에 의한 소이작전과 고엽제 투하에 의한 화학전도 병행되어, 항공작전은 집단 대학살
     (genocide), 환경파괴(ecocide) 그리고 생물파괴(biocide)란 비판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미군의 전쟁개념이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요인이 되는 정규전쟁으로
     시종 치러졌으며, 절대적으로 우세한 유형전력으로 상대방을 섬멸하고 전의를 말살하려는 무차별적 전쟁관
     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태평양전쟁에서나 한국전쟁에서도 또한 최근의 걸프전쟁에서도 근본
     적 전략사상과 전투행동은 유질동형의 맥락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대량파괴와 대량소모의 현대전쟁이란 차원에서 베트남전쟁의 특수성을 본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군사적 피해에 부수되는 비군사적 피해가 초래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제2차 대전후 유엔헌장이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전제하에 유엔안보이사회의 권능을 부여했지만 아직
     도 배타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는 상임이사국의 횡포로 말미암아 침략국의 무한계적 폭력행사를 제도적으로
     다스릴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거나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대안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필요악이었지만, 그 피해는 숙명적인 전쟁의 반대급부로 수용되지 않을 수 없는 약육강식의 국제사회
     권력정치가 빚고 있는 모순현실의 한 단면이다.

  ② 베트남전쟁은 모순당착이 빚은 불결한 전쟁(dirty war)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전쟁없이는 평화가 성취될수 없고, 전쟁의도구인 군사력 없이는
      전쟁이 예방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같은 모순과 갈등의 무장평화(armed peace)시대가 존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핵시대 도래이후 인류공멸을 피하고자 억제전략적 전쟁관이 대두하였으나, 유엔상임이사국인
      5대강국 스스로가 핵의 피라미드 구조의 상층구조를 독점 향유하고 있어 핵군축은 물론 핵의 확산을 방지
      하는데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주적은 민족해방전선으로서 이들은 구정공세 때를 기준한다면 3,000명 단위의
      정규군 4개 사단과 준군사부대인 유격대원 약 40만명이 인민전쟁 방식으로 베트남 정부군, 주월미군 및
      주월한국군에게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전천후 공세를 폈던 것이다.
      인민전쟁전략은 모택동이나 보 구엔 지압의 유격전을 금과옥조로 하는 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유격대와
      민중관계를 물과 고기로 보는 군사이론이다.
      민간의 지지, 협력, 동조, 동참 없이는 이들의 전쟁수행 능력과 의지가 지속 발휘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시공간적 여건과 상황에 걸맞게 변신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적응 능력을 갖고 있어 이질적인
      속성의 미군이나 한국군으로서는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트남 정부군인 우군과 이들 민간인과 혼성된 적대세력의 구분이 불명확하고,상호 격리·차단을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없다. 이러한 피아 식별이 어려운 상황하에서 초래되는 불의의 저격과 기습 그리고
      매복에의한 미군과 한국군의 피해에 대한 대응으로 특정표적에 대한 대량 집중공격 및 제압·무력화가 행
      사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이는 단위부대의 자위와 임무수행 그리고 보복응징이란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행하여지는 군사력의 작용·반작용원칙에 의한 연쇄적 반응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상군의 공격과 항공폭격 또는 함포사격에 의한 부수적 대민피해는 표적정보의 부정확
      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단 선택된 표적의 탈취나 점령을 위해 지상군은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충격행동
      으로 탐색과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해·공군에게 군사표적의 무력화 내지 군사잠재력으로서의 지원시설의
      파괴 또는 전투의지의 말살을 위한 원방 접근로 차단의 임무가 부여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서 불가피
      하게 대민피해가 수반됨은 명약관화하다. 이것이 전쟁이 지닌 모순과 부조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1968년 3월 16일 미육군 제11보병사단 제20여단 제1대대 C중대의 소대장 게리(William Galley)
      중위가 이끈 1개 소대가 미라이(Mylai) 촌락을 포위하여 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약 504명의 비무장한
      민간인이 살해된 것이 국제인권단체의 현장조사에 의해 확인됨으로써 그 소대장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모순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게리중위가 단지 상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주어진 표적을 점령 확보하기 위해 탐색 및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적아불명
      상황하의 정당방위이며 충실한 임무수행이었다는 주장을 무엇으로 반박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자비한 미공군의 항공폭격과 미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수만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살상되었음
      이 사실인데, 이에 대해서는 문책을 하지 않고, 가장 허약한 지상군의 말단 소대장을 「더러운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베트남전쟁 기간중 발생한 200만여명이나 되는 민간인
      사망자의 사인을 일일이 다 규명하고, 그 책임소재를 추궁하려 한다면, 집권적 중앙통제장치가 없는 국제
      법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 현실의 모순부터 먼저 타파해야 할것이니, 스스로 모순당착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베트남전쟁에 잘못 개입한 미국의 정책결정부터 따져야 하고, 사닥다리의 군사조직과 집권통제 및
      분권 집행을 원칙으로 하는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군사교리상의 의사결정과 지휘 및 참모활동 절차를 바
      꿔야 하는 또 다른 모순의 악순환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은 결코 성전이나 정의의 전쟁이라고 볼 수 없는 불결한 전쟁이란 것을 전제한다면,
      참전한 미군이나 한국군 전체를 전쟁범죄자로 처벌해야 하는 논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 국제법에 위배되는 화학무기나 다름없는 고엽제를 사용한데 대해서도 시비를 가려야
      하겠지만, 오늘날 이같은 문제가 국제사회의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이유는 힘의 우위에 의한 강대국
      의 횡포가 국제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로 수용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③ 베트남전쟁에 임한 군인은 전략적 차원의 전쟁보다는 전투작전 준칙을 적용한 작전적·전술적 차원의 임무
     수행에 치중하였던 갓입니다.
     주월한국군은 주월미군의 전시작전 통제하에 있는 국내의 한·미연합군 조직과는 달리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였으며, 대통령의 군정·군령권이 국방장관을 통하여 직접 행사될 수 있는 자주적인 군사지휘계선
     상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월한국군은 주월미군과 대등한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동격의 작전 및 행정권을 행사하였으나,
     현대전 수행에 필요한 고도화된 무기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항공지원, 함포지원, 원거리수송, 긴요 군수지원
     등을 주월미군이 제공하도록 상호지원과 협조가 이뤄졌던 것입니다. 일부 몰상식한 논자가 한국군을 용병
     이라고 오도하고 있는데, 이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용병은 부대가 아닌 개인이 상하 주종관계의
     지휘계선 속에 포함되어 작전과 행정지휘는 물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감독 받는 노예와 같은 종속적인
     신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지역적으로 북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청룡부대는 미해병대 제3원정군에 인접 주둔하였기 때문에 미
     해병대의 작전지도(operational guidance)를 받았지만, 이는 작전통제나 지휘가 아닌 전투작전 지원 및
     조언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용병이라고 쓴 문서는 없지만 채명신 장군이 구두로 사실상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도
     록 동의했고, 이를 전제로 전투수당이 지급되었으며, 주월한국군의 모든 경비가 미군에 의해서 지출되었
     다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정당화시키려 는 것입니다.
 
     예외적인 상륙작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월한국군의 주요 전투작전은 중대전술기지 단위의 자체방어와
     진지외곽 목표에 대한 공격작전인 탐색 및 소탕작전이었읍니다. 일반적으로 전투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투력의 역동성(dynamic of combat power)을 좌우하는 요소는 화력, 기동력, 방호력 그리고 리더십
     입니다. 특히 공격작전에 있어서는 공격부대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목표지역과 그 접근로에 대한 사전의
     공격준비 지원폭격이나 포격이 행하여져 목표를 무력화시키고 이동통로를 개척한 다음 자체의 화력과 기
     동력을 결합하여 전진하되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신속하게 목포에 접근한 다음, 최후적으로 돌격이란 공
     세적 근접전투로 적을 포착 섬멸하고 지면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트남전쟁에서 중대전술기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당연한 자위책이지만,
     표범의 얼룩같이 전국에 분산된 거점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해방전선을 공격 소탕하여 남베트남 지배지역
     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주월한국군의 맡은 바 작전임무였습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군이 보유
     하지 않고 있는 화력과 기동수단을 미군으로부터 지원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선정된 표적에 대한 화력지원은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자 주간보다 야간에 기습적으로 가해지는 것입
     니다. 이때 군사표적과 비군사표적의 선별은 거의 불가능하며, 대부분의 민족해방전선부대의 집결지는
     민간부락에 기지를 두고있어 민간촌락이 표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목표탈취 및 점령을 위한 최후과정으로
     지상군이 저항세력과 잔적을 소탕하고 정리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공격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적의
     저격이나 대인지뢰 폭발시의 즉각 대응 및 반격, 우군 피해자의 가료 및 후송을 위한 헬리콥터의 비행안전
     을 도모키 위한 의심스러운 표적에 대한 제압사격이 불가피한 바, 이때 민간인에 대한 오폭이나 오인사격도
     불가항력적으로 발생 가능합니다.
 
     베트남전쟁의 전기간을 통해본 미군의 전사자가 5만 8천여명이고, 부상자가 36만여명인데 반하여, 그 10%
     정도의 병력을 유지한 주월 한국군은 전사자가 4천여명이고, 부상자가 1만여명이었던 것을 비교한다면 한
     국군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군은 전투작전 수행에 있어서 미군이 향유할 수 없는 몇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같은 동양인으로서 같은 한문문화권내지 미곡문화권의 유산을가진 베트남인과의 동질성때문에 의사
     소통과 감정교류가 전투중에도 민족해방전선 및 남베트남 정부군과 한국군 사이에 이뤄질 수 있었다.
   
     이러한 동류의식은 정보획득과 작전협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둘째는 식민지배와 분단국가란 동일운명의 피지배민족이란 피해의식을 역사적 맥락에서 공유 이해함으로써
     대민·민사 심리작전에 큰효과를 거둘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한국군의 기본적인 임무는 적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작전적·전술적 차원의 전투작전이지 결코 베트남의 독립이나 민족주의를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의 전쟁개념에 치중할 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은 단순하여 적과는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하고, 주어진 목표는 반드시 점령 확보해야
     하는 철칙에 충실해야 하는 바, 전투임무 수행중 적과 목표 속에 혼재하는 비군사적 요소가 선별되고 분리
     될 수 있는 시공간적 여건이 허용되지 않을 수 있으며, 실제로 민간인으로 위장한 게릴라에 의한 아군의
     피해가 속출하는 바, 적과 우군의 완전한 구별에 의한 선택적 대응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베트남주민 자체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남베트남 정부군과 인민해방전선 또는 북베트남군이 동류의식을 가질 수도 있는 바
     형식적인 적·아관계를 형성하지만, 때로는 미군이나 한국군과 대항하는 상황하에서는 한핏줄로서 팔이 안
     으로 굽는 현상을 빚는 모순된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는 주월 한국군과 미군의 고충과 전장심리는 참전군인
     이 아니고는 이해·수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④ 본질적으로 내전의 속성을 띤 베트남전쟁에서 비대칭적인 적군에 대한 현대화된 군사력의 일방적 투사는
     대민피해를 증폭시켰다고 하겠습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교수인 브잔코(Bob Buzzanco)박사는 베트남전쟁
     에서 미군이 패한 이유를 다음 4가지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남베트남 정부군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부족했다.
     둘째,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극도에 달했다.
     셋째, 미군의 대항할 적은 99%가 남베트남인이고 내전 상황하에서 정규전을 전개하였다.
     넷째, 미군은 명확한 군사목표가없이 막연한승리, 민족자결, 자유신장,법질서회복등 정치목표에 영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군사작전 목표는 명확하고 달성 가능해야 할뿐만 아니라 가용자원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미군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 패전요인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군이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기 전에 고문단 1만여명이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남베
트남 군에 파견되어 베트남 정부군의 반테러작전을 지원한 것이 미군의 최초 개입이었고, 통킹만 사태를 계기로
미군의 피해가 격증하자 1965년부터 전투부대의 대량투입으로 베트남전쟁의 미국화에 의한 물량공세가 시작되
고, 1968년엔 민족해방전선의 총공격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자 미국은 개입을 축소하면서 베트남화 정책
을 펴기 시작하였고, 전쟁국면이 소강상태로 치닫게 되더니, 1973년에 휴전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휴전을
계기로 미군이 철군해버리자 1975년에는 남베트남 정부가 함락되고 말았읍니다.
 
베트남전쟁의 특수성을 전제할 때, 대민피해는 불가항력적이다. 이것이 결코 상황논리가 아니다. 학살이란 인간
사냥이나 의도적·불법적 집단살육 만행을 뜻하는 바, 군사작전의 성격이 적을 포착 섬멸하고 전의를 굴복시키는
것인 바, 적으로 간주되는 생물자원은 물론 적의 전쟁수단으로 가용한 모든 무생물 자원은 전장에서 생존불가
및 사용불능 상태로 파괴·섬멸되어야 승리가 보장된다는 기본개념이 통용됩니다. 이러한 군의 기본적인 전투작
전 임무수행상의 본질과 군작전 명령계통의 엄정성을 도외시하고, 평화시의 민간사회에서 향유할 수 있는 인권,
자유, 평등 같은 민주주의 이념을 탄우 속에 혈투로 사생결단을 가름하는 전장에서 동일한 잣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베트남참전 결정을 국가정책적 시행착오로 비판한다던가, 참전군인 스스로의 양심선언이나 고뇌에
찬 자아비판의 목소리라면 모르지만, 국가정책 도구로 전장에 투입되어 정당한 명령에 따른 전투작전 임무수행
간 불가피하게 발생한 대민피해를 「조직적, 의도적, 계획적 양민학살」로 단정하고, 참전군인 모두를 범죄집
단으로 매도함은 언어도단이며 어불성설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펴고 있는 무리들은 정서나 행동,
사회의식이나 사고체계에 결함이 있는 경계선 환자인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그들은 「베트남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된 대민피해를 교훈으로 삼고 앞으로 이러한 사례가 반복되
지 않도록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식의 건전한 충고와 조언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한
국전쟁시의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베트남참전시 양민학살 사실을 먼저 규
명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반군사상과 궤변을 내세우는 이들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함께 연계시켜 부르짖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야누스적인 작태란 비판을 받아 마땅하겠습니다.
 
지금도 이들은 「1만 5천명의 전사상자와 2만 여명의 고엽제 피해자 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피해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라는 멍에를 쓰고 미국의 용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있다」는 악의에 찬 글을 써서 참전
전우들을 모함하고 있음에 대하여 참전군인들은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항복’은 위대했다

[한겨레] 사이공 정권 최후의 날, 치욕을 감당하며 시민들을 구한 남베트남 마지막 대통령 즈엉반민 이야기

▣ 호찌민·하노이= 글 구수정 전문위원 chaovietnam@hotmail.com · 사진 호앙 반 끄응(Hoang Van Cuong) / 전 UPI 종군기자

사이공 최후의 날,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미국말도 못하고, 미국으로 튈 돈도 없고, 미국 비자는 꿈도 못 꾸는, 그래서 어떻게든 이 땅에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가난한 백성들은 북베트남 병사들이 수십 마일 앞까지 다가왔다는데도 천하태평이었다. 그러나 미국말 잘하고, 여차하면 튀려고 미국 비자 미리 챙겨두고, 미국에 빌붙어서 사리사욕이나 챙기며 전쟁을 부추겨왔던 자들은 잃을 게 너무 많아 미친 듯이 날뛰었다. 무장한 미 해병대원들이 헬리콥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의 손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는 동안, 노점상들은 잽싸게 종이나 천으로 월맹기를 만들어 행인들에게 팔아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지휘관과 장교들이 맨 먼저 도망치다 1975년 4월30일, 해방군이 사이공으로 진격해오던 그 순간, 남베트남 병사들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고위급 장성들은 대부분 이미 살길을 찾아 고국을 등졌고, 상급 지휘관과의 통신도 두절됐다. 어디서나 전투가 벌어지면 지휘관, 장교들이 맨 먼저 도망쳤다. 4월21일, “미국이 우리를 돕지 않겠다면 떠나가게 내버려두라. 갈 테면 가라고 하라. 인도적 약속을 망각하게 내버려두라”며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미국 비난을 곁들인 사임 성명을 발표했던 응웬반티에우 대통령은 금괴를 챙겨 망명길에 올라 대만과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달아났다. 4월25일, 떤선 공항 앞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과 함께 떠나는 비겁자는 가게 하라. 월남을 사랑하는 이는 남아서 싸우자”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응웬까오끼 부통령도 미국인과 함께 떠나버렸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도 있었다.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인 즈엉반민이다.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임시 혁명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4월30일 오전 9시30분, 사이공 라디오방송에서 즈엉반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어떤 병사들은 울고, 어떤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또 어떤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녹음을 마친 즈엉반민은 프랑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복하지 않을 수 없소. 인명을 구해야 하오.” 나는 30년 전의 이 육성 테이프를 당시 즈엉반민의 보좌관이었으며 남베트남 총참모부의 작전책임자였던 응웬흐한(81) 준장의 집에서 들었다. “항복은 치욕이지. 더구나 군인으로선. 그러나 누군가는 그 치욕을 감당해야 했어. 그게 바로 즈엉반민 대통령이었지.” 그는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즈엉반민의 녹음 테이프를 들고 라디오 방송국으로 달려갔던 그는 즉석에서 생방송으로 남베트남 병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한다. “참모총장도 부참모총장도 다 달아났어. 사병들만 싸우고 있었던 거야. 총참모부에 남은 사람 중에서는 내가 최고 지휘관인 셈인데, 그런 상황에서 병사들을 무모한 희생물로 만들 순 없었어.” 낭독을 마치자마자 라디오 방송국의 담당자가 슬그머니 도망을 치려 했다. “아니, 병사가 수백만명인데, 겨우 한번 방송을 내보내고 말면 어떻게 다 들어?” 그는 준장에게 다시 한번 낭독을 시키더니 “제가 오토매틱(automatic)으로 돌려놓았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1963년 국가원수에 올랐다가 쫓겨난 이유 4월30일 오전 11시 정각,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제1대대 소속 탱크 다섯대가 철문을 부수며 대통령궁에 진입했다. 즈엉반민 대통령과 부반머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의 국무위원들은 대회의장의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군이 들어서자 즈엉반민이 일어서서 말했다. “당신들이 왔군요.” 그러고는 항복 각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남베트남 정권의 최후였고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의 종말이었다. 사이공 거리에는 메가폰을 든 베트콩들이 나타나 외치기 시작했다. “사이공은 해방됐다. 겁내지 마라.” 응오딘지엠- 한국에는 고딘디엠으로 알려져 있다- 정권에서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있었던 즈엉반민은 180cm가 넘는 큰 키에 거대한 체구 때문에 ‘빅 민’(Big Minh)이라는 애칭으로 통했다. 미국이 ‘동양의 처칠’ ‘베트남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극찬하며 마치 민주화의 화신인 양 내세웠던 꼭두각시 응오딘지엠의 부정부패와 폭정이 극에 달했던 1963년, 이미 ‘빅 민’은 반(反)응오딘지엠 쿠데타에 성공해 국가 원수가 되었다. “민 장군은 미국과 함께 일하긴 했지만,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았어. 그가 대통령으로 있을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요구했지만 거절했지. 그래서 쫓겨난 거야. 그는 민족과 국민을 사랑했지. 그게 내가 마지막까지 그를 따랐던 이유야.” 즈엉반민 대통령은 응웬칸 장군의 역쿠데타로 실각해 주 타이 대사로 전출됐다가 68년 귀국했다. 칸 장군은 민 장군이 이끄는 군사평의회가 자유 우방이 우려하는 ‘중립주의 노선’에 너무 치우쳐 있어 “중립주의라는 병아리가 부화하기 전에 나쁜 달걀을 깨뜨려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975년 4월 ‘나쁜 달걀’인 민 장군은 미국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북베트남과 중립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하노이의 대답은 간결했다. “너무 늦었다.”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망 없는 협상에 매달렸다. 주 사이공 마지막 미국 대사 마틴은 연합정부 구성을 희망하는 프랑스쪽과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해왔다. 당시 프랑스 대사 메리옹에 따르면, 중국의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구상은 베트남 남부에 남베트남 정권 대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표, 즈엉반민의 ‘민족화해와 화합파’를 모두 아우르는 중립정부를 세워 북부의 레주언을 총리로 하는 친소파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사이공 최후의 날 아침, 프랑스 정부의 특사인 바뉘셈 소장이 즈엉반민 대통령을 찾았다. “바뉘셈은 미국을 버리고 베이징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24시간만 버텨달라고 민 장군을 설득했지. 그러면 중국이 하노이에 압박을 가해서 정전협정을 끌어낼 거라고 했어.” 그러나 즈엉반민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바뉘셈이 돌아가자 민 대통령이 허탈한 표정으로 응웬흐한 보좌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젠 나더러 중국에 나라까지 팔아먹으라고 하는군.” 4월28일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민 장군은 방송 연설을 통해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미국인은 즉각 베트남을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그는 특별방송을 통해 북베트남군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의 ‘3일 천하’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5월2일, 항복 선언을 했던 즈엉반민과 그의 내각 구성원들은 모두 대통령궁에서 풀려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의 국방장관이며 베트남노동당 중앙위 남베트남 중앙국 부사령관이었던 쩐반짜 중장은 즈엉반민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다. 우리 베트남 민족이 미국을 이긴 것이다.” 그 다음해인 76년 즈엉반민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가족이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만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1975년 4월30일을 기점으로 세계지도에서 남베트남공화국이 사라졌듯이 그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도 잊혀졌다. 다만, 2001년 8월6일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죽었을 때, 베트남 외무부 대변인은 이렇게 공식 발표했다. “즈엉반민은 과거 사이공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전쟁의 마지막 순간 그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의 손실을 줄이는 데 공헌했다. …우리는 그의 가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한다.” 두달 뒤인 10월30일, 응웬반티에우 전 월남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베트남 외무부가 “티에우의 역사적 과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논평을 내보내고 “베트남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대로 조용히 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접수했던 장본인 중 한 사람인 보반끼엣 전 총리는 최근 시사주간지 <국제>와 한 베트남전 종전 30주년 특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민 장군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이공 사수’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이공이 지금처럼 온전한 모습으로 결코 남을 수 없었을 것이며, 게다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이 파괴됐을 것인가.” 보반끼엣은 그날 오전 즈엉반민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 선언을 들으면서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즈엉반민에 대해서 “미국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했던 장군”이며, 그래서 미국으로 하여금 응웬칸을 통해 그를 뒤엎을 수밖에 없도록 “푸른 경보등을 켜게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분단된 한반도에 주는 교훈 4월30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30년을 끌어왔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며, 남부 베트남이 ‘해방’된 날이며, 그리하여 분단됐던 조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된 역사적인 날이다. 올해로 그 30주년을 맞는 오늘, 베트남의 표정에서 단순한 들뜸이 아닌 비장함마저 읽힌다. 보반끼엣 전 총리는 “우리는 그동안 1975년 4월30일, 그 기적적인 승리에 대한 자기 도취와 자만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일성을 토하고, 서로 방법이 달랐을지라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체를 위해 기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힘을 모아 새로운 조국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고 역설했다. 베트남의 공식 역사에서 기억하지 않았던 즈엉반민, 응웬흐한 등 ‘제3세력’까지 껴안는 전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 그 힘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베트남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베트남전 종전 30주년이 우리의 역사를 한번쯤 반추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2005-04-29

 


 

“이라크 침공은 역사의 단죄 받을 것”

베트남전 종전 30돌 기념 특별인터뷰-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웬잡 장군(94) 디엔비엔푸 전투에 이어 세계 최강국 미국을 물리친 바로 그 '전설의 노장' 을 만나다  

▣ 하노이=구수정 전문위원 chaovietnam@hotmail.com

 

보응웬잡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에 후드득 몇낱 비꽃이 피었다. 봄비치고는 제법 방울이 굵다 싶더니 빗발이 금세 가랑비에서 날비로 바뀐다. 비가 좍좍 쏟아질 때 차 안에 앉아 있으면, 다만 유리창 한장으로 갈린 세상에서, 내가 비 오는 저편에 팽개쳐지지 않고 이편에 무사하게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든다. 마음이 들썽거려 밤새 헛잠에 부대낀 나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장군을 만나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가 말았던가.

 


그는 왜 호앙지에우 거리에 둥지를 틀었나

 

눈을 뜨니 차가 멈추어 있었다. 하노이 호앙지에우 거리 30번지. 베트남 거리 이름은 대부분 구국의 영웅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외무부 직원이 수위실에서 간단한 절차를 밟는 사이, “호앙지에우라 호앙지에우…” 역사 속의 인물들을 더듬어가는데 순간, 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1929년, 그의 나이 18살 때, 잡은 난생처음 하노이에 발을 디뎠다. 신월혁명당의 동지였던 응웬반따오가 잡을 데리고 처음 간 곳이 하노이성의 북문이었다. 하노이성이 함락될 때 새겨진 프랑스군의 포탄 자국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던 호앙지에우 장군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묘 앞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나중에 하노이 탕롱숙사의 역사 교사가 된 잡은 아이들을 데리고 장보 둑에 올라 프랑시스 가르니에의 묘를 내려다보고, 저이 다리에서 앙리 리비에르의 묘를 응시했으며, 마지막으로 이곳 하노이성에 들렀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치욕과 눈물을 먹으며 자라난 아이들에게 항불 저항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하노이로 돌아온 보응웬잡 장군은 순절한 장군 호앙지에우의 이름을 딴 거리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군은 줄곧 그곳에 살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우연의 다리를 놓아서라도 그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호앙지에우의 슬픈 넋은 역사의 위무에 조금이라도 안식을 얻었을까.

 


△ 1922년 12월22일 베트남 해방군무장선전대 창립식을 지휘하는 보응웬잡 장군. 이는 오늘날 베트남 인민군대의 전신이 됐다. 1950년 변경전투에서 말 타고 지휘하는 모습(오른쪽).

한때 프랑스 사람들은 잡을 ‘눈 덮인 활화산’이라고 불렀는데, 안에 불같은 기질을 감추고 있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외면 때문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부드럽고 유연해진 것 같다. 소리도 없이 응접실로 들어선 ‘전설의 노장’은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도 친숙한 ‘할머니’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그는 안에 솜을 누빈 듯 두툼한 카키색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견장에 달려 있는 네개의 별도 95살 노장의 야윈 어깨를 충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그를 승리로 이끌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전설로 만든, 지적인 힘과 치열한 마음가짐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지금껏 나는 그처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장군님, 뵙게 되어 기쁘고 영광입니다.” 나는 한국식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나는 얼결에 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앙상하게 뼈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은 뜻밖에 통통한 여인의 그것처럼 부드러웠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서는 내 두 볼에 번갈아 입을 맞추었다. 프랑스식 인사법이다. 그러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말했다. “꼬(Co·선생), 앉아요, 앉아.”

 

전쟁에서 이겼던 가장 큰 동인은 ‘인간’  

“이게 아닌데….”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호칭에 대해 고민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 주석을 ‘박 호’(Bac Ho·호 아저씨)라고 부르듯이 나도 장군을 ‘박’(Bac·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쓰는 친밀한 호칭)으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장군님’이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그를 ‘박’으로 불렀다면 그도 나를 ‘짜우’(Chau·손자손녀뻘 되는 사람에게 쓰는 친밀한 호칭)라고 불렀을까? ‘좀더 당당하게, 그러나 편안하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그의 앞자리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할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세요?” 나는 안부인사로 말문을 열었고, 장군은 “오늘은 좋아. 신문 이름을 어떻게 읽지?”라고 되물었다.

“한…겨…레.” “한….” “한…겨…레라고 읽습니다.” ‘한겨레’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장군은 그 발음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기여…리에….” “네, 맞습니다.” “허허참.” “‘한겨레’는 하나의 겨레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발음이 어려우시면 그냥 베트남어로 ‘다이 연 똑’(대민족)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야, 아니야, 한…겨어…레에…, 한. 겨. 레. 됐어.”

장군의 검질긴 고집에 옆에 있던 비서며 보좌관이며 주치의까지도 “장군님, 하안…겨어…레에… 해보십시오”라며 진땀을 뺐지만, 나는 그것이 <한겨레>에 대한 장군의 예의 표시인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인터뷰 제한 시간은 20분, 나는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 1933년 프랑스 유학 시절.(왼쪽) 1946년 호찌민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과 함께. 반바지 차림에 샌들을 신은 호찌민의 소탈한 모습에서 "혁명은 인공위상"이라는 말을 실감한다(오른쪽).

 


△ 1948년 5월28일 호찌민이 보응웬잡에게 장군 칭호를 주고 찍은 기념사진.(왼쪽) 1980년 부총리 시절, 공무를 마친 뒤 피아노를 치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 그의 피아노 실력은 프로급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것도 피아노를 치듯 화합을 잘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오른쪽).

 

올해로 베트남 종전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역사적인 4월30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텐데….

음, 올해는 그 지난했던 항불전쟁과 항미전쟁을 거쳐 우리 베트남이 외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지 딱 30년이 되는 해지. 그날 우리 당 정치국원은 모두 총참모본부에 앉아 있었어. 그게 오전 11시쯤이었을 거야. 라디오 방송에서 드디어 우리 베트남기가 대통령궁에 게양됐다고 전한 것이. 우리에겐, 적어도 내겐 혁명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곧바로 호 아저씨에게 보고하러 갔지(아마도 호찌민의 묘를 찾았을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인 베트남이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입니까?

아시아의 작은 나라, 낙후된 농업국가였던 베트남은 공업이라고 할 만한 것도 현대식 군대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침략군들과 맞서 싸워야 했어. 프랑스와 싸울 때는 프랑스가, 미국과 싸울 때는 미국이 가장 강한 나라였지. 호찌민 주석은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싸울 때만 제국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하셨어. 자신의 힘. 우리는 인민의 군대로 인민의 전쟁을 한 거야. 미국의 그 어떤 현대적 무기도, 아무리 정교한 전자장비도, 다른 모든 것들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지. 전쟁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무기야. 그렇지만 인간이 더욱 결정적인 요인이지. 인간… 인간.

 

미국은 후유증을 치유할 책임이 있다


△ 2000년 친손자와 함께.

 

그렇다면 20세기 베트남의 승리가 21세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본국을 무찌른 사건이야. 이 승리는 그 뒤 유럽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약소국들, 특히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의 물결을 이끌었지. 미국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민족의 독립과 자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전세계 인민의 승리였어.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긴 항전의 역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어. 그것은 21세기에도 유효하지. 오늘날의 강대국들도 독립과 자유를 바라는 약소국의 열망을 절대 얕봐선 안 돼.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것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깊습니다. 전쟁의 책임 문제, 특히 미국의 배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네바협정 제21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 베트남이 그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이제는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돼서 비록 법리적 책임은 묻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전쟁이 남긴 이 끔찍한 후유증에 대해 반드시 배상해야 할 책임이 미국에는 있는 거지. 최근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들이 미국의 고엽제 제조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어. 나도 파리 상원에서 열린, 미국의 고엽제 배상을 촉구하는 국제회의에 편지를 보냈지. 그렇게 따질 것은 따지면서 한편으론 미국과의 친선관계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야 하는 거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굳게 지켜온 생각이 있어. 어떤 나라든지,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도, 그 어떤 첨단무기를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대해 자신의 의도를 무력으로 관철하려는 시도는, 다른 나라의 주권과 독립을 침탈하는 행위는, 인간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려는 음모는 반드시 실패하고 말 거야.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야.

 


△ 한겨레 신문사 독자들에게 친서를 쓰는 보응웬잡 장군. 맨 왼쪽이 구수정 전문위원이다.

미국은 다시 이라크를 침공했고, 한국 정부도 또다시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솔직히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짜우어이(얘야)!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아. 역사는 쉼없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은 거야. 그러나 인간의 잘못은 반복될 수 있지.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종국에는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될 거야. 그것이 역사의 묵연한 법칙이지. 그런데 이제 새 세기가 왔는데도, 이제 2000년대에 들어섰는데도….

 

호찌민이 준 금언 “혁명은 이공위상”  

원래 약속한 인터뷰 시간을 훨씬 넘겼다. 손목시계를 흘금대며 계속 눈총을 주던 보좌관이 내 뒤로 다가와 귀엣말로 일렀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장군님이 힘들어하십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지만, 말마디를 도막도막 힘주어 뱉는 말투가 내 등을 떠밀어대는 것 같았다. 장군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을 하는데, 내 시선은 줄곧 그 지극한 눈빛에 묶여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노장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매끄럽고 하얀 피부는 훤칠한 이마에 돋아난 검버섯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축 처진 눈시울은 흥분으로 붉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귤껍질처럼 바싹 마른 입술엔 검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내 마음속에 들여앉히기라도 할 것처럼 반히 들여다보다 ‘이쯤에서 접자’고 마음먹었다. “할아버지, 저는 더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피곤하실까 걱정됩니다.” 갑자기 그가 우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니야. 나 하나도 안 피곤해.”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바투 다가앉았다. “<한겨레>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유일하게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내가 다시 질문을 이어나가는데, 장군이 속삭이듯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박이(내가) 안다, 박이 알아. 1999년이었잖아.”

네, 그렇습니다. <한겨레21>은 베트남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캠페인을 벌였고, 특히 저희 독자들은 기꺼이 성금운동에 동참해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융깜(Dung cam·용감)… 융깜… 융깜! <한겨레>가 과거 한국군의 흔적을, 그 상처의 현장을 스스로 찾아나선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야. 한국의 여론도 “부끄러운 과거를 씻자”는 <한겨레>의 호소에 응답했다고 들었어. 이 말을 꼭 전해줘. <한겨레>가 그렇게 역사를 존중하는 자세로, 인도주의 정신으로, 용감한 행동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두 민족이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두 민족의 우애를 위해서, 두 나라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 난 더 이상 긴말은 하지 않겠어. 자네가 <한겨레> 독자들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인사를 꼭 전해주었으면 해.

 

고맙습니다. 평소 늘 가슴에 새기는 금언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금언이라… 많지. 그러나 오늘은 내가 얘기를 하나 들려주는 것으로 대신하지. 내게는 더없는 행복이 하나 있어. 그것은 호 아저씨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 중에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은, 팍보 동굴의 아주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밤이야. 나는 호 아저씨 곁에 놓인 나무 평상에 누워 있었어. 날은 춥고, 평상은 딱딱하고, 누워 있으면 등이 무척 아팠지. 화로 옆에는 동지들이 둘러앉아 무장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갑자기 호 아저씨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불렀어. “반(Van)아- 반은 그때 내가 쓰던 암호명이었어- 혁명은 이공위상(以公爲上)이다.” 혁명을 하려면 나보다 우리를 섬겨야 한다는 뜻이지. 당을 알고, 인민을 먼저 위하고,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이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어. 나는 단지 인민과 평화를 위해 싸워온 군인이야.

 


△ 보응웬잡 장군의 친서 원본과 번역글. (한겨레신문사의 편집진,기자단 그리고 전체 독자 여러분,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두 민족,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 적극적인 평화와 우애의 사절이 되어주십시오. 또한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모든 민족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중요한 공

노장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나는 장군에게 마지막으로 <한겨레> 독자에게 보내는 짧은 친서를 부탁했다. 보좌관은 이제 나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장군에게 직접 보고했다. “다음 방문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군의 대답은 짤막했다. “종이를 다오.” 나는 황급히 하얀 A4 용지를 장군 앞에 펼쳐놓았는데, 미리 준비한 사인펜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백을 샅샅이 뒤져보았는데도 없었다. 장군이 허허 웃더니 보좌관에게 펜을 가져오라고 했다. 보좌관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장군에게 볼펜을 디밀었다. “아니, 좋은 붓으로, 좋은 붓….”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가던 장군이 갑자기 “어이구, 이를 어쩌나…” 했다. 글자의 한획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한글도 아니고 알파벳 아닌가. 나는 “할아버지, 괜찮습니다. 제가 잘 읽을 수 있습니다” 했고, 옆에 서 있던 비서며 보좌관이며 맞은편에서 달려온 주치의까지 “장군님, 훌륭하십니다”라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간신히 서명까지 마친 장군이 “얘야, 이리 오련” 하고 나를 불렀다. “읽어 보련.” 나는 장군의 옆에 앉아서 초등학생처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함께 눈으로 따라 읽던 장군이 아까 글씨가 삐뚤어진 그 대목에서 손을 내저었다. “안 되겠다. 다시 종이를 갖다줘.” 펜을 움켜쥔 장군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고, 종이에 닿는 붓끝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짜우라고 써도 되지? ‘꼬’는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 같잖아.” 장군이 자신이 쓴 책에 서명을 하면서 물었다. <디엔비엔푸>와 <호찌민 사상과 베트남 혁명의 길> 두권이다. “이건 내가 직접 쓴 책이야.” - 최근에는 장군의 회고록을 대필해 쓰는 작가들이 많다- 노장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자랑이 어렸다. “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 그해에 얻은 맏아들 이름을 디엔비엔이라고 지었지.” 장군은 또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호 아저씨와 찍은 사진이다. “사람들은 저 사진을 보면 그러지. ‘어이구, 우리 호 아저씨.’ 46년에 찍은 사진이야. 우리 호 아저씨 차림을 좀 봐. 그때 호 아저씨가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이셨다고. 난 그날 무슨 공식행사가 있어서 양복을 빌려입었지. 엉성하지?”

하고많은 사진 중에 장군은 왜 하필 이 사진을 골라 벽에 걸었을까. 장군은 날마다 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호찌민의 ‘이공위상’을 마음속에 되새기는지도 모른다.

그때, 이날의 만남을 촬영하던 팜꾸옥빈 감독이 장군에게 또 다른 사진 액자를 증정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호찌민 주석의 마지막 순간을 젊은 잡 장군이 안타까이 지키고 있었다. 액자를 받아든 장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노장의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보았다. “얘야, 할아버지 빰에 뽀뽀해주련.” 나는 장군의 앙상한 어깨를 끌어안고 그 볼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인민들의 '계획출산사업'도 맡아  

호찌민의 마지막 유언이었던 ‘하나됨’은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에 비명처럼 새겨졌다. 보응웬잡을 비롯해 레주언, 쯔엉찐, 레둑토, 팜반동, 응웬반린 등 11명의 정치국원들은 항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베트남 인민들은 호찌민의 마지막 희망대로 흔들림 없이 단결해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제국주의의 쇠사슬을 끊었다.

1973년 1월23일, 파리에서 미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단행했다. 이 공로로 키신저와 레둑토는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되지만, “베트남에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동양인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주인을 잃었지만, “위선자 키신저처럼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베트남의 자존심을 레둑토는 전세계에 통렬하게 보여주었다.

베트남에 레둑토가 말했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자 보응웬잡 장군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며 은퇴를 희망했다. 1977년 잡은 국방장관직을 사퇴했다. 1982년에는 중앙당 정치국원의 자리도 내놓았다. 1983년 잡은 계획출산을 위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그해 고향을 찾은 잡은 모처럼 쩨오 시장에 들러 주민들에게 물었다. “예전에 여기 쩨오 시장은 새우젓에 찍어먹는 쌀국수가 무척 유명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맛이 있나요?” 평생을 장군으로 인민들의 안위를 위해 싸우다가 이제는 인민들의 가족계획까지 책임지는 ‘밤의 파수꾼’이 된 노장을 보며 주민들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잡은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었고, 그래서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었어. 그것으로 내 인생은 충분히 행복했고, 또 오래 살았지. 나는 호 아저씨의 ‘이공위상’을 따랐어. 나는 임무를 맡았고, 그 임무를 완수했지. 계획출산 사업, 그것도 내가 맡은 임무 중 하나였을 뿐이야.” 20세기에 혁명을 꿈꾸었고, 그 이상을 부둥켜안은 채 누구보다 치열하게 20세기를 통과해 마침내 그 꿈을 완성한 노장의 얼굴에 평생의 스승인 호 아저씨를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군사훈련 독학… 호찌민보다 격정적

신화처럼 싸우고 기적처럼 승리한 베트남 인민군대의 상징, 보응웬잡의 일생


△ 호찌민의 병상에 들른 보응웬잡 장군(검은옷). 그는 호찌민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보응웬잡은 1911년 8월25일 꽝빈성 안싸 마을의 한 가난한 유학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점령당했으나 굴복하지 않는 조국에 태어나 반란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잡의 가족사는 불우했다. 잡은 일곱 동기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맏형은 콜레라에 걸려 죽었고, 맏누이는 홍수로 잃었다. 프랑스군에게 잡혔다가 풀려나 항전구로 들어간 셋째 누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할 길도 없다. 넷째 누이까지 중병을 앓다 죽자 잡의 아버지는 다시는 약을 짓지 않았다.

1925년 후에의 국학중등학교에 입학한 잡은 판보이쩌우 사면운동, 판쭈찐 장례투쟁, 동맹휴교 등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1927년 퇴학당했고, 이후 정치활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가족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박해도 극심했다. 잡의 아버지 보꾸앙응히엠은 프랑스군에 붙잡혀 후에 감옥에 갇힌 뒤 생사가 불명하다. 다만 프랑스 병사들이 그를 지프 뒤에 매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으로 일컫는 잡의 처형 응웬티민카이도 31살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그의 남편이며 잡의 동서인 레홍퐁 역시 풀로콘도르 감옥의 악명 높은 감방인 ‘호랑이 우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잡의 젊은 부인 응웬티꾸앙타이도 감옥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래서인지 잡은 젊은 시절 격정적이고 호찌민보다 훨씬 호전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잡은 자신을 ‘독학한 장군’이라고 부른다. 역사 교사였던 잡은 군사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호찌민은 그에게 군대를 맡겼다. “한번은 수류탄이 손에 들어왔는데, 그걸 어떻게 터뜨리는지 알 수가 없었어. 제식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지. 우리는 프랑스 군대를 흉내내면서 배웠어. 나는 먼저 ‘욍(un·하나), 되(deux·둘), 욍, 되’ 이런 숫자를 베트남어로 번역했지. 못(mot), 하이(hai), 못, 하이…(하나, 둘, 하나, 둘).” 1940년 잡은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중국 옌안의 중국공산당 군사학교로 가는 도중 호의 전보를 받았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고, 인도차이나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니 바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잡은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다.

1944년 12월22일, 잡은 34명의 게릴라 대원을 모아 까오방에서 베트남 해방군 무장선전대를 창설한다. 이것이 현 베트남 인민군의 기초가 되었고,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됐을 때는 100만 대군으로 성장한다. 잡은 4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성립된 뒤 내무장관이 되었다가 46년에는 국방장관에 취임했고, 47년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48년 호찌민에게서 대장 칭호를 받았다. 외국의 한 기자가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잡에게 왜 대장 칭호를 주었느냐고 묻자, 호찌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 인민군대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주고, 대장과 싸워 이기면 대장을 준다.”

보응웬잡은 호찌민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고, 호가 가장 아끼고 신임하는 장군이었다. 둘은 항불·항미 전쟁 전 기간을 통해 하나였다. 잡의 병사들 역시 한마음으로 움직였던 순결한 전사들이었다. 밥 한 공기만으로 험난한 산악지대를 하룻밤에 50km씩 주파하는 베트콩 전사들, 6개월을 꼬박 걸어야 통과할 수 있었던 호찌민 루트, 포신을 허리에 묶고 한번에 1인치씩, 하루에 반 마일씩 석달을 끌고 갔던 정글 속의 대포…. 그들은 신화처럼 싸우고 기적처럼 승리했다. 잡은 이처럼 혁명 대오에 우뚝 섰던 수백만 전사들의 신임을 받았으며, 모든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베트남 인민군대의 ‘맏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호찌민은 왜 미라가 되었는가  

화장해달라는 유언 무시… 죽어서도 베트남 경제를 먹여살린다?

 

△ 호찌민의 마지막 순간. 당시 정치국 위원이었던 베트남 혁명의 실세들이 이 자리를 지켰다. 호찌민의 마지막 시간들을 극비리에 촬영한 팜꾸옥 빈 감독(맨 오른쪽)

 

호찌민의 생애 마지막 시간들이 극비리에 촬영됐다. 이 필름은 1969년 8월29일부터 9월3일까지 6일간의 기록으로, 임종 직전 병상에 누워 있는 호찌민의 모습, 사망 직후의 모습 그리고 옛 소련 전문가들에 의해 그의 유해가 방부 처리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그 뒤 필름은 봉인되어 20년간 철저한 보안과 통제 속에 ‘안전하게’ 보관됐다. 이 필름은 호찌민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89년 5월19일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호 아저씨 본인도 몰랐지. 촬영은 호 아저씨가 잠들어 있을 때 문 밖에서 몰래 찍는 식으로 이루어졌어. 호 아저씨가 숨을 거둔 뒤에야 촬영팀이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이 필름의 기획, 제작, 보관 그리고 뒤에는 각본, 편집, 연출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졌던 팜꾸옥빈(78) 감독의 말이다.

8월20일 이후 호찌민의 병세는 조금 호전되는 것 같았다. 9월2일에 있을 독립기념식에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호 주석의 집념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날 저녁 호찌민은 하루 한 숟가락씩 먹던 밥을 한 숟가락 더 달라고 해서 먹었다고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호찌민은 단 10분 아니 5분만이라도 인민들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내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갈게. 주석단 의자에 내가 먼저 앉아 있고, 무대의 막이 오르면 그때 행사가 시작되는 거야.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민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내가 잘 말할게.” 그러나 당일 기념식장 단상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는 것도 힘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것도 힘이다.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호 아저씨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마지막 하룻밤을 애써 견뎠던 걸까. 1969년 9월2일 오전 9시47분, 자신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던 바로 그날, 정확히 24년 뒤의 그 아침을 기어이 보고서야 그의 심장은 멈추었다.

호찌민은 유언을 자주 고쳤지만, 어느 것에나 화장을 해달라는 조항은 꼭 들어 있었다. 어머니 묘소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레닌이나 화장해서 조국 산하에 뿌려달라고 했던 마오쩌둥, 그리고 유해를 북부와 남부, 중부에 고루 나누어 뿌려달라고 했던 호찌민. 이들의 유해는 모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라로 만들어져 유리관에 안치된 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베트남 당 지도부는 “내가 죽은 다음 거창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지를 명백히 무시했다. 게다가 이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 호찌민의 유언장에서 사후 처리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으며, 독립기념일 행사 차질을 우려해 호찌민이 실제보다 하루 뒤인 9월3일에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조국은 분단되어 싸우고 있었지. 호 아저씨는 언제나 우리 항쟁의 구심점이었어. 호 주석은 죽기 전에 남부에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남부의 인민들도 생전에 호 주석을 한번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어. 그때는 호 아저씨의 유해를 기념관에 보존하는 것이 인민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고 믿었지.” 영화 <호 아저씨의 마지막 순간>을 만든 빈 감독의 해명이다. 언젠가 방송 일로 호찌민 영묘 앞에서 한 베트남 청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렇게 호 아저씨를 보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는 당황한 듯 부동자세로 서서 더듬더듬 답했다. “아 예. 우리의 위, 위대하신 호, 호찌민 주석께서는 죽어서도 우, 우리 조국을 먹, 먹여살리고 계십니다.”

이제 호찌민이 죽은 지 36년이 흘렀고,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도 만 서른해가 된다. 평생을 ‘조국과 혁명’을 위해 헌신했고, 죽어서도 ‘인민’을 위해 그만큼 ‘봉사’했으면 이제 그만 그의 육신도 놓아주고, 그의 영혼도 쉬게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오늘날 호찌민의 유업을 계승했다는 그의 후계자들에게서 호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던 혁명의 순결성이나 인민의 충실한 공복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도이머이 개혁 이후 베트남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인민에게 승리의 열매를 나누어주라”고 했던 호찌민의 유언에서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바딘 광장에서 호찌민 영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문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의 위대한 호찌민 주석은 우리의 사업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이제는 베트남의 당과 정부 지도자들이 호찌민의 그늘에서 걸어나와 스스로 쌓아올린 공적으로 당당히 인민들의 평가를 받아야 할 때다.

 


 

"미국이 '전쟁광' 된 건 베트남 때문" 

[오마이뉴스 김명곤 기자] "1975년 5월 9일 오전 9시 우리는 플로리다에 도착했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비행기가 착륙했는데도 모두가 입을 열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서둘러 내리려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생소한 풍경, 우리가 선 곳은 더 이상 우리나라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중략)

위는 플로리다의 '베트남 타운'으로 유명한 올랜도 콜로니얼 드라이브 지역에서 사업을 하다 몇 년 전 숨진 틴 쑤안 구엔이 그의 큰 아들에게 남긴 글 중 일부를 지난달 30일 <올랜도 센티널>이 공개한 것이다. 틴 쑤안 구엔은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하면서 가족과 함께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이른바 '보트피플' 가운데 하나다.

베트남 전 패전 30주년이었던 지난 달 30일, 미국 언론들은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에서 패퇴한 원인과 그 교훈이 무엇인지, 틴 쑤안 구엔 같은 보트피플들이 현재 미국 땅에서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또 '베트남전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 정치인들과 최근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미국-베트남 관계, 보트피플 베트남인들의 복잡한 심사가 다뤄졌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30일 호치민시의 대통령 궁 앞에서 마이클 머린 미국 대사를 포함한 외교사절, 참전용사, 정관계 인사들을 포함해 5만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대대적인 승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판 반 카이 수상은 과거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나라들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유대관계를 증진시키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같은 날 베트남 정부는 승전 30주년 기념으로 7751명의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을 실시했는데 이 가운데는 미국정부가 석방을 요구한 6명의 정치범이 포함돼 있었다.

이같이 양국간에 진행되고 있는 환경의 변화는 13만3천명의 베트남 보트피플들과 베트남 참전 미국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사회는 일단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재 진행형'인 이라크 전에 빗대 '베트남전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베트남 전쟁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스탠리 카노우는 지난 5월 1일 <(Voice of America)>와의 인터뷰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미국의 실수를 비판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전쟁이었다는 것을 집약적으로 지적했다.

"우리가 베트남전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어떤 나라나 국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전쟁에 돌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베트남 전문가들이 없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도상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전쟁에서 빠져나올 전략을 세우지도 않고 베트남전에 개입했다. 더구나 우리는 베트남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인기 없는 정부를 지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베트남전은 미국의 자기 과신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국제 공산주의 음모 속에서 태생된 것으로 생각했고, 호치민은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큰 오해였고, 이 때문에 비극을 불러왔다."

문제는 이같이 잘못 시작된 베트남전에서 빠져나온 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미국사회에서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이 가열되었던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37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격렬한 반전데모를 벌여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엄청난 정치사회적 갈등을 겪었던 미국 사회는 아직도 베트남 전 문제로 인한 감정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갤럽 여론조사의 수석 디렉터인 프랭크 뉴포트는 지난 50년간의 전쟁에 대한 조사 결과를 분석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이 실수였다는 데 동의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것이 명예롭게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논쟁들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물지 않는 '분열'의 상처

지난해 미국 대선과정에서 민주당의 존 케리 진영과 공화당의 부시 진영이 베트남 전 문제로 크게 논란을 벌인 것은 미국사회에서 베트남전의 갈등이 아직 아물지 않고 있는 상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당시 민주당 측은 부시 대통령의 베트남전 기피 의혹을 제기했고, 공화당 측은 케리 후보의 반전운동 경력과 베트남전 공훈 조작 시비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양당은 물론 베튼남전 참전용사회와 케리의 베트남전 동료들도 두 패로 갈라져 수 주 동안 물고 뜯는 대공방을 벌였다.

존 케리의 참전 동지이기도 한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1일 <시카고 트리뷴>에 "베트남전 이후 우리는 전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30년이 지난 후 우리는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대선에서) 발견했다"며 "베트남전은 미국 역사상 남북전쟁 다음으로 크게 분열을 일으켜온 이슈가 되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불행히도 우리 세대가 다 끝나기 전까지는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이라며 "분열과 더불어 파생된 '비관주의'는 베트남전이 미국에 가져다준 가장 분명하고 잔인한 유산"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베트남전이 정부기관에 대한 불신 등 시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무관심과 투표율의 저하를 가져온 출발점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베트남전 진상 폭로로 촉발된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 같은 정치 불신을 심어준 요인 중 하나다. 실제 베트남전 개입 전후 미대선 투표율은 80% 안팎이었으나 베트남전 종전을 기점으로 60% 안팎으로 떨어졌다.

베트남전이 가져온 군사적 유산 '속전속결'

베트남전은 미국의 군사전략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시카고 트리뷴>의 마이클 태킷 기자는 지난달 29일 "미국인들에게 분노와 혼란과 체념을 가져다 준 베트남전은 반세기동안의 말썽 많은 미국 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하나의 상징이 돼 버렸다"면서 "베트남전은 미국의 정치군사전략과 문화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적었다.

군사전문가들은 베트남 철수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이 화력을 갖춘 소규모의 군사력으로 짧은 기간에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리 카노우는 그의 역작 <베트남전의 역사>에서 "베트남 전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다시는 베트남전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기본전제 아래 그라나다와 파나마 침공처럼 효율적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되, 이 마저도 매우 조심스럽게 전개한다는 원칙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군사전략에 따라 1991년의 걸프전이 소수의 사망자만 남긴 채 100시간 만에 종료되었는데, 당시 조지 H. 부시 대통령은 "이제 미국은 베트남전 신드롬을 뒤흔들어 놓았다"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미군은 1999년 코소보에 대한 신속한 공중 공격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베트남 전에 참여했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도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은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초기에 압도적인 힘을 사용해 재빨리 적을 제압하고 승리한 후에는 분명하게 빠져 나오는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같은 속전속결 전략이 시공을 초월해 통할 수 있는 전략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

 

 

▲ 베트남전 패전 30주년 특집 기사를 실은 <뉴욕 타임스> 4월 29일자.

 

 

베트남전에서 공격용 헬기 조종사였으며 현재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있는 론 세라피노위츠(56)는 29일 <유에스에이 투데이>에 "미국은 베트남 전 경험으로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신속한 승리를 거둔 걸프전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이라크에서는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면서 "현재의 이라크전은 여러 면에서 베트남 전과 비슷하다. 두 전쟁은 전선이 없고, 누구나 적일 수 있다. 중무장을 하지 않고는 나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라크전은 베트남전 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베트남은 3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초강대국 프랑스와 미국을 연이어 격파한 끝에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내고 '경제 부흥'의 다음단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이라크는 종파간의 정치적 입장 차이 등 복잡한 국내 사정으로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엄청난 정치사회적 격랑을 겪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라크전이 갖는 국제전 성격도 이라크전이 베트남전과는 다른 형태의 후유증을 남길 가능성을 안겨주고 있다. 베트남전이 '국지전' 성격인 데 비해 이라크전은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어 또 다른 형태로 전쟁이 장기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 미국민들도 이라크전의 베트남전화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에이비시뉴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수 1007명, 조사의 오차한계 ±3%)에서 응답자의 39%만이 '미국이 이라크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답한 반면, 58%는 '미군이 이라크 진창에 빠져 있다'고 답했다. 또한 39%가 '이라크가 1년 안에 안정을 되찾고 민주화를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 고 답한 반면, 60%는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베트남전 콤플렉스'에 빠진 미국

그렇다면,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왜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보스톤 대학의 바세비치 교수는 <미국의 군사주의(American Militarism)>라는 근작 도서에서 미국이 전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베트남전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건국 이후 최초로 베트남전에서 맛본 패배와 좌절감을 극복하려는 욕심으로 전쟁을 계속했으며, 결국 전쟁의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세비치는 특히 이 과정에서 형성된 미국의 군사주의 문화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가 말한 '군사주의 문화'란, 군부뿐 아니라 지식층, 종교인 그리고 일반 미국인들조차도 '국제문제에 대한 강제적인 군사력 사용'을 쉽게 용납해주는 문화를 뜻한다.

그는 이 같은 군사주의 문화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 미국의 가치를 심어주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환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바세비치의 지적은 지난 1월 20일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 연설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부시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현재 미국의 사명"이라면서 "우리 땅의 자유의 존속은 다른 나라에서 자유를 달성하는데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부시가 말한 '자유'는 본질적이고 보편적 의미의 자유라기보다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자유에 다름 아니었다.

30년 전 월남을 탈출해 '신천지' 미국 땅에 살다 숨을 거둔 틴 쑤안 구엔의 육필 마지막 부분은 군사주의 문화에서 나온 이 같은 거짓 '자유'를 완곡하게 거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아들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인정 많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조상의 무덤을 돌보며 친척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고, 묻히는 날까지 태어나 살던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그 땅에서 죽기를 원했다. (중략)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평화롭게 살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다. 너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지금 네 식구들까지 우리는 3대에 걸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살아온 피해자들이다.

아들아, 베트남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기도해야 한다. 향긋한 과일 나무를 심고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고 즐기며 살던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던 땅 베트남과 구엔 쑤안 가문의 뿌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약사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지역 국가들에 대한 식민통치를 재선언하면서 베트남은 계속해서 프랑스의 점령 하에 있게 되었다.

1954년 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 1946년부터 시작된 제1차 베트남 전을 종식시켰으나,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위 17도를 군사 분계선으로 남북 베트남으로 갈린다. 당시 제네바 협정에서는 1956년에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공산주의 중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거나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 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은 1955년 10월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고 딘 디엠 가톨릭 주교를 남베트남 지도자로 내세운다. 이에 북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준수를 내세워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거부하며 남베트남에 군사적 대결 태세를 강화시킨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에 뛰어 들었던 것은 1964년. 그해 8월 2일 미국은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 어뢰정에 공격당했다고 주장(1972년 다니엘 엘스버그 박사가 베트남전 극비문서인 펜터곤 페이퍼를 폭로, 통킹만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짐), 북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1965년에 들어서는 무차별 전면 공습을 개시한다.

1968년 초 베트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당시 약 52만5천명의 미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으로 궁지에 몰린 존슨 대통령은 그 해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해 대선 재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1970년 미국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캄보디아를 침공, 미국 내 반전 시위가 고조된다. 당시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에서 4명의 학생이 반전시위 도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1973년초 미국은 베트공 및 북베트남과 철수에 합의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75년 4월 30일 미군 헬기가 마지막으로 사이공을 떠나면서 제2차 베트남전이 종식되고, 이 때 약 1천만 명의 보트피플이 베트남을 탈출한다. 미군 없는 베트남을 파죽지세로 평정한 호치민 군대는 이듬해 7월 2일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포했다.

철수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는 1999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영웅적인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퇴각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1957년부터 시작해 1975년 4월 30일에 끝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베트남 전에서 미군은 5만8천명의 사망자와 30만명의 부상자, 그리고 1836명의 실종자를 냈다. 이 기간동안 남베트남인들은 22만4천명이 죽고, 북베트남 및 베트공은 1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미국은 1994년 2월 베트남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한 데 이어 1997년 4월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2000년 11월 16일 종전 후 최초로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6월말 경 카이 베트남 수상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AFP 5월 1일자, Voice of America 4월 30일자, 시카고 트리뷴 4월 30일자 등 참고) / 김명곤

 

 


오마이뉴스 김명곤 기자

 


 

美-베트남 수교, 北과 비교하면

베트남, 美國요구 전면수용...높은 정치적 유연성과 지도부 교체

미국과 북한의 수교 가능성이 언급되면서, 95년 미국과 베트남 수교사례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은 △정치적 유연성이 높았고,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으며, △지도부 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북한이 베트남 전례를 따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 77년에 수교 교섭>

베트남과 북한의 근본적 차이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유연성 여부에 있다. 베트남은 1975년 공산통일 이후 2년 후인 1977년부터 미국과 수교 교섭을 시작했다. 이는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결렬됐지만, 1986년 도이모이(Doi Moi, 개혁·개방) 채택이후 재개됐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의 정치적 유연성은 더욱 커졌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과거는 불문한다’는 원칙 아래 92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95년 미국과도 수교했다.

국내적으론 프롤레타리아黨이라는 교조적 원칙에서 탈피, 기업인에게 당의 문호를 개방하고, 당원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허용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최근 복수정당제 도입까지 검토하고 있다. 2011년 개최될 제11차 당 대회에서 공산당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순조롭게 다당제로 이행하는 것을 논의한다는 방침이다.

<미국 요구 120% 수용>

수교과정에서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다는 점에서도 베트남은 북한과 다르다. 미국은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월남전 당시 미군의 유골(遺骨)과 유품(遺品) 회수를 요구했다. 베트남은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며, 미국의 요구를 120% 만족시켰다. 미국이 원하는 데로 가서 땅을 파게 하고, 유골을 찾게 하고, 유품을 수거하도록 도와줬다. 시장경제(市場經濟)로의 복귀가 약속된 상황, 실용주의(實用主義)적 베트남 지도부에게는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도부, 개혁·개방세력으로 교체>

베트남은 최근 지도세력도 전면 교체됐다. 지난 해 4월, 베트남 혁명의 주역이었던 판 반 카이 수상, 쩐 등르엉 국가주석, 응웬 반 안 국회의장 등 베트남 최고 지도자 3인이 “과감한 세대교체를 위해 65세 이상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은퇴한다”며 공식 사임했다, 이들이 떠난 자리는 모두 南베트남 출신 개혁성향 인물들로 채워졌다. 국가 최고기구인 15명의 정치국원 중 8명도 개혁성향 인물들로 대체됐다.

<미국과 군사협력 수준 발전>

현재 베트남은 외국인 투자법 등 투자환경을 대폭 개선하고, 외국 자본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글로벌 기업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경제는 연간 7~8%대의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6년 11월에는 WTO에 가입했으며, 2008년 10월 UN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공식 선출된다.

16년간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미국과는 군사협력을 다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응우엔 떤중 총리는 지난 해 6월 취임 직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양국 간 전면적인 협력시대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후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베트남을 방문, 양국은 종전 후 31년 만에 군사협력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2006년 연말에는 베트남 장교 수십 명이 미국 군사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은 지난 해 4월 베트남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시아의 기적을 보아왔다. 다음 10년은 베트남이 그 기적을 이룰 것이다”
외교안보연구원 배긍찬 교수는 “미국과 수교당시 베트남은 핵무기가 없었고, 실종자 문제에서 성의만 보이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북한의 경우는 정권의 생존 자체가 결려 있는 상황”이라며 “북한이 예정된 수교 코스로 적절하게 나갈 것이라는 속단은 어렵다”고 말했다.


김성욱 객원기자

미래한국신문

 


 

`킬링필드`와 캄보디아 공산화

폴 포트 집권 후 200만 학살

[인류를 파괴해온 악마적 사상들]

폴 포트(크메르루즈)는 1975년 정권 탈취 후 3년8개월 동안 무려 200만이 넘는 무고한 캄보디아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진은 ‘뚜올 슬렝’ 감옥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골이다.


제6편.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대학살(The Killing Field)

지난 1월 7일로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이 붕괴된 지 25년이 됐다. 폴 포트 등이 이끈 크메르루주 정권이 캄보디아에서 권력을 잡은 기간은 1975년에서 1979년까지 3년8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이 기간동안 학살당한 캄보디아 국민은 200만 명이 넘는다. 이에 본지는 지난 1984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커다란 충격을 줬던 공산주의 대학살 ‘킬링필드’를 재조명해본다.<편집자주>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인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인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며 인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1984년 폴 포트, Grant Evans & Kelvin Rowley 共著, `Red Brotherhood at War`)    

1975~1978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공산혁명 결과 200만 명 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기간동안 캄보디아는 혁명지도부와 그 하수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만 하는 동물이나 다름없었다. 역사학자들이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점령 직후 캄보디아의 2천년이 넘는 역사는 끝났다고 밝혔듯이 공산 혁명은 캄보디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공산주의의 대학살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대사는 크게 5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1953~60년대 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시아누크(Norodom Sihanouk*82세)국왕이 중립 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시기다. 2단계(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Lon Nol)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루주 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3단계(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에 함란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살벌했던 기간이다. 4단계(1979~91년)는 10만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 베트남 정부군과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5단계(1991~현재)는 파리평화협정 쳬결뒤 U. N 평화유지군 1만 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TAC)의 선거 감독 아래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선 후 잇단 정치 불안 속에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다.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인 폴 포트(본명 ‘살로트 안사르’*1925∼1998), 키우 삼판, 이엥 사리를 비롯한 크메르루주의 지도자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택동 주의에 기울어 있던 이들은 시아누크 국왕체제에 불만을 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이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아누크 국왕의 친공반미(親共反美) 성향

캄보디아가 이처럼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공산화 된 데에는 시아누크 국왕의 ‘친공반미’(親共反美)적 성향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크메르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 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1973년 7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

미국은 1970~75년 기간동안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18억 5000만 달러어치의 군사경제 원조를 퍼부었다. 그러나 론 놀 정권의 부패한 장군들은 미국의 원조를 캄보디아의 발전에 쓰지 않았다. 부패와 내전으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73년 한 해의 인플레 275%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럴수록 론 놀 정권은 美 원조에 매달렸다. 당시 캄보디아는 국고 수입의 95%를 미국의 원조로 충당했다.  

폴 포트, 열렬한 모택동 주의자

한편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로 자신을 ‘모택동 주의자’라고 여겼던 폴 포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프랑스계 학교에서 교육받고 정부 장학생으로 1948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1950년 여름 방학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하면서 공산주의자인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 티토의 본명)에 매료 된 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크메르루즈의 `폴 포트`


1952년 캄보디아로 귀국한 폴 포트는 지하공산당 운동을 벌이다 ‘붉은 크메르’라는 뜻의 ‘크메르루주’라는 공산게릴라군을 조직,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하편 론 놀 장군은 도피할 때 가지고 간 거액의 달러뭉치로 하와이에 저택을 장만했다. 1년도 못돼 캄보디아 서북부 몇 개 주(州)를 장악한 폴포트는 1975년 4월 17일 수도인 프놈펜에 입성, 혁명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3년 7개월 동안 ‘피의 통치’를 했다.

당시 폴 포트는 두 부류의 적을 설정했다. 먼저 내부의 적은 폴 포트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로 크메르루주 군은 이들을 적발하는 대로 처형했다. 외부의 적은 크메르루주식의 공산주의*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미국과 같은 자유진영의 국가였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공산주의, 민족*민중주의를 축으로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는 폐지되었고 수도 프놈펜의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화폐제도는 폐지됐고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파되고 집단 농장이 곳곳에 세워졌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 대상이었다.

크메르루주, 농민이 안경 썼다는 이유로 학살해

과거 6*25 전쟁당시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보고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 본인과 가족까지 학살했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심지어 일자무식의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크메르루주 군은 캄보디아의 중산층은 모조리 처형했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군의 손으로 넘어간 캄보디아는 모든 형태의 종교가 조직적으로 말살되었다. 불교 사찰들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가톨릭교회들은 파괴되거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바뀌었다. 특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기간에 순교했다.

당시 캄보디아 내의 기독교인 수는 약 1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90%의 기독교도들이 폴 포트의 추종자들에게 처형당했으며 종교적인 관습과 가르침이 금지됐다. 프놈펜의 가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가 폐쇄됐으며, 수천 명의 난민들이 태국국경으로 탈출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앙카르’(Angkar)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앙카르’는 캄보디아 말로 ‘상부조직’이란 뜻으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권위를 의미했다.

학살 주동자들, 1만 5천명의 캄보디아 젊은이

한편 이와 같은 광란의 주동자들은 1만 5천명의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홍위병처럼 15세 이하의 소년들이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과 붉은 혁명 사상으로 무장되어 크메르루주 군의 잔인한 살인광풍에 앞장섰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치하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곳이 프놈펜 시내에 자리 잡은 ‘투올 슬렝’(Tuol Sleng) 감옥이다. 이 감옥은 원래 여자 고등학교 건물이었는데 감옥으로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크메르루주 군이 남기고 떠난 서류뭉치와 흑백 필름으로 미뤄볼 때 모두 1만 6000명이 이 감옥을 거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자술서에 3명이 동조자 이름을 써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잡혀온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다. 실제로 크메르루주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78년 5월 27일 하루 동안에만 582명이 처형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 감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지 1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투올 슬렝의 자가 발전기 기술자, 폴 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 그리고 폴 포트의 흉상을 만들었던 조각가등이다. 현재 투올 슬렝감옥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시체를 발굴한 구덩이와 위령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 위령탑 안에는 발굴된 시체들의 두개골이 안치되어 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이어진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됐는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캄보디아에서는 1962년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래 내전이 계속된 1980년대 내내 인구조사작업을 하지 못했다. 1979년 단숨에 태국으로 달려가 캄보디아 국경의 난민촌에 자리를 잡은 키어넌은 난민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인터뷰 자료들을 모았고 그 자료들을 근거로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무려 150~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다는 논문과 기고문을 남겼다.(Ben Kiernan, ‘Genocide and Democracy in Cambodia’, 1993)

캄보디아에는 현재 1000만개 이상의 지뢰가 각지에 매설되어 있다. 사진은 지뢰를 밟아 불구가 된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이외에도 미국과 네덜란드 자금으로 세워진 ‘캄보디아기록센터’의 크레이그 애치슨도 희생자 규모가 200만이 넘는다고 주장했다.(Craig Etcheson, ‘The Rise and Demise of Democratic Kampuchea’, 1984)

대학살의 주동자 대부분 정치적 사면

한편 일생동안 학살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던 폴 포트는 1979년 캄보디아가 친(親)베트남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자 총리에서 사임한 뒤 게릴라전을 재개, 1982년 크메르루주 최고사령관이 되었다가 1985년 공식적으로 지도자 직에서 물러났다. 정부군의 소탕작전과 내분으로 크메르루주가 약화되던 중 1997년 부하들에 의해 체포*자택 연금되었다가 1998년 사망했다.

현재 살아있는 크메르루주 주요 간부 가운데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現 훈 센  총리로부터 정치적 사면을 받아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을 통해 캄보디아가 내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미래한국신문

 


 

월남전쟁과 예수회  

1967년 베트남의 '인종 학살'은 윌리암 케이시(William Casey)가 구상한 CIA '봉황 작전'에서 다시 확인된다. 윌리암 케이시는 MK-Ultra/Project Monarch의 멤버이자 CIA의 라오스 및 베트남 지부장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장군은 베트남에서 작전을 펼치던 중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로스 페로(Ross Perot)는 POW나 MIA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 CIA가 '황금의 삼각 지대'에서 아편을 밀수하는 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계속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아편의 대량 구입자는 CIA와 국방성(DOD)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테오도르 색클리(Theodore Shackley)는 조지 부시 정권 아래서 CIA의 제2인자이다. 부시는 앨리 릴리(Eli Lilly)의 이사이다. 이 회사는 코카인용 화학 선구물질을 생산하며, CIA에게 처음으로 LSD를 합성해 주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 내 마약 불법 반입의 절반 이상을 수송하고 있다. 대부분 군용 수송을 통하며 세관의 검사도 받지 않고 한 번에 여러 톤씩 반입한 다음, 민간 항공기나 화물 컨테이너에 실어 거리의 깡패 조직, 반군, 오토바이 갱들에게 유통시킨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않은 채 철수했으며, 바티칸이 남베트남 정부를 통제했다. 닉슨은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맞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an)의 「우리는 왜 베트남에 갔나?」를 읽어 보라.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하기 10일 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대통령이라는 고위직이 미국인의 자유 파괴용 음모를 조장하는 데 악용되었다. 그러므로 퇴임하기 전에 그 고통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겠다." 음모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알베르토 리베라(Alberto Rivera) 박사는 자신과 악명 높은 짐 죤스(Jim Jones)가 바티칸 학교에서 교회 파괴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카스트로가 바티칸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솔더 오브 포츈(Soldier of Fortune)' 잡지 기사에 따르면 제수이트 2명이 온두라스 농부들을 납치해 쿠바로 데려간 다음 게릴라 전투 훈련을 시켰으며, 존 케네디는 생사가 걸린 피그스만 공격 당시 자유의 전투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B-26 폭격기가 이륙하는 것을 저지했다고 한다. 따라서 카스트로의 전투 비행대가 상륙자들에게 맹폭격을 퍼부었다. 그 상륙 작전은 실패하게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모두 CIA가 조종했기 때문이다. 군대 수송 데크의 기관총은 작동되지 않았고, 대포는 녹이 슬었으며, 상륙용 탱크 6대 가운데 4대가 짐을 싣기도 전에 침몰했다.

이 피그스만 사건으로 상륙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쿠바 혁명 위원회는 이 피그스만 상륙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암초가 많은데다 사방이 늪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근처에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네디는 군대를 Opa-Locka Fla.에 있는 캄캄한 비행장으로 이동시키는 척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고립되어 수비병에게 포위당했다. 다만 AM 라디오를 통해 공습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B-26 폭격기 14대 전부가 아닌 6대가 처음 공격을 했지만 최소한도의 피해만 주었고 카스트로에게 공격이 임박했음을 충분히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다가 유엔 회의에서 미국의 행위가 비난을 받자, 케네디는 이를 구실로 폭격기들을 착륙시켰다(니카라구아 비행장의 낙하산 부대는 이륙도 하지 않았다). 합동 참모부 의장 렘니체르(Lemnitzer) 장군은 "그렇게 때문에 일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했다(Peter Wyden 「피그스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이는 카스트로가 제수이트이며 케네디 암살에 관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가 알기로 카스트로는 일루미나이티 회원이며 제수이트 조지타운 대학교(빌 클린턴도 이 대학을 다님)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습득했다. 케네디는 IMF의 차관을 중단시키고 재무성을 통해 화폐를 발행했다(그 화폐에는 붉은 색 번호가 인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루미나이티는 암살을 계획했다. 케네디는 CIA를 해체헤서 스콜본(Skull & Bones) 조직의 협조를 얻어내려 했다. 또한 고 딘 디엠을 살해하고 베트남을 통제하지 않는 채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므로 제수이트와 바티칸은 협조를 하게 되었다.

암살 계획을 확정한 사람은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였지만, 암살 계획 자체는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윌리암 세이모아(William Seymour), 클레이 쇼우(Clay Shaw), 데이빗 페리(David Ferrie, 카톨릭 사제)가 수립했다. 재정 지원은 바티칸 계통 은행인 드 파마코 아스탈드 바두즈(De Famaco Astalde Vaduz, 스위스), 리히텐슈타인(Leichtenstein, 스위스), 셀리그만 은행(Seligman, 스위스), 방카 나지오날레 드 라보로(Banca Nazionale de Lavoro, 로마)가 맡았다. 방카 나치오날레 드 라보로는 교황이 소유하고 있으며, 조지아 주의 지점을 통해 미국 농무성에서 받은 돈 50억 달러를 세탁해서 사담 후세인의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린든 존슨은 USS Maddox 및 USS C. Turner Joy를 북베트남 영해로 보내 북베트남의 공격을 유도했다(USS Maddox는 라디오를 통해 명령을 받았고, USS C. Turner Joy는 백악관의 명령을 직접 받고 출동했다). 이 계획이 바라는 결과를 낳지 못하자(두 군함은 야간에 서로 대포를 쏘았다), 존슨은 북베트남이 국제 해역에서 미국 군함에 발사를 했다고 의회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미군이 북베트남과 무장 충돌을 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했다. 나중에 존슨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 승리자가 없으며 폭격이 항의와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다음 번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후 언론뿐만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부의 어느 부서에서나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존 F. 케네디, 마르틴 루터 킹, 로버트 F. 케네디의 살인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어 미국 대통령과 대법원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가 절정에 달하자 그 잔학 행위를 공모한 사람들과 숨겨진 이야기들이 증거로 나타나게 되었다(William F. Pepper 「마르틴 루터 킹 암살 배후의 진실, 살인 명령」). 위 세 사람 암살 사건의 공통점은 암살 직전에 베트남 군대 철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FBI는 추기경 프란시스 스펠맨(Francis Spellman, 남베트남 불교도들의 학살자인 고 딘 디엠 대통령의 교사)와 상의해서 교황이 마르틴 루터 킹 Jr.과 면담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라고 했으며, 추기경은 동의했다고 했다. 의회의 조사 위원회 위원 가운데 리 할베이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가 단독으로 존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마나크 프로젝트(Manarch Project)의 제랄드 포드(Gerald Ford)뿐이다.

LAPD 자체의 SUS 파일에 따르면, 산타아나(Santa Anna)의 마굿간에서 마취제와 고문(CIA의 마인드 컨트롤 전문가 제리 오웬(Jerry Owen), 윌리암 브랸(William Bryan) 등 DISC 팀이 추진)을 사용한 마취 프로그램에 따라 샤린샤린(Sirhan Sirhan)이 탄생했으며, 이에 따라 MPD(다중 인격 부조화 마인트 컨트롤제: CIA의 MK-Ultra-Project Manarch 제품)가 제조되었다고 한다. 이 작업은 Sirhan Sirhan은 LAPD에 고용된 CIA의 태인 유진 케자르(Thane Eugene Cesar)가 로버트 F. 케네디를 오른쪽 귀 뒤에서 저격할 때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을 저격하려고 했던 죤 힌클리 2세(John Hinckley Jr.)의 동생은 조지 부시의 골프 파트너였다. 반더빌트(Vanderbilt) 석유 회사 사장 존 힌클리 1세(John Hinckley Sr.)는 텍사스에서 여러 해 동안 조지 부시의 이웃집에 살았으며, 부시가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할 때 선거 운동을 해 주었다.

필리핀 주재 미국 외교관이었던 존 마이스토(John Maisto)는 파나마로 가서 CIA 공작 부대 '시민 십자군'을 훈련시켰으며, 가두 시위를 주도하고 타이어 등을 불사르면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대주교 마르코스 맥그래스(Marcos Mcgrath), 몬시그뇰 조세(Monsignor Jose), 세바스쳔 라보아(Sebastion Laboa), 사제 쟈비에르 빌라누에바(Javier Villanueva) 등은 선거 교란 작전을 펼쳤다. 이는 마닐라, 구아테말라, 니카라구아, 그레나다, 하이티에 이어서 진행된 것이었다. 대주교 맥그래스와 사제들은 파나마 법률을 고의로 어기면서 선거함을 빼앗고 개표에 개입했다. NES(뉴스 선거 서비스)는 국가 선거에서 개표와 보도를 완전 통제한 채 국민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는데도 존 케네디가 당선될 수 있었다. 대주교 맥그래스는 나중에 파나마 군사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양시키겠다고 보장했다(이를 위해 바티칸은 파나마 기업들에게 14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 이전에 맥그래스는 라보아 및 발라누에바와 함께 노리에가를 바티칸 대사관으로 불러들여 외교상의 면책을 약속했으며, 미군에게 항복할 것인지 군대에게 포로가 되어 사살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파나마 기습은 상원 의원 알란 심슨(Alan Simpson, 워밍 주)가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대리 정부를 모두 제거하려는 '베로나(Verona) 비밀 조약' 정책의 직접 결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기록은 미국 의회 기록(64회 상원 의회 제 1기 Vol. 53, part 7, 6781쪽, 1916, 4, 25)과 미국 외교 기록(1778-1884, vol. 2)에 나와 있다.

파나마 노리에가의 운명은 바티칸 대사관에 들어감과 동시에 결정되었다(이와 같은 법적 절차로는 케네디가 오스왈드를 살해했다고 살인죄로 몰아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 쿤슬러(William Kunstler)가 마이애미 연방 법정에서 노리에가를 변호하려 했지만 노리에가가 사망함으로써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파나마 국가 수호대는 없어졌으므로(대부분 손을 뒤로 묶인 채 미국 해병대에게 사살당했으며, 그 사진을 찍던 저널리스트 쥴리오 구에라(Julio Guerra)도 살해되었다) 파나마는 남아메리카 및 중앙 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운반되는 아편의 주요 통과 지점이 되었다. 현재 조지 부시의 '파나마 마약 민주주의' 하에서는 코카인이 판을 치고 있다. 그 돈은 파나마 은행들, 곧 인터방코(Interbanko), 퍼스트 인터어메리카 은행(First Interamerica's Bank) 등에서 세탁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하이티에서는 로마 카톨릭 신부 쟝-버트랜드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권력에 복귀했으므로 코카인 운반 경로가 완성된 셈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바티칸은 유고슬라비아에 엄청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 기록을 보면 우스타쉬(Ustasha, 일어나다라는 동사 'ustati'에서 유래)라는 바티칸 조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우스타쉬가 S.S., S.D., 게슈타포 등을 합친 것보다도 더 악명 높았다. 이는 크로아티아 우스타쉬 주의 수장 안테 파벨릭(Ante Pavelic)이 조직했다. 파벨릭은 이를 위해 크로아티아의 대주교와 주교들을 비롯해 교황 피우스(Pius) 12세와 자주 회동했다. 히틀러가 유럽에서 악명을 떨친 것처럼 파벨릭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런데도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크로아티아 인들에게 바티칸 순례(대주교 알로지예 스테피낙(Aljzije Stepinac)이 주도)를 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1941-1945년과 1991-1995년에 걸친 바티칸에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대에게 미소짓고 있다. 그 미래에서는 그대 나라의 교회와 국가가 서로 이익이 되도록 조화롭게 조절될 것이다." 스테판 쿠카비카(Stane Kukavica, 프란체스코 신부)와 같은 카톨릭 신부들은 예복을 공포의 대상인 우스타쉬 살인 부대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그 사람들을 잔인하게 기습해서 금세기에는 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 인종 학살 작전은 모두 군사 임무를 담당했던 대주교 알로지예 스태피낙(Alojzije Stepinac)이 감독했다(2차 대전 군사 주둔지 가운데 세 번째로 크며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등이 80만 명 이상이나 살해된 야세노박(Jasenovac)이 그 중심지였다). 알로지예 스테피낙은 나치와 직접 협조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를 탄생시켰다. 보스니아에서는 우스타쉬 부활 운동을 HSP(크로아티아 국민당)이라고 하며, 그 군대를 HOS(크로아티아 방위군)이라고 한다. 도브로슬라브 파라가(Dobroslav Paraga)가 HSP를 이끌고 있다. HOS 부대(검은 군단)에는 벨기에, 오스트리아, 영국, 캐나다 용병뿐만 아니라 프랑스 용병 부대 '누벨 레지스탕스(Nouvelle Resistance)'도 포함되어 있다. HOS가 1993년 해체되자(너무 정치색이 짙으며 바티칸과 연결되어 있음이 폭로될 것이 두려워) 구성원들은 다른 부대에 흡수되었다가 108 보스니아 여단이나 국제 여단으로 통합되었다. '국가 전선', '자유 크로아티아', '자유 슬라브'도 바티칸 조직이며 '인도주의 원조(Humanitarian Aid)'가 그 앞장을 서고 있다. MPRI(버지니아에 본부를 둔 예비 용병 조직)은 펜타곤과 계약을 맺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있는 우스타쉬를 훈련시켰으며, 지금은 코소보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다. 수천 명이 단번에 살해될 수 있는 군사 충돌에서 양쪽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바티칸뿐이다. 곧 미군을 활용해서 이른바 휴전 지대에서 세르비아인을 조절할 수 있다. 미군이 세르비아를 무방비 상태로 유지시키는 동안 파시시트 크로아티아는 살해를 할 수 있다. 이 정책은 발칸 전역에서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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