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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참고 자료
자본주의의 붕괴
제국주의-1
제국주의-2
제국주의-3
제국주의-4
세계화-1
세계화-2
세계화-3
미국의 패권주의
미사일 방어계획-1
미사일 방어계획-2
자원 전쟁-1
자원 전쟁-2
미국의 금권정치-1
미국의 금권정치-2
미국의 교육제도
의도된 여론정치
미국의 정치사상
헨리 키신저
군주론
이란 콘트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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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1
베트남 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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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이라크 전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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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속 유대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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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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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2 (
강대국의 흥망)

 

B. 강대국의 흥망 

역사적으로 수 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강대국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요소는 군사력입니다.
강한 군사력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경제력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도한 국방비를 투입하다 보면 그에 비례해 경제가 희생되고, 결국 쇠퇴와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과도한 군사력 경쟁을 벌였고, 소련은 이미 몰락했으며, 미국 또한 몰락하는 중입니다.

역사학자이자 미국 예일대 교수인 폴 케네디 교수는 5년동안 전 세계의 역사, 정치, 경제, 군사 행태를 분석하고
경제력과 군사력 간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찾아 내었습니다.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들이 전성기에 군비경쟁으로 힘에 부치는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하다 국력이 쇠퇴하였고,
적정한 군사력을 유지해 경제성장에 치중한 국가는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합니다.

1,2차 대전 중에 전쟁으로 막대한 국방비를 소모하며 탈진한 유럽은 몰락하였고, 전쟁물자를 대며 피해를 입지 않고
경제성장을 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냉전시대 소련과 과도한 군비경쟁과 핵무기 경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였고, 구 소련은
몰락해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국방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고, 경제성장에만 전념한 결과 눈 부신 발전을 이루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경제력이 쇠퇴하고 제조업이 기울은 상태에서 엄청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군사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국방비(2004년 480조)를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몰락하기 이전에 세계정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목차

1.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 (A.D. 1815~1885)

2.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립 (1885~1914)

3. 1차 세계대전 - 제국주의 열강들의 총력전 (1914~1918)

4.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정세 (1919~1942)

5. 2차 세계대전 - 대영제국의 멸망 (1939~1945)

6. 미·소 냉전시대 (1945~1990)

 

 

1.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 (A.D. 1815~1885)

유럽에서 중세 이후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7세기에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합스부르크 왕국이 권세를 쥐었고, 18세기에는 나폴레옹이 주도한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쥐었습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부터는 강한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이 유럽의 패권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중상주의적인 정책으로 국가 간의 충돌이 잦았지만 19세기 들어서면서 자유무역과 국제적
화합이 강조되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에서는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원료와 큰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기관총, 신 대포, 증기기관, 무장 군함을 갖추게 된 영국은 해외로 진출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산업혁명은 열을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820년의 동력직기는 베틀을 이용하는 직공에 비해 20배나 많은 일을 했고, 동력에 의해 운전되는 뮬(mule) 정방기는
물레보다 200배나 많은 일을 했습니다.
철도 기관차 1대는 수백마리의 말이 운반하는 짐을 더 빠른 속도로 운반하였습니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유럽의 인구는 1750년 1억 4천만명에서 1850년 2억 6600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영국의 인구는 1801년 1050만명에서 1911년 4180만명으로 증사하였고, 19세기 동안 국민생산은 14배나 증가했습니다.
이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도시사회로 변모하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은 방적의 기계화로 생산성이 몇배나 증가하였고, 인도나 중국은 공업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랭커셔 직물공장에서 나오는 값싸고 질 좋은 제품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역 산업화'(deindustrialize)를 초래하였습니다.
전통 면 생산국이었던 인도는 영국에서 수입된 엄청난 양의 면제품 때문에 전통적인 국내 생산자들을 몰락시켜 오히려
산업을 쇠퇴시켰습니다.

1860년경 영국은 세계 철강생산의 53%, 석탄과 갈탄 생산의 50%를 차지했으며, 세계 원면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소비했습니다.
영국은 세계 제품무역의 2/5를 차지했고, 세계 상선의 1/3이 영국 국적선이었으며, 근대산업의 세계 잠재력의
45%를 차지했습니다.

경제적 우위와 함께 군사적 우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와 통치를 더 쉽게 하였습니다.
사격속도가 빠른 후장식 소총, 개틀링(Gatling) 기관총과 맥심(Maxim) 기관총, 경형 대포, 철갑 군함 등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후진국의 군대와 원주민들을 가볍게 제압하였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영국 군대는 인도와 중동, 중국 등에서 전통 왕조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1860년대에 영국의 국민총생산은 10억 파운드에 달했으나, 국방비는 국민 총생산의 2~3%를 소비하는데 그쳤고,
중상주의적인 보호무역 정책보다는 자유무역조치를 취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영국은 1815년과 1865년 사이 연평균 10만 평방마일 꼴로 팽창했고, 싱가포르, 아덴, 포클랜드 제도, 홍콩, 라고스
등을 전략적·상업적 목적에 따라 취득하였습니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원료와 식량을 수입해 또한 막대한 양의 직물과 철강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해외에 투자되어 또한 큰 소득을 올려 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또한 금본위제를 바탕으로한 금융산업이 발달해 쉽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고, 런던에서 발행한 어음을
바탕으로 한 국제적인 환·지불 메카니즘이 발달하여 산업의 증진을 도왔습니다.

 

 

2.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립 (1885~1914)

19세기 말에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 미국, 러시아도 산업화를 이루었고, 해외 식민지를 놓고 대립을 벌였습니다.
경쟁은 차츰 치열해졌고,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정책이 다시 도입되었으며, 강대국 간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통일을 이룬 독일의 팽창은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주변국들을 긴장시켰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이 잦았는데 1885년에는 콩고를 놓고 싸움을 벌였고, 1890년대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1898년에는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대립했습니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영국 다음 가는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세네갈의 다카르나
베트남의 사이공 등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영국은 1900년에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는데, 1200만평방마일의 땅과 세계인구의 1/4을 지배하였습니다.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보유했고, 전 세계에 해군기지와 전신중계송망과 해저케이블을 확보했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해운국이자 무역국이었고, 런던은 세계 금융과 보험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차츰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주변국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영국의 전통산업인 석탄, 직물, 철강 산업의 세계적인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고, 화학, 기계공구, 전기제품 등의 산업에서
선두 지위를 뺏기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수출품은 각국의 높은 관세와 보호무역으로 인해 유리한 지위를 잃어 갔고, 영국 국내에는 보다 많은 수입품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생산성 저이브 경쟁력 약화는 빈약한 투자, 생산시설의 낙후, 국민성, 교육제도 등에 기인합니다.
1880년 영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22.9%를 차지했지만 1913년 13.6%로 줄어들었고, 세계무역 비중은 1880년
23.2%에서 1912년 14.1%로 떨어졌습니다.
산업력에 있어서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앞질렀는데, 이는 다른 나라가 영국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내고 '비옥한 농토', '막대한 원료', '풍부한 자원', '근대 기술의 발전', '철도 건설',
'외국 투자자본의 유입' 등을 힘입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산업과 농업은 능률과 규모를 겸비하였고, 1914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면화나 금 등 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했으나, 남북전쟁 이후에는 산업이 발달하여
농기계, 철강제품, 기계공구, 전기장비 등 공산품을 수출하였습니다.
또한 수송 혁명에 힘입어 수송단가가 낮아짐으로 옥수수, 소맥, 밀가루  등 농산물과 축산물이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3. 1차 세계대전 - 제국주의 열강들의 총력전 (1914~1918)

1차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a)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 ·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 ·미국과 프랑스 ·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 ·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 ·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 ·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b)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 ·Cairo ·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 ·Byzantium ·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c) 발칸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 ·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d) 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e) 전쟁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 ·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덩 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의 싸움).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 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f) 교전국의 국내정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협력으로 내달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으니,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마른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일치내각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 ·우유 ·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다. 19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g, 감자 2,500g, 버터 80g, 고기 250g, 설탕 180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다.

 

g) 대전 중의 비밀외교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다. 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측에 끌려들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다(밸푸어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다. 똑같이 동맹국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 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다.

 

h) 전쟁의 종결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 ·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i)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한편, 다른 동맹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舊帝國)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발트 3국)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從屬國)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j) 1차 세계대전의 종합적 고찰

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된 총력전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과 자원을 얼마나 잘 뒷바침
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린 전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식민지를 점유하고 산업화를 이룬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 측이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경쟁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동맹국 측보다 다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협상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계 제조업 생산 구성비(1913)

27.9%

19.2%

에너지 소비, 석탄으로 환산,
단위 100만톤(1913)

311.8

236.4

강철생산, 단원 100만톤 (1913)

17.1

20.2

총산업잠재력 (1900년의 영국=100)

261.1

178.4

협상국 측은 식민지의 원료와 노동력,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비해 동맹국 측은 해외 식민지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룩셈부르크의 원광석과 루마니아의 소맥과 석유로 원료의 부족을 채웠습니다.
따라서 영국이 막강한 해군으로 독일 북해 해안과 오스트리아 지중해 해안을 봉쇄했지만 동맹국 측은 이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고, 전쟁기간 중 식량 부족을 겪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의 상선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은 중립국 상선까지 동원하면서
이를 만회했습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에는 각 국이 국민소득의 4%를 군비 지출에 사용하였지만, 전쟁 중에는 무려 25~33%를 군비에
지출함으로써 국가의 모든 역량이 군수산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막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과 프랑스 군의 진격을 막아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남부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세르비아를 점령함으로써 초반 승세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반에 독일의 프랑스 베르덩 요세에 대한 총력전이 실패하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합스부르크 육군을
붕괴시키고, 영국군의 솜 공세에서 양쪽이 엄청난 소모전을 치루면서 협상국과 동맹국은 모두 탈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라아-헝기라군과는 잘 싸웠으나 훈련부족과 물자부족으로 독일군에게 연패했습니다.
1916년 말까지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360만명에 이르렀고, 210만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1917년 러시아 왕조가 가장 먼저 막대한 군비와 인적 희생, 경제난, 식량난, 극심한 인플레이션, 파업 등을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 혁명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에게 일부 영토를 점령 당해 강철생산능력의 24%와 석탄생산능력의 40%가 떨어진 상태에서 영국과
미국의 자금, 식량, 자원 원조를 받아 가며 무기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독일군과 정면으로 맞 붙은 프랑스군은 1917년 니벨 공세 이전에 이미 300만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1918년에 미군의 보충으로 프랑스군 102개 사단, 영국군 60개 사단, 미국군 42개 사단, 벨기에군 12개 사단 등 총 216개
사단이 정원 미달의 독일군 197개 사단과 대결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전쟁 이후 모든 경제적 역량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제조했는데, 군사비가 1913년 9,100 파운드에서 1918년 19억
5,600만 파운드로 증가하여 정부지출의 80%, 국민총생산의 52%를 차지했습니다.
영국군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1916년 솜 전투에서는 무리한 진격으로 40만명이 희생되었고, 1917년
이프로 전투에서는 30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뿐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가 차용하는 돈에 대해 보증을 섬으로써 경제적 지원을 했고,
일례로 1917년 협상국들의 43억에 달하는 전쟁차관 가운데 88%를 영국정부가 보증했습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영국은 미국의 군수지원에 의존했는데, 금의 이전이나 달러표시 증권의 매도에 의해서도 무역적자를
메울 수 없어, 미국 군수업자에게 달러를 지불하기 위해 뉴욕과 시카고의 자금시장에서 차입에 의존하였습니다.

독일은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능률적인 작전, 잘 갖춰진 통신망, 유리한 지형의 서부 진지 등을 토대로 전쟁을 벌여
대영제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을 거의 항복 직전까지 몰아 넣었습니다.
독일은 해상 봉쇄된 가운데서도 부족한 자원의 대용품들을 만들어 내었고, 북부 프랑스에서 원광석과 석탄을 캐내었으며,
루마니아의 소맥과 원유를 약탈하였습니다.

독일도 군수산업에 집중하기 위해 1916년 8월 힌덴부르크 계획에 돌입했는데,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가했고,
정부차입이 증가했으며, 과도한 화폐의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습니다.
산업 생산에 필요한 부족한 숙련 노동자를 보충하기 위해 1916년 120만명을 제대시켰고, 1917년 190만명을 제대시켰는데
이는 서부전선에 심각한 병력부족을 초래했습니다.

힌덴부르크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농업을 경시해 농업 부문의 인력과 말, 연료 등을 군대나 군수산업으로 돌림으로써
농업생산이 급격히 줄면서 국민들에게 배급제를 실시할만큼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게 했습니다.
독일의 가장 큰 실수는 무제한 유보트 작전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물과 멕시코와의 비밀동맹 제의로 미국을 자극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의회가 참전을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미국의 참전과 원조는 탈진한 협상국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산업 잠재력은 독일의 2.5배였고, 미국은
수 많은 상선과 군함과 무기와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한계상황에 이른 독일을 압박하였습니다.
미국의 참전은 세력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투입된 미군의 숫자와 무기지원은 러시아의 붕괴를 보완하고도
남았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계 제조업 생산 구성비 (1931)

51.7

19.2

에너지 소비량, 석탄으로 환산
단위 100만톤 (1931)

798.8

236.4

강철생산, 단위 100만톤(1931)

44.1

20.2

총산업 잠재력 (1931)

472.6

178.4

 

 

전비 (1913년 시가, 단위 10억달러)

총동원 병력 (단위 100만)

협상국측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등)

57.7

40.7

동맹국측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투르크)

24.7

25.1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다급해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군을 영불해엽으로 몰아내기 위해 1918년 3월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루덴도르프 대공세를 펼쳤지만 양측에 막대한 희생만 남기고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독일은 200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남겼고, 협상국의 반격을 받게 되었으며, 불가리아 터키 오스트리아가 항복하고
독일 내부에 혼란이 일자 독일왕실은 무너지고 무조건 항복하게 됩니다.

1차 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이었고,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고 영토가 축소됨으로써 몰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였고, 미국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습니다.
1차 대전의 영향으로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의 왕실이 무너졌고,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전쟁배상금은 또 다른 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4.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정세 (1919~1942)

1차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피해는 엄청났는데, 군인 중 사망 800만명, 불구 700만명, 중경상 1500만명이었고, 500만명의
민간인이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전쟁으로 피폐된 지역은 1918~1919년에 인플루엔자 전염병으로 또 다시 수백만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전후 전체
희생자수는 6000만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절반이 러시아인이었습니다.

물질적 피해도 극심해 프랑스, 세르비아, 폴란드 등 전쟁터였던 곳은 수십만채의 집이 파괴되고, 농촌은 약탈당했으며,
가축은 도살되고, 도로 철도 전신망 등은 엉망이 되었고, 농지는 불발탄과 지뢰로 쓸모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1차 대전의 물질적 피해액은 2,60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국가부채 총액의 6.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고,
제조업 생산은 1920년에 1913년에 비해 7%에 불과했고, 농업생산은 평균치의 1/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지리적 변화는 예전의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엘촐레른 제국의 자리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국민국가가 탄생한 점입니다.
오스트리아에 비해 독일은 영토를 적게 잃었지만, 프랑스의 경제적 착취, 엄격한 비무장화(해군, 공군, 잠수함, 전차
보유 금지),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차대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이후에도 식민지를 잃지 않고, 국제연맹을 주도함으로써
여전히 강대국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는 경쟁자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멸망했고, 러시아는 혁명으로 내부문제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1920년
이후 고립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국제무대에 힘을 크게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금융외교의 시기로 독일의 배상금과 협상국의 전시부채가 맞물려 전승국과 패전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긴장이 높아지자 1924년 도즈계획(Dawes Plan)으로 금융적 타협을 서둘러 분란을 완화하였고, 1929년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파리부전조약(Pact of Paris)에서 많은 국가들이 장래 분규를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이 금본위제를 도입하지 않고, 허술한 화폐·재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어 경제난에
휩싸였고, 수출 촉진을 위한 경쟁적인 화폐의 평가절하는 재정적 불안과 정치적 반목을 야기시켰습니다.
특히 국가 채무를 두고 국가간 충돌이 잦았는데, 소련의 볼세비키들은 대미채무 36억달라 변제를 거부했으며,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하기 전에는 미국의 채무를 갚을 수 없다고 하고, 독일은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갚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유럽이 경제불안과 국가채무에 허덕이고,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산업국이 되면서 세계 금융의 중심은 자연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인해 미국의 투자와 소비가 모두 위축되었고,
산업화된 국가들은 수출부진과 가격폭락으로 동반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각국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금본위제 폐지, 화폐가치의 평가절하, 자본에 대한 제한조치,
국가채무에 대한 지불유예 등 비책을 사용했지만 세계무역과 신용체제에 더 큰 문제를 주었을 뿐입니다.
미국이 미국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owley Tariff)을 통과시켜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자 유럽 각국도 이에 보복을 가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어 산업생산은 절반으로 줄고, 세계무역은 1/3로 줄었습니다.

경제불황과 장기실업으로 각국은 극심한 정치불안에 시달렸고, 국가주의와 군국주의가 득세했습니다.
1933년 세계경제회의(World Economic Conference)의 달러·파운드화 환율 조정 실패는 어두운 상황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러자 세계는 적대적인 경제 불록화를 겪게 되었는데, 영국 제국 내의 파운드화 불록, 미국의 달러화 블록, 일본의
극동지역의 엔화 블록, 프랑스의 금본위 블록 등입니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즘 즉 전체주의 국가들이 反볼세비키주의와 反자유·자본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식민 각국에도 민족주의가 등장해 이집트에서는 와프드당(Warfd Party)이 결성되었고,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났으며,
인도에서는 간디가 영국의 지배에 대한 각계의 저항을 일원화했습니다.


a) 독일

폭격으로 피폐해졌던 2차대전과는 달리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산업과 기간망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독일이 예전과 같은 강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를 불안히 여긴 프랑스는 배상금 완납을 주장하고,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으며, 국제연맹을 무력화시키고, 독일의
재무장을 극력 저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인에게 한을 품게 했고, 독일의 극우세력을 자극했습니다.

전 후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정치적 혼란과 외교적 고립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29~1933년의
금융·상업 위기로 인기 없던 바이마르 정부가 좌초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 국민에게 민족 우월주의와 절대적 충성을
선동해 지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1938년 독일은 정부지출의 52%, 국민총생산의 17%를 군비에 쏟아 부었는데, 이는 영국·프랑스·미국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였습니다.
1939년 독일 육군은 103개 사단에 이르렀고, 항공기는 5000대 이상이었으며, 해군도 재건되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높은 세금과 적자 차입, 정부의 노동통제, 임금과 개인 소비 억제 등을 통해 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무기산업을 일으키려면 철광석, 구리, 보크사이트, 니켈, 석유, 고무 등의 자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수입하기 위한 수출이나 외환, 식민지, 금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외환통제, 물물교환, 합성 대체품 발명 등 편법을 동원했지만, 원료재고는 바닥나기 일수였습니다.
경제력에 비해 무리한 군비증강으로 경제난과 원료난은 심화되었고,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나찌는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은 5개 사단의 병력과 철광석, 유전과 2억달러 상당의 금과 외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독일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국립은행의 금과 외환 외에도 철광석과 금속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친 군비증강은 경제난과 원료부족, 침략전쟁을 유발하며, 현시대의 미국에서도 교훈을 찾게 됩니다.
결국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의 침략전쟁을 묵과할 수 없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b) 일본

1930년대 들어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식량부족과 자원난, 낮은 생산성과 수출부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와 만주, 동남아시아 등을 점령했고, 정부예산의 70%를 군사비로 지출함으로써 군사강국이
되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세계 최대의 야마토(大和)급 군함을 제조하였고, 10척의 항공모함과 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1941년에 51개 현역 사단과 133개 항공대를 갖추어 100만대군과 200만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70만명이나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합니다.

일본의 중국 침력을 반대해 온 미국은 1938년 6월 항공자재의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 다음 해의 미·일
무역협정 파기, 1941년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한 석유 및 철광석의 수출금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은 미국이 일본에 비해 인구는 2배, 국민소득은 17배, 강철생산은 5배, 자동차는 8배, 산업잠재력은
거의 10배에 달할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본 내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군사 지도자들은 밀어 붙혔습니다.

 

c) 프랑스

프랑스는 1919년 이후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줄어들고 독일의 배상금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경제적 혼란을 겪었지만
1926년 푸앵카레(Raymond Poincare)의 통화 안정책으로 산업은 호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화학, 염료, 전기제품에서 독일의 재배를 벗어났고, 프랑화의 유리한 환율로 무역이 활기를 띠었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방대한 금 보유고로 대공황의 영향도 적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다른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자 프랑화의 가치하락을 피해보려 애쓰는 바람에 프랑화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져 수입은 60%, 수출은 70%가 줄었습니다.
1935년 디플레이션 정책은 빈사상태의 프랑스 산업을 강타했으며, 1936년 인민전선(Front Populaire) 내각이 주 40시간
노동과 임금인상을 강행함으로써 기진맥진했습니다.

독일의 재무장에 겁먹은 프랑스는 1930년대부터 국방비 지출을 늘렸으나 경제력이 약해 절대액은 적었습니다.
1937년 독일이 5606대의 항공기를 생산할 때 프랑스는 겨우 370대의 항공기를 생산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가장 좋은 지원을 받아 현대적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육지에서 전격전이 진행되었을 때 제대로
한 번 써 보지도 못했습니다.

독일군이 현대화를 추진하였을 때 프랑스에서 현대적인 기갑부대를 건설하자는 드골(Charles De Gaulle)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현대적인 지휘통신 체계와 항공기의 역할도 외면당했습니다.
독일의 구데리안이(Heinz Wilhelm Guderian)이 쓴 '전차를 주목하자'(Achtung Panzer) 번역본이 프랑스군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읽혀지지 않았고,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전술체계가 없었습니다.

 

d) 영국

1차대전 이후에도 영국은 강대국이었지만 정신적 인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유럽의 안정보다는 국내의 경제·
사회문제나 제국관리 문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영국 경제 역시 1929년 이후 세계적인 불황에 의해 크게 흔들렸는데, 직물생산은 2/3로 축소되었고, 강철생산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조선산업은 1933년의 생산이 1차대전 전의 7%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934년이 되자 경제는 조끔씩 회복되었지만 전통산업은 쇠퇴한 반면 항공, 자동차, 석유화학, 전기제품 등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였습니다.
영국은 국내의 정치·경제적 압력으로 1930년대 초에 국방비를 삭감했는데,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충격을 받은 1936년이
되서야 국방비를 증액했으나 독일의 1/3 수준이었습니다.

영국은 군사비를 국민총생산에서 1937년 5.5%, 1939년 12.5%로 증액했지만, 숙련공과 시설 부족으로 항공기, 전차,
함정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생산부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이나 스웨덴 등에서 엄청난 무기와 철판, 볼베어링 등을 수입했는데,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고, 국제수지가 위협 받았습니다.

 

e) 소련

소련은 1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14년 1억 7100만명이던 인구가 1921년 1억 3200만명으로 줄었고,
폴란드와 핀란드 등 연안국가를 잃었으며, 많은 공장과 철도와 농장을 상실했습니다.
제조업은 엄청나게 쇠퇴했는데 1920년의 생산량이 1913년의 생산량의 13%에 불과했습니다.
해외무역은 자취를 감추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60% 이상 감소하여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레닌에 이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개인농 제도를 집단농장으로 바꾸었고, 착취를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은 피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대공황 중에도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국민소득이나 산업생산이 몇배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만주사변으로 위협을 느낀 소련은 1935년 군인원을 1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하였으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한 스탈린의 광적인 탄압으로 많은 기술자와 공무원이 숙청되었고, 붉은 군대 장교의 많은 수를
제거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 가뜩이나 부족한 고급 인적자원을 줄임으로써 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f) 미국

1차대전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미국은 세계 금융과 산업의 중심국이 되고, 세계 최대의
금을 보유한 채권국이 되어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인의 높은 생활수준과 활발한 투자활동은 제조업의 호황을 지속시켰고, 많은 자동차와 농기계 등을 생산해 다른
6대 강대국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주가폭락과 금융위기로 인한 1920년대 대공황을 겪고 나서는 1930년대 다른 어느 강대국보다 쇠약해졌는데
이로 인해 세계정치의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유럽의 정세를 악화시켰습니다.
1929년 경제공황으로 미국의 국민 총생산은 3년 뒤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1,50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수출은
1/3 정도로 급감했습니다.

1930년대 다른 국가들은 어느정도 정상을 회복했지만, 미국은 1937년에 재차 불어닥친 경제공황으로 폭삭 주저 앉았으며,
세계는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로 다시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미국은 1934년 전시부채를 갚지 않는 외국정부에 대해 차관을 금지했고, 1935년 전쟁시의 무기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영국 프랑스와도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5. 2차 세계대전 - 대영제국의 멸망 (1939~1945)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두 개의 중심이 있어, 첫째, 유럽에서는 영·독전쟁, 독소전쟁, 둘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단계가 있다. 이들 전쟁은 각각 독자적 요인을 안고 발전했는데, 1939년 9월에 유기적인 연관에 놓여져서 미·영·프·소·중의 연합국과 독·이·일의 동맹국(同盟國)이라는, 이 전쟁을 일관하는 기본적 대항 관계의 기초가 이룩되었다. 또 이 전쟁에서 전체로서의 지배적인 성격은 반(反)파시즘 전쟁이었다.

 

a) 2차 세계대전의 전사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1933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反)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 반전(反戰)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19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1936년 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일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1936년의 시안[西安]사건을 계기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 ·이 ·일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다. 미 ·영 ·프의 지배층은 일면으로는 독 ·이 ·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로 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다(宥和政策).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안슐루스)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1939년 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정부를 타도했다. 1939년 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개전(對獨開戰)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 ·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전쟁이 반소(反蘇)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8월 23일의 독 ·소 불가침조약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 ·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교섭은 도각(倒閣)으로서 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b) 영독 전쟁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 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戰) 종료 후 히틀러는 영 ·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영 ·프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영 ·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 War). 영 ·프는 독 ·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線)에 의존하고, 해상봉쇄 ·경제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영 ·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 국경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 ·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이어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19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다. 또 1940년 6월에는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를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19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19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 실현시켰다(소련-핀란드 전쟁).

이 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처분하였고, 영 ·프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 병력을 파견코자 하였다. 영 ·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諸港)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19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 ·프군을 격퇴하였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共謀)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 ·프군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북부에 고립된 영 ·프군 30만은 덩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덩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 휴전을 제의하였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 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 페탱 정부에 위임되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制空權)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19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동방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 ·미에 대항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다. 이 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19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 분규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다.

이것을 본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 후에는 친서구적(親西歐的)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다. 5월 10일 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전(對蘇戰)을 위하여 영 ·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한편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 대처하게 되었다.

 

c) 독소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다.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 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대소전의 단기승리를 전제로 하는 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한다. 더욱이 독 ·소전이 발발하자 영 ·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 영 ·미가 ‘대서양헌장’으로 전쟁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 ·미 ·소의 반(反)파시즘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영 ·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제한, 미 ·영 결속, 장제스[蔣介石]정권 원조강화로 대응하였다.

1941년 6월 독 ·소전(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 ·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의 대일 금수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월 11일 독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관계(성격)는 명료해졌다. 1942년 1월 1일, 미 ·영 ·중 ·소 등 26개국은 ‘연합국 선언’에 조인하였다.

 

d) 대동아 공영권과 신질서

 일본은 진주만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다. 또 개전과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 ·필리핀에 상륙하여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필리핀에서는 19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또한 원장(援蔣) 루트의 절단, 인도에 대한 대영(對英) 이간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남방작전은 일단락을 보았다. 하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중국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체제는 강화되어 갔다.

19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 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히틀러는 19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司政官)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다. 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 ·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 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滅絶)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 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 ·트레브링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노동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 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연합군의 반공(反攻)은 동 ·서에서도 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과 맞호응하면서 전개되었다.

 

e) 전국의 전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 ·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 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 고집하였다. 지중해에서 중동 ·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19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 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km까지 육박하였다. 19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영 ·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 ·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19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 ·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한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다. 1942년 봄 재개된 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 ·소 양군의 촌토(寸土)를 다투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19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 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 ·미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 ·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다. 히틀러는 총동원 체제를 취하였지만, 19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1943년 7월 영 ·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 ·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다(1946년 5월, 왕제폐지).

19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단하려 하였지만,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해군기동함대의 주력(主力)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1942년 8월 미국군은 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 ·솔로몬제도 ·길버트 제도 ·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 ·영 ·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19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 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다. 마리아나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 ·신사군(新四軍)에 의하여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點:都市)과 선(線:鐵道)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f) 유럽에서의 전쟁 종결

 이탈리아 항복 후의 1943년 11월, 영 ·미 ·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영 ·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저항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제국(同盟諸國)은 동요하여, 잇달아 대독(對獨) 참전으로 방향전환하였다. 19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 블록에 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 불가리아는 영 ·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 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19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 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19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 결성되었고, 19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 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다. 홀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티를 감금하고 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45.1).

소련군은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 ·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 단교하고, 19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對日)참전도 결정되었다.

히틀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만다. 1945년 2월 소련군은 오데르강(江), 4월 나이세강(江)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영 ·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 라인강(江)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江)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交歡)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다.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 ·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 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g) 일본의 항복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수호(國體守護)’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h) 전후세계와 전후처리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 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 이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絶滅)정책에 유래한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전비(戰費),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 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 ·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일본 ·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 대독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소련의 지도하에 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대립(國共對立)은 내전으로 발전하여 1949년 10월 중국정권의 성립을 보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 ·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 ·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 ·프랑스도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다. 더욱이 영국에는 노동당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i) 양극체제의 대립과 평화조약

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冷戰化)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 소련에의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19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6. 미·소 냉전시대 (1945~1990)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는 영국, 소련, 미국 등 강대국과 한꺼번에 전쟁을 함으로써 전술과 무기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으나
생산력과 인력, 보급이 뒷받침 하지 못함으로써 패망하였습니다.
일본 역시 중국, 만주, 태평양 등 광대한 전선을 형성했고, 부족한 자원과 기술, 낮은 전략과 전술(항공모함보다 전함에
치중), 생산력 차이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하였습니다.


a) 전 후 미국

2차대전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등 과거 유럽 강대국은 산업이 피폐해지고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음으로써 약소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2차대전으로 인해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어 뉴딜정책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대공황의 잔재를 말끔히
걷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최대의 산업 및 군사 강국이 되었습니다.

전쟁 종결 당시 미국의 금 보유고는 200억달러로 세계 금보유고의 2/3에 달했고,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담당했으며,
세계 수출의 1/3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군은 주력 군함 1,200척과 수십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함으로써 영국을 압도하는 해군력을 갖게 되었고, 유럽의 나치를
분쇄한 2,000여대의 중 폭격기와 일본 도시를 잿더미로 만든 1,000여대의 B 29 장거리 폭격기를 소유하였습니다.

미국은 전후 자유무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는데, 1942~1946년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국제협정을 마련했고,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 체결되었습니다.
경제개발을 위해 약간의 돈이라도 차입하고자 하는 국가는 자유태환과 공개경쟁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본주의적
체제에 이질감을 느낀 소련은 일찍이 이 체제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경쟁 체제는 미국과 같이 경쟁력이 강한 나라에는 유리하였지만, 2차 대전을 겪어 폐허가 되고 빚더미에 올라 앉은
나라에는 불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자 미국은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경제적 원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b) 전 후 소련

2차대전 당시 독일군 506개 사단을 격파하였지만 자국민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어 전쟁을 정면으로 치루어냈던 소련은
전 후 동유럽과 만주, 한반도 등에 군대를 파견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소련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는데, 북쪽으로는 핀란드, 중부유럽에서는 폴란드의 영토를 침해했고, 남쪽에서는 루마니아를
침식했으며, 발트해 연안 3국은 합병하였습니다.

소련은 동유럽에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위성국을 세워 서방세력을 견제했고,
극동에서 만주, 사할린, 북한 등을 신속히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했습니다.
하지만 전 후 소련은 군사상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피폐하고 가난했는데, 미국의 무기대여와 경제지원이 끊힘으로써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소련은 1945~1950년 경제성장을 위해 국민생활과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중공업과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군 현대화에도 투자를 해 1948년 미그(MIG)-15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였고, 장거리 전략공군을 창설하였으며,
독일의 과학·기술자를 활용하여 유도 미사일과 원자폭탄을 개발하였습니다.

 

c) 냉전 (Cold War)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는데
물리적인 충돌 없이도 전쟁상황 같은 첨예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하여 '냉전'(cold war)이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냉전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더욱 심해졌으며, 과도한 군비경쟁과 핵무기 경쟁을 일으켰고, 케네디 대통령
시절 쿠바의 미사일 위기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이면에는 미국 군산 복합체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산업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미국의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는 초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무드가 정착되자 의회에서 군비를 대폭 삭감해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짜고 한국전쟁을 일으켜 소련과 공산주의란 새로운 적을 만들어냈고 군사비도 대폭 증액되었습니다.

연도

미국

소련

1948

109

131

1950

145

155

1951

333

201

1953

496

255

1955

405

295

1958

455

302

1961

478

436

1962

523

499

1965

518

623

1966

675

697

1970

778

720

2004

4013

약 600

미국과 소련의 군사비 지출(단위 1억달러, 출처:강대국의 흥망)

미국의 군사비는 한국전쟁(1950) 발발 이후 급격히 늘었으며, 1953년 이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사회와 경제를 망치기 전에 이를 통제해야겠다는 노력이 반영되었지만, 1962년 쿠바 위기로 다시 증액되었고
1966년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구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었는데도 테러와의 전쟁이후 미국의 군사비는 대폭 증가되어 2004년 군사비는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인 4013억달러(450조원)에 달합니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1950년대 소련이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자 미국의 핵 독점시대는 막을 내리고
양국간의 핵무기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하자 소련도 1953년 수소폭탄 실험을 하였고, 소련이 1957년 대륙간 탄도탄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 미국은 긴장하게 됩니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은 잠수함에서 핵 미사일을 발사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온갖 종류의 전술 핵무기와
단거리 로킷을 제조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1961년 베를린 위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에서 충돌했으며, 베트남 전쟁으로 직·간접적으로
부딛혔고,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서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소 양국은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태를 유지했는데,
우발적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핫라인(Hot-Line)을 설치했고, 1963년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 수를 제한하고, 여러 군축협상을 벌였으나 군비경쟁은 멈추지 않았고, 다탄두 로켓 같은
새로운 무기체계를 도입하였으며, 미사일 적재 잠수함을 늘렸습니다.

소련은 해외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했으며, 리비아의 카다피와 그라나다의 좌익정권을 지원하고,
이디오피아, 모잠비크, 기니, 콩고 등 서아프리카에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1979년 소련군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팽창주의를 일삼자 1980년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소련을 '악의 제국'
(Devil Empire)이라고 비난하면서 대규모 군사력과 비타협적인 정책으로 대항하였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쏟아 붓고도 실패했고, 국론은 분열되었으며, 방위비도 삭감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가 행정부 들어서면서 강한 미국을 슬로건으로 국방비를 증액했고, 인공위성으로 대륙간
탄도탄을 요격하는 SDI(스타워즈 계획)를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은 경기부양을 위해 세금은 줄이면서도 예산은 늘려 미국 정부를 만성적자의 늪에 빠뜨렸습니다.

미국의 도전에 자극 받은 소련은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방과 과학·기술 분야에 예산을 집중했고,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실패까지 겹쳐 국가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소련은 군사 분야에 모든 경제력을 투입한 결과 만성적인 가난과 비능률적인 공산주의 시스템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자본주의를 도입했지만 결국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991년 붕괴합니다.  

소련은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입했고, 개인소비를 억제하는 경제체제와 산업의 비효율성,
낮은 농업 생산성 등의 문제가 쌓여 자본주의 국가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 역시 1960년대 이후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와 산업 경쟁력 약화로 무역적자에 시달렸으며, 금보유고가
줄어들어 브레튼우드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붕괴됩니다.

 

 

미국

소련

대륙간 탄도 미사일 적재 탄두

2,118

6,420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적재 탄두

5,536

2,787

항공기 적재 탄두

2,520

680

10,174

9,987

'국제 전략 연구소'(IISS)가 밝힌 미국과 소련의 전략 핵탄두 보유수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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