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상단으로 이동합니다.
빛과 흑암의 역사

참고 자료
자본주의의 붕괴
제국주의-1
제국주의-2
제국주의-3
제국주의-4

세계화-1
세계화-2
세계화-3
미국의 패권주의
미사일 방어계획-1
미사일 방어계획-2
자원 전쟁-1
자원 전쟁-2
미국의 금권정치-1
미국의 금권정치-2
미국의 교육제도
의도된 여론정치
미국의 정치사상
헨리 키신저
군주론
이란 콘트라 사건
유나바머
베트남 전쟁-1
베트남 전쟁-2
케네디 암살
미 이라크 전쟁-1
미 이라크 전쟁-2
미국 속 유대인-1
미국 속 유대인-2
이스라엘의 실상
아르헨티나 사태
북한의 실상
일본 문화-1
일본 문화-2
창조 과학이단 교회추천 사이트동영상


제국주의-4 (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의 특징)

 

D.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의 특징 

1.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

2. 미국 제국주의의 특징

3. CIA - 미 제국주의의 첨병

4. 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5. "개도국 富유출 경제공작 있다" 前 美안보국 직원의 양심선언

 

 

1.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

미국은 184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는 약 40년 동안 노예문제로 일어난 50년대의 위기와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의
재건과 대서부의 개척, 그리고 혁신주의적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었기 때문에 북미대륙의 경계를 넘어
해외로 국력을 진출시키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간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의 후진지역에 대한 세력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제국주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도 1890년대에 들어서 자국의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취하게 되자 늦게나마 제국주의적
조류에 참가하여 해외영토의 팽창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1890년대 이전에 해외진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의 팽창주의자들 가운데는 유럽국가들의 남아메리카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팽창을
주장하였고, 또 어떤 팽창주의자들은 우월한 국민으로서 미국인이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니고 있다는 인종주의적 측면에서 팽창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업가 가운데는 미국경제와 사회의 안정상 해외시장이 필요하다는 경제적인 논리로 팽창을 주장하였습니다.


a) 소극적인 해외진출

이러한 주장들이 남북전쟁 후 1880년대 말까지 소극적이나마 미국의 해외진출을 가져왔습니다.
1867년에 링컨-앤드류 존슨시대에 국무장관을 지낸 시워드(William H. Seward)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군도를
획득하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라(에이커당 2센트)의 싼값으로 사들였고, 그란트 대통령은 1870년에
카리브해역에 있는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를 합병하려다가 상원의 반대로 실패한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하와이는 1875년에 제3국이 이 지역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어 1878년에는 태평양무역의 중계요지인 사모아군도 내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1882년에 중국의 알선으로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b) 적극적인 해외진출론의 대두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유럽열강의 제국주의 진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도 1880넌대 말에 이르면 해외진출에 대한 종래의 소극적인 정책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정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팽창의 요구에 대해 지식인들과 정치가들도 열열히 옹호하였습니다.

사회학자인 존 피스크는 우수한 앵글로색슨족의 언어 정치 종교제도가 전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치가인 핸리 케봇 로지(Henry Cabot Lodge)도 미국이 열강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해군력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은 알프래드 머핸(Alfred T. Mahan)이었습니다.
그는 1886년에 해군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영국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게된 원인을 분석하여 그 바탕이 무역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상선대의 무역을 보호하려면 대해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강연은 "제해권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이라는 저서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이어 1897년에 "제해권과 미국의 이해, 현재와 미래(The Interest of American in Sea Power :Present and
Future)'라는 저서를 통해 카리브해를 세력범위로 해야 하며, 태평양의 제해권을 잡고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입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머핸의 이론은 해외진출을 갈망하는 팽창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파나마 운하
건설, 캐나다 합병,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요구하는 대정책(Large Policy)을 내세웠으며, 공화당은 1896년 선거에서
그 정책을 정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c) 미·스페인전쟁 -제국주의로의 진입

1898년에 일어난 미·스페인전쟁은 미국이 제국주의로 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5년에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에서는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장기화하면서 스페인의 혁명탄압도 가열되어 20만 명의 양민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미국의 언론은 쿠바인에 동정적이었고, 뉴욕에 소재하는 허어스트계의 "져널"지와 "월드"지는 이 사실들을 과장
보도함으로써 미국 국민을 분노케 하였고, 미국의 쿠바혁명에 대한 간섭을 요구하는 여론을 크게 형성시켰습니다.

미국의 쿠바간섭은 인도주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내의 농민문제를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또한 쿠바가 미국의 시장으로서의 가치성, 국민적 유대감과 실업자 문제의
해결 등의 다양한 요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클리브랜드 대통령이나 그를 계승한 맥킨리 대통령은 다 같이 쿠바사태를 신중히 대처하려 하였으나 1898년
1월에 허어스트계(Hearst) 신문들은 주미 스페인 대사가 맥킨리 대통령을 모욕하는 사신을 공표하여 미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으며, 2월에는 미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아바나에 파견된 메인호(Maine)가 원인 불명의 폭팔 사건으로 침몰하여
266명의 장병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여론은 "메인호를 잊지 말자"(Remember the Maine)고 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의 압력으로 매킨리정부는 1898년 3월에 스페인에게 쿠바의 독립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개전을 두려워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자치부여를 수락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통고하였으나 이 통고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4월 11일 대통령은 선전포고 교서를 의회에 보냈고, 19일에 상.하양원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의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여 쿠바에 인접한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와 태평양의 구암(Guam)을
정복하고 다시 필리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필리핀에 대한 공격은 선전포고 2개월 전에 해군차관보 데오도어 루스벨트가 미국동양함대사령관인 존 듀이(John
Dewey)에게 스페인과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체없이 필리핀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도록 극비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제의로 12월에 강화조약(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배상으로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구암을 양도받았으며, 필리핀에 대하여서는 2천만 달러에 매수하였습니다.
존 해이는 이 전쟁을 '눈부신 소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평가하였습니다.

 

c)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

미국이 필리핀을 영유할 당시 중국에서는 열강들이 세력범위(sphers of influence)라는 이름 아래 영토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대중국 무역은 전체무역량에서 2%에 불과했으나 얼마든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중국의 분할을 막으려 했고, 그에 따라 1899년 9월에 국무장관 존 헤이는 제1차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이미 세력권을 구축한 열강에 대하여 미국에게도 대등한 무역권을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미국의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제안을 승인할 경우에는 그 원칙에 찬의를
표한다는 애매 모호한 회답을 보내왔습니다.

이와 같이 각국의 회답은 조건부였으나 헤이는 각국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1900년 3월에 문호개방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이 소요 속에서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을까 우려한 헤이는 7월에 제2차
문호개방통첩을 각국(11개국)에게 발송하였습니다.

제1차의 경우와 같이 각국에 회답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각국은 이 통첩에 동의한다는 회답을 보내 왔습니다.
해이의 선언은 중국의 영토보존과 독립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진출의 기회는 열리게 되었으나, 일본제국주의에 유린당하는 중국의 영토보존을 도의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d) 파나마 운하문제

미국은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를 얻기 위해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계획하고, 1902년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프랑스
회사로부터 건설허가권을 사들였으나 콜롬비아 의회가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의 계획은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나마지역에서 1903년에 콜롬비아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도와
공화국을 수립케 하였고, 콜롬비아는 파나마를 잃은 대가로 2천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에 완공되어 각국 선박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개방되었습니다.

 

e) 베네수엘라 문제

1902년에 베네수엘라는 영국과 독일로부터 많은 차관을 얻어 왔습니다.
그러나 차관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두 나라는 항구들을 포격하고 세관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독일과 영국이 먼로주의를 위반하였다 하여 베네수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f) 멕시코 내전 개입

미국은 1911년도에 멕시코의 석유자원의 2분의 1 이상, 철도의 3분의 2 이상 , 광산의 4분의 3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도에 반동적인 후에르타(Huerta)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윌슨 대통령은 후에르타 정권의 승인을 거부하였고, 입헌주의자 카란자(Carranza)를 도와 새로운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카란자 정부는 반미주의자이며 빈민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판쵸 빌라(Pancho Villa)의 반란에 직면하였습니다.
미국의 보수세력- 카톨릭 교회, 허스트계 신문들, 기업가들 -은 멕시코에 대한 응징을 요구하였으나 윌슨 행정부는 당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할 가능성이 높아 1917년에 이곳에서 철수하였습니다.

그 외에 미국의 태프트 정권은 1912년에 니카라과에, 그리고 1915년에 윌슨은 아이티에 군대를 파견하여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또한 1916년에는 도미니카에 군대를 파견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2. 미 제국주의의 특징

고전적 제국주의가 국가의 이익을 위하고 무력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는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고 시장 개방을 통해 경제적으로 후진 국가를 예속시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뒤로는 CIA를 통해 친미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민주인사 탄압과 군사 쿠테타, 경제적 혼란과 공기업 민영화 등을 조장합니다.

911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패권에 순응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 무력을 통한 침공과 점령을 시행함으로써 경제적 영향력의
감쇠를 군사력으로 상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석유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석유자원과 달러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이라크를
점령하였으며, 리비아와 이란이 미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핵무기를 포기하였고, 현재 북한만 남은 상태입니다.

1958년 이란의 모사테크 체제가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통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자 미국은 쿠테타를 일으켜 친미
왕정을 복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란은 왕정체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국가 발전이 지연되었고, 이란의 막대한 미국 산 무기 구입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와 결국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샤 체제가 붕과됩니다.

미국은 1954년 토지개혁을 주도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 군부정권을 세웠으며, 1961년 쿠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침공과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명분 없는 경제봉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70년에 선거로 집권한 칠레의 아옌데 체제를 무너뜨리고,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사독재 정부를
세움으로써 인권탄압이 극에 달한 칠레의 암흑시대를 열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1998년 선거로 집권하여 개혁을 단행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과감히 반기를 들었고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해 온 석유기업의 민영화를 차단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2002년 4월 군부 쿠테타를 지원하여 성공하였만 2일 천하로 끝나 실패하였고, 뉴욕 타임스는 부시 정권의
관계자들이 반차베스 쿠테타 주도세력과 회합을 가졌다고 폭로하였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시 중의 학살, 강간 등 전쟁범죄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기구로 2002년 4월 66개국이 인준함으로써
발족되었지만, 미국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군이 개입하는 전쟁이 워낙 많다 보니 미군과 관련자가 전범 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전범처리 대상을 국가나 정부 뿐만 아니라 일반군인이나 민간인도 재판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3. CIA - 미 제국주의의 첨병

미국은 겉으로는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더러운 일은 주로
CIA가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마치 한국의 군사정권이 정의로운 척 하면서도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안기부를 통해 각종 정치공작과 민주인사 고문과
테러를 자행한 것과 비슷합니다.

CIA는 냉전 분위기가 시작된 1947년 7월 트루먼 정권 때 창설되었는데, 국가안보국(NSC)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책임을
지는 기구로 탄생합니다.
CIA는 대통령의 외교전략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정보활동기구며, 1947년 12월에는 정보활동에 비밀심리전 수행이라는
임무를 추가로 부여 받아 비밀정보 및 공작기구로 전환됩니다.

CIA는 주로 제 3세계에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밀활동을 수행해 왔는데, NSC 비밀명령 10/2 문서에 의하면
비밀활동은 프로파간다(선동), 경제전, 사보타주와 반사보타주, 파괴와 철수작전 등을 포함하는 혁명 예방조지,
적대국 내의 지하 게릴라에 대한 지원 등을 포함한 반미정권 붕괴, 반공세력 지원 등을 의미하고 이 외에 요인 암살 등이
실제적으로 추가되었는데 이 내용은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밝혀져 미국 내 여론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NSC 10/2에 미국 정부의 정치공작 비밀개입을 은폐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점인데, 이 조항은 CIA의
제3세계 정치공작에 대해 미국의 개입을 불분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그 내용은 "작전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관계자 이외에는 미국의 책임이 분명하지 않도록 계획되고
시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작전이 적발되더라도 미국 정부가 이에 대하 관련책임을 부인할 수 있다."입니다.

특이한 사항은 CIA가 독일 나치의 대소 첩보망을 고스란히 넘겨 받아 냉전정책의 수행에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elen)은 대소 첩보기구 책임자로 그가 관할했던 첩보망을 미국에 넘져주는 대신
전범 처리에서 빠졌습니다.
CIA는 나치가 다차우(Dachau)에서 행한 인체 대상 생화학 실험을 토대로 심리통제를 위한 약물실험을 해 왔습니다.

CIA가 약물실험을 정책적 관심사로 삼은 것은 나치 독일의 인체 생화학 실험 결과를 인수하여 1953년 MK-Ultra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부터입니다.
CIA 앨런 덜레스 국장 밑에서 이 계획을 추진한 리처드 핼럼스는 이를 가르켜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실험으로
생화학 물질을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CIA가 제3세계 비밀공작 활동을 추진한 대표적인 예는 이란의 민족주의 체제 모사테크 정권의 전복과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의 붕괴작전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CIA는 제3세계 정치공작 비밀개입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며, 이후 CIA 활동의 전술적 지침과
경험을 얻게 됩니다.

1941년 영국의 후원으로 이란을 통치해 온 팔레비는1951년 민족주의자 모사테크에 의해 축출당하였고, 모사테크는
영국 투자기업인 영-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국유화합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해 모사테크 정권 전복작전(암호명 AJAX)을 추진하는데, 이란 군부 내 왕당파를
지원해 1953년 쿠테타로 모사테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팔레비를 재옹립 하게 됩니다.

CIA의 다음 작전 대상은 1952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미국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s)의 비경작 토지를
국유화 과정을 통해 몰수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입니다.
1954년 1월부터 6월까지 CIA가 아르벤스 제거 작전에 들인 자금은 2000만 달러로 이는 반란군 조직, 비밀 공군 폭격대
조직, 비밀 라디오 방송국 설치, 대체 군부 지도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중령의 발굴 등에 쓰였습니다.

심리전이 주요한 작전에서 1854년 6월 아르마스는 소수의 군부대를 아끌고 미군의 공군 폭격 지원과 비밀 라디오
방송의 흑색선전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아르벤스 정권을 함락시켰습니다.
CIA는 아르마스에게 300만 달러의 군자금과, 군사훈련, 훈련기지, 군수물자 등을 제공하고, 쿠테타 지도자 선발에서
구체적인 작전지도까지 지원함으로써 정치공작의 표본을 완성했습니다.

캐네디 정권 들어서 행한 CIA 비밀활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쿠바의 피그만 침공과 이것이 실패한 후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직접 지위한 몽구스 작전, 베트남전 개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피그만 침공은 미국으로 망명한 소모사 정권의 잔류부대를 동원하면 쿠바의 민중이 호응할 것으로 보고 전개했으나
무참히 실패했고, 카스트로 암살 계획은 마피아까지 관련시켰지만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전에도 개입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만여 명에 달하는 특전사와 CIA의 자금 지원을 받는 3만명의
산악부족을 훈련·지원하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설립한 디엠 정권이 오히려 미국의 외교전략 수행에 방해가 되자 CIA는 군부의 쿠테타를 부추켜
1963년 11월 쿠테타가 일어났고, 디엠은 부하의 손에 저격 당하게 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에서 통비(通匪)분자 색출과 처단이라 할 수 있는 '불사조 작전'(Phoenix Operation)을 실시하여
2~3년 사이 4만명의 민간인을 억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유격 근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자행한 베트남 민간인 대량 학살 작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민간인 학살을 도맡은 '죽음의 군단'(Death Squads)의 기본 모델이 되었고, 한국군도 동원되어 역사에 오욕을 남깁니다.

베트남전 패전 이후 CIA의 대중적 위상 하락과 미국의 제3세계 군사개입을 거부하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Vietnam
Syndrome) 현상으로 닉슨 정권은 간접 개입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CIA는 비밀개입의 군사적 성격을 완화하고, 주로 정치공작 차원에 주력하게 됩니다.
키신저는 CIA를 정책을 결정하는 조직이 아니라 '40인 위원회' 감독 아래 정책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칠레의 아엔더 정권 전복 계획은 칠레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 ITT와 코카콜라사의 요청에 따라 닉슨과
키신저가 NSC의 결정으로 CIA를 동원하여 추진했습니다.
CIA를 통해 칠레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1973년 쿠테타를 성공시킨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뒤
사임하게 됩니다.

1975년 포드 정권 때에는 미 의회 내에 정보기구에 대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는데, 상원의 특별위원회는 CIA의
비밀활동 역사와 카스트로 암살 등 암살 계획을 밝혀 냈습니다.
의회 청문회를 통해 CIA의 창설 과정과 제3세계 비밀공작이 상당 부분 공개되었고, CIA는 의회의 제도적 견제를
받게 되면서 카터 정권 들어 비밀활동이 약화되었습니다.

CIA 국장 스탠스필드 터너는 정보수집과 분석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비밀공작 기능을 부분적으로 해체하는 조취를
취해 820개의 직책을 폐지하고, 200명의 비말활동 경력요원과 600명의 대체요원이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란 인질사태가 벌어지자 카터 정권은 현실주의 외교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전 CIA 비밀요원을 소환해 인질구출
작전을 벌였지만 실패해 강력한 군사주의 노선을 제창한 레이건에게 선거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CIA는 다시 살아났으며, 1980년 CIA는 9,200명의 요원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15만명이 넘는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CIA의 비밀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 레이건은 CIA의 예산을 대폭 늘려 주었고, CIA의 캐시 국장은 의회의 감시 때문에
공식 루트가 아닌 제3자에게 일을 맡기는 청부작전을 구사하게 됩니다.

이란-콘트라 작전이 대표적인 청부작전의 사례로 이스라엘의 무기를 이란에 팔아 인질문제를 해결하고, 그 무기 판매
수익금을 니카라과 반군 원조자금으로 활용한 1석 2조의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무기 판매가 금지된 국가였으므로, 국가안보 보좌관 맥팔레인은 이스라엘 군사외교 책임자 데이비드
킴츠를 접촉하고, 판매 경로에 사우디 거부 카쇼기를 내세웠습니다.

레이건에 이어 대통령이 된 부시 대통령은 CIA 국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노리에가를 제거한 파나마 침공과 같은
군사개입과 심리전을 위주로 한 정치공작을 함께 펼칩니다.
현 부시 대통령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국민감시를 강화하고, CIA와 FBI의 기능을 통괄하는 국토안보국
(Homeland Security Department)를 창설함으로써 정보 및 비밀공작 기능을 대폭 강화하였습니다.

 

 

4. 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의 독립된 연방제 국가로 묶고자 노심초사했던 이유는 장차 이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이런 구상은 영국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분열 정책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20여 개국으로 분열되면서 좌절된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가리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먼로 독트린은 불간섭주의, 고립주의 정책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일대의 패권과 필리핀 점령을 통해 태평양에 미국의 팽창 전략의 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해로를 찾고자 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장장 1만 5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드 레세프였지만 공사는 여러가지 악재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미국이 중단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파나마를 통치하고 있던 콜롬비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의 건설권과 운영권을 차지하고, 이른바 '파나마 운하지대'로 불리는 파나마공화국의 영토 중 5%를 할양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운하의 운영 및 관리는 물론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콜롬비아의 식민지로 독립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파나마인들이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엽의 일로 1963년에는 파나마 운하지대에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려던 학생 23명이 미군과의 충돌로 사망하기도 했다.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반미운동의 물결은 파나마에도 몰아쳐 1971년부터 파나마 운하 사용과 관련된 협상에서 파나마측은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된다. 1968년 아리아스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 정권은 1973년 이 문제를 국제 문제화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였지만 1969년 군부 반란 움직임이 미국의 사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제3세계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국내 기반을 강화하며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구조를 개선하려 했다. 토리오스는 미 CIA의 지휘 아래 있는 정보요원 출신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대규모 농장지대에 대한 좌익운동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3세계 국가의 많은 군부 엘리트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운영하는 군사학교13)를 다니면서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마누엘 노리에가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파나마 운하 문제를 UN에 상정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에 미군을 영구주둔시키는 문제를 협정에 명시하고자 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파나마의 토리에스 정권은 정보기구 G-2를 동원해 파나마 운하 일대에서 반미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G-2의 책임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막후 협상대표로 삼아 워싱턴에 파견하여 사용료 인상에 합의하는 등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서 CIA와 밀착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노리에가는 파나마 운하 지역 내에 위치한 남부사령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동시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과 중남미 마약 조직의 움직임에 관해서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레이건 등장과 때맞추어 1981년 토리에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나마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CIA의 여러 비밀 공작들 '이란-콘트라 게이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노리에가의 체포 후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 CIA 국장으로 있던 1976-1977년 매년 11만 달러를 노리에가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을 비롯해서 총 1천 1백만 달러 상당의 돈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가 미 CIA의 앞잡이14)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기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중남미에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은 해병대와 포함(砲艦)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 감정에 의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공개적인 무력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책보다는 CIA를 동원한 비밀 공작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CIA가 개입된 것으로 확인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변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 전복(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 개입(1965),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 니카라과 내전(1981-1983), 엘살바도르 내전(1981-1983) 등 다양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결과 조성된 미국 내 여론 역시 CIA의 비밀활동에 대해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미국은 CIA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라 그 실체가 좀더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 청부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이란-콘트라 게이트'였다.

니카라과는 1855년 미국의 해적 윌리엄 워커에 의해 처음 침략당한 후, 1909년부터 1934년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의 침략을 당했다. 1934년 민족주의 지도자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암살되었고, 그를 살해한 아우구스타시오 소모사가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고, 소모사와 그 일족은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타도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모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통치를 펼쳤는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그를 가리켜 "소모사는 개새끼였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15) 말했다. 소모사를 타도하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장악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의 최대 고민거리였지만, 1982년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CIA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CIA는 1984년 니카라과의 항만에 비밀리에 어뢰를 설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일체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는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미국은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할 예산이 봉쇄되자 니카라과 반군은 마약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 콘트라를 지원할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요구한다. 게다가 미국은 비밀리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룬 것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탈냉전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리에가에 대한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노리에가가 국제 마약밀매업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을 두고 미국 내 여론의 비판이 심해졌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민주헌정을 회복하고, 국제마약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했으나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은 1980년대 말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통치가 종식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 소모가 커지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제3세계의 군부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해지고, 미국 경제의 하락으로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군부정권의 경제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하게 된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저항 세력 가운데 친미적인 개혁 세력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재민주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일종의 시범 사례로 제거된 것이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노리에가 축출을 지지하면서도 미국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국제법상의 '범죄적 행위'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귀속되는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강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했다.

미국의 침공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미국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국제법 무시로 인한 비난이나 파나마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이 작전에 최초로 실전 참가했던 F-117 스텔스 폭격기의 성능이었다. F-117 스텔스 폭격기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의 95%를 담당하며 그 성능을 맘껏 뽐내기도 했다.

 

 

5. "개도국 富유출 경제공작 있다" 前 美안보국 직원의 양심선언

(::경제 저격수의 고백 / 존 퍼킨스 지음 / 황금가지::)

미국 국방부가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해 한국 전자업체들에 전략적 제휴를 비밀리에 제의해왔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국방부까지 나서 세세하게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산업전쟁으로까지표현되는 현재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 책은 ‘산업스파이’의 수준을 뛰어넘어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국익을 위해 국가적으로 ‘비밀공작’을 펼치고 있는지를 그중심에 있던 사람이 직접 고백한 내용이다.

저자는 실제로 1971년부터 10년 동안 인도네시아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지에서 ‘경제 저격수(Economic Hit Man)’로 미국 기업과 정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뉴햄프셔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보스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고교시절부터 부친의 지나친 기대에 좌절을 경험했다.

경제저격수란 겉으로는 국제 컨설팅 회사의 직원으로 개발도상국을 돕는 경제전문가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훈련을 받고 해당 국가의 국고(國庫)를 미국이 손쉽게 ‘털어내도록’ 공작을 벌이는 사람이다.

그 선발 과정부터 섬뜩하다.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도덕적 가치나 심지어 애국심도 오히려 선발에 장애가 된다. 그 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겪은 좌절을 통해 얼마나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여자를 원하고, 근사한 삶을 꿈꾸는지가 더 중요하다. 공작에는 숭고한 가치는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선발되면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공작원으로서의 삶이시작된다. 목표로 정한 국가에 민간인 신분으로 들어가 경제성장률을 부풀려 예측하고 그에 따라 기간산업의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도록 표적 국가의 정·재계 요인에게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회계부정과 선거조작, 뇌물, 섹스가 동원되기도 한다. 그들이 실패하면 그 다음엔 ‘자칼’이라는 미 중앙정보국의암살자가 나선다. 저자는 1981년 원인불명의 사고로 숨진 하이메 롤도스 에콰도르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파나마 대통령이이들 자칼에게 살해 당했다고 주장한다. 자칼이 동원돼도 공작이 성사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젊은 미국 군인을 동원한 전쟁으로간다.

개발도상국들이 이같은 경제저격수의 마수에 걸려 일단 차관을도입하면 그 차관으로 이뤄지는 모든 개발계획은 미국 기업에 돌아간다. 개발이 된다한들 부풀려진 경제적 예측에 의한 것이 제대로 운용될 수 없다. 결국 이들 나라는 국부를 미국 기업에 유출하고 극심한 경제적 파탄에 시달리게 된다. 책은 그같은 사례를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저자는 이같은 미국의 경제적 공작의 근원을 거대기업과 정부, 은행이 삼위일체가 돼있는 미국 특유의정치체제인 ‘기업정치’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저격수로 활동하는 동안 이혼을 했으며, 친구였던 파나마와 에콰도르 대통령의 의문사를 경험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1980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엄주엽기자

문화일보   2005-04-08

 

 

우리는 제국주의 단원을 통해 인간의 끝 없는 탐욕이 각종 음모와 전쟁과 학살과 경제적 혼란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상호존중의 대등한 국제질서가 무너지면, 곧바로 보호무역과 보복관세 같은 경제적 전쟁이 벌어지고
곧이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다는 것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야고보서 1/14~15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 참고 서적

1. 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한국경제신문)

2. 대영제국 쇠망사 (나카니시 테루마사, 까치)

3. 밀실의 제국 (김민웅, 한겨레 신문사)

4. 국부론 (아담 스미스, 범우사)

5. 세계 제2차대전사 (이대영, HOBBIST)

 

* 참고 사이트

1. http://www.encyber.com/

2. http://www.greatwar.pe.kr/

 

 

 

 

 


Copyright(c) light and darkness history All rights reserved
aspire7@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