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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실상

 

北, 특수전전력 2만 명(총 12만 명) 증원

 2004년도 국방백서 : 북한 정세와 군사적 위협

‘북한은 주적’이라는 국방개념이 사라진 국방백서가 지난 4일 발간됐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주적표현을 삭제했지만 “군은 장병정신 교육을 강화하는 가운데 북한의 실체적 군사위협을 명확히 인식, 군사대비태세를 더욱 확고히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4년 만에 발간된 이번 국방백서는 전체 군단 수를 줄이는 대신 미사일관련 부대를 확충하고 국경경비사령부와 미사일 지도국의 2개 군단을 신설하는 등의 북한 군사 동향 관련 최신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2004년도 국방백서를 요약 게재한다.<편집자주>

북한이 보유한 구 소련제 `MIG-29` 전투기의 모습


북한의 김정일은 공개 활동의 대부분을 군부대 방문 등 군 관련행사에 집중하면서 군의 정치적 역할을 중시하는 ‘선군정치’를 통해 체제 내부 결속을 도모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 이후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 활동은 현저하게 증가(2002년 24회-2003년 50회-2004년 53회)하고 있는데, 이는 선군정치의 일환으로 군이 전투준비 태세 강화를 유도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독려활동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군사적으로는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1962년 ‘4대 군사노선’을 군사정책으로 채택한 이래 장기간에 걸친 전쟁준비를 완료하였으며, 당분간 현재의 군사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난 심화에도 불구하고 국가자원을 군사부분에 우선 배분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육*해*공군의 주요 전력을 평양-원산선 이남 지역에 집중배치하고 있다.

군사비 지출, 국민총생산(GNI) 30% 넘어

한편, 북한은 2004년도 국방비를 국가 총예산의 15.5% 수준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특성과 예산체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실질 군사비는 국민총생산(GNI)의 30%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북한의 국방비는 국가예산 이외에도 군수경제 운영체제(제2경제), 무기 수출, 군부대 외화벌이 사업 등 독자적인 군 예사체계 등을 통해 조달되고 있으며, 군수공장이 국유화되어 있는 등 매우 저렴한 군사비 지출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전쟁지도 및 군사지휘의 최상위 기관은 국방위원회로서 전반적인 국방사업을 결정하고 지도하는 독립기구이며, 그 예하기구로 인민무력부가 편성되어 있다. 1998년 9월 5일의 개정된 북한 헌법(제100조)에 따라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인 국방관리기관’으로 강화됨으로써 국가 최고 권력기관으로 격상되었으며, 국방위원장은 ‘정치, 군, 경제역량의 총체를 통솔하는 국가 최고의 통수권자’로 위상이 강화되었다.

인민무력부는 군 관련 외교업무와 군수, 재정 등 군 정권을 행사하고 대외적으로 대표성을 가지며, 총정치국은 군의 당 조직과 정치사상사업을 관장하고, 총참모부가 실질적으로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통합군 체제로 군령권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북한 지상군은 9개 정규군단, 4개 기계화군단, 1개 전차군단, 1개 포병군단, 평양방어사령부, 국경경비사령부, 미사일지도국, 경보교도지도국 등 총 19개의 군단 급부대로 편성되어 있다.

지상군 70%, 평양-원산선 이남 지역 배치

주요 전투 부대는 80여 개 보병사단 및 여단, 30여 개 포병여단, 10여 개 전차여단 및 7개 전차연대, 20여 개 기계화여단, 25개 특수전 여단 등 총 170여 개 사단 및 여단으로 편성되어 있다. 북한은 전방에 4개 군단, 그 후방에 1개 전차군단, 2개 기계화군단 및 1개의 포병군단등 평양-원산선 이남 지역에 지상군 전력의 약 70%를 배치하고 있어 유사시 재배치 없이 기습공격이 가능한 능력과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전방지역에 배치하고 있는 170밀리 자주포와 240밀리 방사포는 사거리가 우리의 수도권까지 미치고 있어 현 진지에서 수도권에 대한 기습적인 대량집중사격이 가능하다. 한편 전방군단 특수전부대 포함 약 12만 명(2000년 10만 명)에 달하는 특수전부대는 유사시 남한 전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침투하여 후방지역 교란과 혼란 조성을 기도할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 해군은 해군사령부 예하에 동*서해의 2개 함대사와 12개 전대 및 2개의 해상저격여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투함정중 수상전투함은 경구축함, 경비함, 유도탄정, 어뢰정, 화력지원정 등 대부분 소형의 고속함정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투함정의 60%가 전방기지에 전진 배치되어 있다. 잠수함은 로미오급 및 상어급 잠수함 60여척과 유고급 잠수정 10여 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원함정은 상륙함, 고속상륙정, 공기부양정 등의 상륙용 함정과 소해정, 해상 경비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 공군은 공군사령부 중앙통제 하에 4개 비행사단과 1개의 헬기여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투기의 40%를 전방기지에 배치하고 있다. 항공기 전력은 MIG-15/17/19/21 전투기와 IL-28 전폭기 등 구 소련제 제1*2세대 전투기가 약 70%를 차지하고 있고 MIG-23/29 및 SU-25 등 제3*4세대 전투기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개량형 MIG-21 전투기와 러시아로부터 MI-8 헬기 및 KA-32 헬기를 도입했다.

북한이 보유한 SA-2S 미사일


이외에도 북한 공군은 2개의 저격여단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사시 저공으로 아군 깊숙이 특수전 부대를 침투시킬 수 있는 약 300여 대의 AN-2기를 보유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병영체제로 유지

북한은 ‘4대 군사노선’에 따라 전 인민을 무장 화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거대한 병영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14~60세까지 전 인구의 약 30%가 동원 대상인 770만여 명(2000년 748만여 명)의 예비전력은 연 15~30일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의 예비전력은 전투 동원 대상인 교도대 62만여 명, 향토예비군 성격의 노동적위대 572만여 명, 고등중학교 군사조직에 해당하는 붉은청년근위대 94만여 명, 기타 준군사부대로서 호위사령부, 인민보안성, 군수동원총국, 속도전청년돌격대 등 약 42만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영변에 핵시설 건설을 시작했으며, 1970년대에는 핵연료의 정련, 변환, 가공기술을 집중 연구했다. 한편 1980년대 이후 5MWe 원자로의 가동 및 폐연료봉 재처리를 통해 핵물질을 확보하는 등 핵연료 확보에서 재처리에 이르는 일련의 ‘핵연료 주기를 완성하고, 이와 병행해 고폭실험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기급 플루토늄으로 핵무기 1~2기 제조

특히 북한은 지난 1992년 5월의 IAEA 사찰 이전에 추출한 약 10~14kg의 무기급 플루토늄으로 1~2개의 핵무기를 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북한은 2002년 12월 핵시설 동결해제 이전에 보관해 왔던 8,000여 개의 폐연료봉을 2003년 1월부터 6월까지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적인 플루토늄의 확보가 가능한 영변의 5MWe 원자로는 2003년 2월 말부터 계속가동하고 있다. 또한 북한이 ‘우라늄 농축 핵 개발 계회’에 따라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기 개발을 위해 관련부품을 도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獵?

북한은 1961년 말 김일성의 ‘화학화 선언’에 따라 화학무기 연구 및 생산시설을 설치하는 등 무기 개발을 시작했으며, 1980년대부터는 독가스 및 세균무기를 생산해 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북한은 여러 개의 화학공장에서 생산한 신경성, 수포성, 혈액성, 구토 및 최루성 등 유독작용제 약 2,500~5,000톤을 여러 개의 시설에 분산 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탄저균, 천연두, 콜레라 등의 생물무기를 자체적으로 배양 및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1970년대부터 탄도 미사일 개발계획에 착수하여 1980년대 중반에 사정거리 300km의 SCUD-B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후, 사정거리 500km에 이르는 SCUD-C를 생산하여 작전 배치했으며, 1990년대에는 사정거리 1,300k인 노동미사일을 시험발사 한 후 작전배치 했다. 1998년 8월에는 대포동-1호 미사일 운반체 발사실험을 했으나 실패 했다. 그러나 운반체의 엔진연소와 탄체의 다단계 분리 등 제반기능을 실험한 것으로 보아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외에도 북한은 최근 들어 장거리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2호를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

 


 

 '2006년 북한은 어디로?' 경제편 7.1 경제개혁조치
 

7.1조치는 경제단위들의 경제활동에 있어서 분권화, 화폐화, 시장화를 의도하는 경제개혁정책으로서 국영기업 및 협동농장의 경제관리체계, 분배제도, 가격제도, 재정, 대외경제제도 등 전 경제분야에 걸쳐 시행된 경제개혁조치였다. '계획'에만 의존했던 경제운용체계를 '시장'의 기능도 병존적으로 같이 활용하고자 하는 개혁조치였던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최대의 경제개혁조치
 
  북한 당국자가 7.1조치에 대해 북한이 해방 후 반봉건적 지주경제를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전환시키고자 처음 추진했던 토지개혁에 버금갈 정도의 경제정책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장기적으로 북한경제체제의 이행을 유도할 수도 있는 획기적인 개혁조치였다. 7.1조치는 한 마디로 북한체제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폭탄성을 안고 있는 경제개혁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7.1조치는 지난 3년간 북한경제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몰고 오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든 개혁정책이 다 그렇듯이, 개혁의 "쓴 맛"과 "단 맛"을 동시에 가져와 지난 3년간 경제개혁의 손익계산서를 쉽게 제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북한경제에 격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농업ㆍ유통ㆍ지방부문은 성장, 공업ㆍ국영부문은 침체
 
  그러면 우선 7.1조치 이후 북한경제에 나타난 거시경제적 현상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경제는 잘 알다시피 90년대에 일명 '고난의 행군시기'라고 일컬을 정도로 마이너스 경제성장의 행진을 경험했었다. 총국민소득이 80년대 후반에 비해 약 절반 정도 감축될 정도로 축소재생산을 경험하다가 99년부터 플러스 성장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외부세계의 대규모 지원이라는 수혈에 힘입은 것으로서 자체 경제동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경제활동의 성과를 모두 국가가 가져가기만 했던 시스템을 뜯어고치고 경제성과와 개인의 보수체계를 연계한 7.1조치는 노동의욕의 제고와 생산성 증대를 가져왔다. 그래서 7.1조치는 비록 자본 및 원자재의 부족으로 생산증대에 여전히 애로를 겪고 있지만,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주어진 경제여건 내에서 최대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내도록 유인함으로써 미약했던 플러스 성장세를 선순환적인 구조로 전환하도록 만들었다.
 


식량생산량이 2002년 이후 3년 연속 400만 톤대를 넘어서고 80년대 후반 수준을 회복하고 있는가 하면, 도소매업이 2003년 9.8%, 2004년 21.7%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무역규모도 2003년 5.7%, 2004년 19.2%로 급증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최근 이러한 경제의 활성화에 고무되어 93년도 이후 최초로 올해 '기간공업 및 농업개발 3개년' 중기계획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7.1조치로 해결할 수 없는 에너지 및 원자재난은 여전하기 때문에 공급경제의 애로는 아직 심각하다. 2004년도에 경공업생산이 -0.2%를 보이는가 하면 중화학공업도 불과 0.7%의 성장세에 머무르고 있다.
 
  7.1조치는 생산경제보다는 유통경제와 소비경제에, 그리고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경제 부문보다는 지방정부가 관리하는 지방공업 부문에 더욱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원자재교류시장 및 종합시장의 허용으로 잠재되어 있던 교환행위가 활발해지고 억눌려 있던 소비의욕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칙을 지키면서 실리를 추구한다"는 실리사회주의 논리에 의해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산업부문은 계획경제체계에 묶어두고 지방공장들은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상당부분 허용했기 때문이다.
 
  7.1조치 이후 북한의 기업소, 협동농장, 상업기관들은 국가가 지령한 생산량 달성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윤을 더 많이 올릴 것인가, 시장을 보다 많이 확보할 것인가, 외자를 유치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각 경제단위의 지배인들은 수익을 내지 못하면 해고될 수도 있고 근로자들은 기업소가 이윤을 내어야 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록 북한경제가 '빈곤의 함정'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선순환적인 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개혁의 부메랑'…심각한 인플레와 양극화, 암시장의 확대
 
  그러나 7.1조치는 다른 한편, 이른바 '개혁의 부메랑'도 발생시켜 7.1조치 이후 북한경제를 '인플레 경제'로 바꾸어 놓고 있다. 북한은 7.1조치를 단행하면서 각 경제단위들의 독립채산제를 강화하고 시장경제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 재화 및 서비스의 가격을 당시 시장가격수준으로 현실화하는 가격개혁을 실행했었지만, 이러한 급격한 가격개혁은 곧바로 초인플레를 야기하고 말았다.

예컨대 쌀 1kg의 국정가격은 44원이지만 시장가격은 800~900원에 거래되고, 돼지고기 1kg의 국정가격은 110원이지만 시장에서는 2500원이며, 운동화 1컬레의 국정가격은 180원이지만 시장가격은 1만5000원(중국산) 정도 한다. 노동자 한달 평균 임금 3000원으로 돼지고기 1kg을 사면 그만이고 다섯 달치 임금을 합해야 겨우 운동화 1켤레를 살 수 있다. 연평균 300~400%씩 상승하는 살인적인 물가에 북한주민들은 한숨만 푹푹 나온다고 한다. 음성적 거래로 존재했던 교환경제를 양성화한 7.1조치는 억눌려 있던 소비 욕구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풀어놓았지만, 공급의 애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플레 경제는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7.1조치는 또 다른 '개혁의 부메랑'으로서 양극화 현상도 야기하고 있다. 외화벌이를 통해 쉽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외경제부문과 대내경제부문, 계획경제종사자와 시장경제공간을 일부 활용할 수 있는 부문의 종사자 등 사이에 극심한 소득격차를 낳고 있다. 과거에는 엄격하게 제한된 기업소, 기관만 외화벌이를 할 수 있었지만, 7.1조치 후 허가받은 모든 기업소, 기관들에 외화벌이가 가능해지면서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재산축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합시장이나 거리의 매대에서 개인상업활동이 허용되면서 대ㆍ중ㆍ소규모의 상인계층도 등장하고 있다. 대외시장이나 국내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소, 기관들은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되면 타기업소보다 월등히 많은 월급을 지불하기도 한다. 실리경제를 잘 활용하고 장사수완이 좋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 새터민들에 따르면, 7.1조치 후 북한 주민들은 정해져 있는 직업보다 돈벌이가 되는 또 다른 경제활동에 열심인 이중직업(two-job)활동이 급증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마 북한 당국이 가장 우려하는 개혁의 '쓴 맛'은 부패경제의 확산을 통한 관리되지 않은 시장경제, 즉 암시장이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7.1조치는 이러한 현상도 야기하고 있다. 7.1조치 이후 각 기업소, 기관들은 독립채산제에 의해 스스로 자본을 조달해서 경영을 해나가야 하고 주민들은 살인적인 인플레 경제하에서 월급만으로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결국 국가가 정한 생산량 조달과 이윤의 납부를 위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비법적인 경제행위를 조장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북한은 90년대 계획경제기능의 마비로 인해 자구책 차원에서 비법적인 경제행위가 구조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실리추구를 공식화한 7.1조치는 관리되지 않은 시장경제공간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는 것같다.
 
   북한 고위관리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
 
  7.1조치 이후 북한경제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같다. 앞에서 살펴본 양면적 현상들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경제상황은 보다 더 시장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고,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경기상승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한 고위당국자는 방북기업가에게 "7.1조치 후 3년간은 과도기적 상황으로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지금 그에 대한 평가작업을 하고 있으며, 우리는 반드시 성공적으로 관리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라서 아직은 7.1조치가 가져온 북한경제상황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라고 생각한다. 개혁은 성공을 위해 스스로 또 다른 개혁을 요구한다고 볼 때 북한경제의 변화는 향후 더 가속화되어 나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2006-04-28

프레시안

 


 

'예수쟁이' 앞길에는 모진 고문과 죽음 뿐

탈북자 충격 증언/ 최근 북한 실상과 기독교인 핍박실태


나는 고발한다1 -탈북자의 피맺힌 증언
배고파 아들 삶아 먹은 아버지의 통한의 눈물

탈북자 최우영 씨(가명, 북한 정치보위부 근무)는 전방에서 군복무하며 남한실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최우영 씨는 2002년 12월 탈북해 신양을 거쳐 북경에 잠시 머무르다 2003년 8월 1일 기차를 타고 곤명까지 가서, 도보로 미얀마 국경을 넘어 태국에 도착했다.

그는 탈북자들이 여전히 중국과 러시아, 몽골에 산재해 있다고 말했다.

"2002년 10월에 집계된 북한측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국 내 탈북자 수는 12만 명으로 추산한다. 러시아에 1천 명 정도가 있고 중앙아시아에 200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들의 생활 상태는 매우 열악하고 불안하다. 탈북자들은 대부분 미국, 캐나다, 호주, 한국 등으로 갈 것을 목숨 걸고 희망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10명 중 5명은 한국행을, 3명은 미국이나 호주 또는 유럽행을, 1명은 중국 정착을, 1명은 북한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최우영 씨는 북한주민들이 남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처럼 북한 당국의 말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남자의 경우 군복무를 하면서 남한에 대한 정보를 접한다. 북한에서는 70년대부터 2001년까지 군사분계선에서 10년씩 군복무를 했다. 군인들은 군복무 중에(강원도, 개성시, 황해남도에서 군 복무한 경우) 한국의 대북방송 등 대북 선전물을 10년 동안 은밀히 듣고 보면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가지게 된다.

제대하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고향으로 가고 그들이 자기 가족과 친구, 이웃들에게 귓속말로 남한의 소식을 전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퍼져서 북한주민의 40%가 한국의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근래에는 탈북했다가 돌아오는 주민들을 통해서 외부소식이 전해진다."

최근 불거져 나온 북한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 대해서 그는 북한의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차원에서 세운 교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북한의 공식적인 교회들은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위원장 강영섭)이 통일전선부의 지령을 받으며 노동당의 대남정책을 보장해주고 있는 형식적인 교회이다. 봉수교회는 평양 보통강 개수 공사탑이란 곳에서 마주보이는 바위 절벽 위에 있는 건물이다.

1층은 북한의 종교전체를 지휘하는 사무실인데 그 곳에는 종교신분증(조선선도교청우당, 사회민주당, 그리스교도련맹원, 불교련맹원 등)을 가지고 대외공작을 수행하는 정예 멤버들이 상근한다. 2층은 예배실이다. 도급 보위부관리대원 (현역군인)중에 잘 준비된 자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부에 추천하여 훈련을 한 뒤 봉수교회에 교회일꾼으로 파견한다.”

최 씨는, 파견된 사람들은 외부 사람들이 북한교회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혁명과업을 삼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의 활동에 성과가 있으면 내적으로(당조직으로부터) 표창을 받는다. 북한의 신학교육 초기에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했다.

“말씀공부가 아니라 남한교회연구와 예배절차 암송하고 연습하기가 전부였다가 서툴다는 지적이 있자 ‘구체적인 모습 보여주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또 남한교회가 북한 내 <가정교회>의 존재에 관심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1992년부터 <가정교회만들기>를 각 지역 당위원회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성가대는 1989년 경에는 중앙사로청 청년선전대원(전문 성악배우)들을 동원시켜왔는데 최근에는 각 예술단 성악배우들도 동원시킨다. 찬송가를 예배당 문밖에 나서는 순간부터는 부를 수 없다."

최주영 씨는 북한이 조작한 가정교회가 아닌, 진짜 지하교회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하교회는 조직화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고 모여도 두세 명이 몰래 모이는 형태를 띄고 있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 일부지역에 80세 이상의 성도들이 존재한다. 80여 명으로 추측 조사된 이 숫자는 2001년의 보위부 분석자료이다. 함경북도와 양강도 일대에 중국에 있는 교회로부터 전도를 받아 재입북한 사람들, 평안북도 지방에 있는 옛 신도들의 자손들 그리고 대대적인 기독교 숙청에서도 살아남은 신도들이 있다."

그는 북한의 경제난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증언에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삶아먹은 일이 있었다.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 1반에 사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 환각 속에서 세 살 난 자기 아들을 먹었다. 또 먹을 것을 훔치기 위해서 살인하고, 협동농장의 소를 밀도살하기도 한다. 사람을 잡아먹은 사건이 1996~1998년에 11건, 농장의 소를 잡아먹고 총살된 사람은 150여 명으로, 안전부 사람들의 통계자료이다."

최 씨는 남한에 온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이 왜 탈북하고 있는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최 씨는 탈북자들 중에는 함경북도 산간지대, 양강도와 함경북도 사이에 위치한 지역, 자강도의 산간지역 등 오랫동안 문화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이들이 남한으로 올 경우 갑작스런 환경변화로 인해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한다고 우려했다.

“북한은 여전히 군인들 중심으로 뭉쳐있다. 쉽게 무너질 집단이 아니다. 남한을 이용하여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는 이들은 지금은 많이 지쳐 있어 희망이 없으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그저 전쟁이나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발한다2- 북한 기독교인의 처절한 삶
성경공부 하다 잡혀가 간첩 누명까지

탈북자 윤혜경, 이봉녀, 김태진, 손정남 씨 등이 목격하고 들었던, 북한의 수용소에서 핍박당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언이다. 탈북했다가 중국에서 예수 믿고 다시 붙잡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북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김창만 씨(남, 42세)의 경우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 동포탄광 사로청 부위원장으로 지내다가 탈북 후 중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중국 공안에 의해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가 2000년 7월 1일 청진 수성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지금은 생사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라고 한다.

신강철 씨(남, 44세)도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 노동자구 출신으로 삼봉 노동자구 탄광 노동자로 지내다가 경제난으로 탈북한 뒤에 중국에서 몰래 성경을 공부하다가 발각되어 북한으로 끌려가 2002년 6월 10일 청진 수성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신 씨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에 자주 다니면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데 중국공안들이 급습해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었다. 그는 6개월간에 걸친 심문조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당당히 말했다고 한다. 현재 그가 살아 있다면 북한에서도 악명 높은 함경북도 청진시 수성 정치범 교화소에 수감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보자들에 의하면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선교사들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면서 다시금 북한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김미숙 씨(여, 28세)가 그런 경우이다. 그는 평안남도 남포시 출생으로 역시 탈북해 중국에서 몰래 성경을 공부하다가 발각되어 청진 수성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다가 쌀을 얻어 가려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 들어왔으나 중국공안원들의 감시가 심해 숨어 지냈다고 한다.

김 씨는 조선족이 거의 없고 동북지방보다 안전한 절강성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남한 선교사를 만나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절강성에 있는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북한에서 탈북한 동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 성경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하나님은 없다고 했고 김미숙 씨는 하나님은 존재하는 거룩한 분이라고 하며 언쟁을 했다고 한다. 이 날의 일로 인해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고 계속 교회에 다니는 김미숙 씨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던 그의 동료가 중국공안에 밀고했다. 그는 같은 탈북자의 밀고에 의해 공안에 잡힌 뒤 북한으로 북송되었고 오랜 기간 보위부의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도 하나님만을 믿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나와 중국에서 성경공부를 하다 발각되어 청진시 수성 교화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 김송혁 씨(남, 26세)는 간첩죄로 몰린 경우다.

김 씨는 1997년 탈북해 중국대륙을 떠돌다가 남한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교육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 선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비밀 아지트에서 또래 북한친구들과 함께 기독교 교육과 정보기관 훈련을 비밀리에 받았다고 한다.

훈련과정을 마치고 김 씨는 2001년 3월 미화 3000달러를 가지고 수 십 명의 또래 북한 친구들과 함께 각지의 고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가지고 간 달러 대부분을 부모에게 주고 자신은 일부 달러를 북한 돈으로 바꾸기 위해 인근 회령에 나갔다가 친구들의 밀고로 보위부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가 자고 있을 때 보위부가 김 씨를 덮쳤다. 그의 이모부가 온성군 보위부 반탐지도원을 한다는 점을 이용해 솔직히 말하면 다 용서한다는 보위부의 꾐에 넘어가 일체 모든 것을 자백했다고 한다. 자백내용도 보위부에서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보위부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를 간첩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형법 47조 조국반역죄와 반혁명 선전죄로 비밀재판을 받았다. 김 씨는 이 두 조항에 모두 적용돼 15년 형을 판결 받고 2002년 초에 청진 수성 교화소에 수감됐다. 그가 솔직히 자백하지 않고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고 버티었어도 간첩이라는 죄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그가 남한 정보부의 간첩이라는 것은 사실 그의 나이와 학력 등을 볼 때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기독교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북한 내부에 성경책을 들여보내기 위해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죄목에 남한 정보부를 적용시킨 것은 보위부가 성과를 올리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목사를 만났다는 탈북자 최주혁 씨의 증언도 관심을 끌었다. 최 씨는 현재 한의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다. 그가 북한에 있을 때 만난 이윤심 목사는 지금 살아 있으면 82세 정도 될 것이다.

이윤심 목사는 함경남도 금야군 용남리에서 1996년 10월 국가안전보위부에 체포·보위부감옥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이윤심 목사는 1996년 함남도기독교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당시 함경남도, 함경북도, 평남 황해남도, 자강도 평안북도까지 신자들을 망라하여 180명 정도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당시 최주혁 씨가 함남도 금야군병원의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윤심 목사는 만성위장염으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최 씨는 이 목사를 두고 “정직하고 정말 내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정이 많고 따스하신 분이다”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보위부의 끈질긴 추격과 정탐 활동 속에서 1996년 10월 체포되었다. 지하교회 신자들을 위해 단 한명에 대해서도 밀고하지 않고 순교했다. 최 씨는 이 목사가 키워낸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북한에 존재한다고 했다.

최 씨는 “현재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도인 목사와 중국과 한국의 목사들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며 “이 목사는 재산 하나 없이 빈 몸으로 평생을 예수님처럼 북한 땅을 다니시면서 전도하시다가 북한당국의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은 1953년 6.25 전쟁 휴전 후 1954-1970년 사이 북한 지역에서의 종교를 완전히 말살하였다. 그러므로 북한 지역에서 1954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어떤 종교도 접할 수 없었다는 것이 최주혁 씨의 증언이다.

북한 노동당이 반당 혁명분자로 체포한 기독교 등 각종 종교인 수는 20만 명에 달한다. 지금까지 신앙심을 포기하지 않은 기독교인은 수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투철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5천여 명은 지하군사기지 건설장과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끌려가 1970년대 초까지 대부분 고역으로 사망하였다.

위와 같은 종교 말살조치에 관하여 1980년 8월 평안북도 철산군 대화도에서 군사훈련 교육을 받은 탈북자 전 북한군 중위 임영선 씨가 증언했다.

그는 당시 그곳에서 50, 60 명의 나이 들고 병약한, 그러나 얼굴이 깨끗하고 밝은 표정의 노동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당시 연대장의 연설에 의하면 악질반동분자인 기독교인들로서 목사를 합하여 2천 명이 1950년대에 당시 무인도인 그곳으로 끌려와 거대한 지하군사시설을 위한 강제노역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심한 노역과 기근으로 사망하고 80년 당시 50~60 명 정도만 살아남았는데 후에 그들은 제18호 관리소라고 명명된 곳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2005년 10월 31일

양봉식 sunyang@amennews.com

교회와 신앙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요지부동인가?

'2006년 북한은 어디로?' 정치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선군정치를 시작한 지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북한' '김정일' '선군정치'라는 단어를 따로 분리해 사용하거나, '선군정치 없는 북한'을 상상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북한의 정치체제는 물론 북한의 일상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선군정치는 빼 놓을 수 없는 주제어로 자리를 굳혔다.

선군정치는 '새로운 정치방식'에서 '새로운 혁명이론'으로, 주체사상에 버금가는 '새로운 사상'으로 끊임없이 파생하며 확장해가고 있다. '주체사상 일색화'를 연상케 하는 '선군사상 일색화'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다. 선군정치가 민족공조, 한반도 평화, 세계 평화를 위한 책략이기도 하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선군정치는 북한만이 아닌 한반도 전반에 적용되는 전략이고 노선이자 이론으로 격상했다. 북한은 이같이 끊임없이 선군정치를 위한 법·제도 정비, 이론적 체계화를 진행했다. 그 결과, 선군정치는 마치 북한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 모든 이론과 노선, 정책을 설명할 수 있는 '메타언어' 처럼 되었다.

'선군정치'란 당에 대한 군의 우위를 뜻하는 게 아니다

▲ 선군정치란 군대를 단지 '조국방위의 수단'을 넘어 혁명 수호의 최고 보루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 EPA


김정일 위원장은 선군정치를 통해 북한을 그 뿌리부터 바꾸어 놓았고, 그래서 북한은 선군정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정말 선군정치는 요지부동인가? 김정일시대의 북한은 선군정치 말고 '다른 정치'를 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선군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 선군정치의 본질을 파악한다면, 선군정치가 왜 필요하고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해가 많이 풀렸지만, 한 때 남한 연구자들 사이에 선군정치로 인해 군대의 위상이 조선로동당과 버금가거나 그보다 높아져 당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기존의 당-군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온 것처럼 믿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선군정치로 인해 북한정치구조가 변한 것은 거의 없다. 선군정치는 북한정치 구조의 변화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선군정치는 그 동안 그래 왔듯이 군대를 당의 유용한 도구로 남아 있도록 하고, 나아가 그 도구성을 더욱 벼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의 정의는 이렇다.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며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 위업 전반을 밀고 나가는 정치이다." 군사선행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을 한다는 것은 군을 단지 전쟁의 수단, 조국방위 수단으로가 아니라, 조국수호와 혁명과 경제건설을 다같이 통일적으로 담당하여 수행해 나가게 하고 인민군의 정치사상적, 도덕적 우월성, 혁명성, 전투력에 의거해 전국 전당 전민을 혁명적 앙양에로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 정의에서 핵심개념이 바로 '혁명의 주력군'이다. 이는 군대를 단지 '전쟁의 수단', '조국방위 수단'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혁명 수호의 최고 보루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조국방위ㆍ정권안보ㆍ혁명수행에 군을 제1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의미

그러면 왜 혁명수호를 군대에 의존하는가? 이는 선군정치의 기본 정신이 '혁명적 군인정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혁명적 군인정신'이란 수령과 당의 지시라면 산악도 옮기고, 바다도 메우는 군대의 투철한 명령관철의 정신이다. 당이 제시한 과업이라면 군대는 당의 가장 충실한 도구로서 변명 없이 목숨 걸고 관철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 정신에 반영되어 있다. 정권을 위협하는 반체제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이 명령을 내리면 즉각 동원돼 총을 쏠 수 있는 '믿을 만한 군대'의 유지. 이것이 바로 선군정치의 본질이다. 동유럽사회주의 국가의 군대처럼 유사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군대'가 아닌 '정치화된 군대', 이것이 선군정치의 목적이다.

물론 '군대의 정치화'란 군대의 정치적 개입 및 영향력의 강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군이 당과 일체화되어 당의 지시를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에서의 정치화이다. 선군정치를 위한 법과 제도, 이론과 정책의 거품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바로 이런 '총대철학'이다.

▲ '정치화된 군대'란 군대의 정치적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군대의 유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EPA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초에 이르는 불과 수년 사이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완전히 붕괴된 것을 목격한 김정일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런 선군정치이다. 김정일은 군대를 틀어쥐지 않고는 반혁명을 진압하고,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들의 반사회주의 책동"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최소한 북미관계 정상화까지는 계속된다

이쯤해서 앞에서 제기했던, '선군정치는 계속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제 우리는 수월하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선군정치가 흔들릴 것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혁명의 수호' 혹은 안보위협이다. 북한이 군대가 나서지 않으면 혁명을 수호할 수 없거나 안보 위협이 있다고 느끼는 한 선군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군대 없이도 혁명수호가 가능하고 안보위협 요소가 사라진다면 순간 선군정치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북한도 선군정치가 끝나는 시점은 북한을 위협하는 제국주의가 영원히 사라질 때라고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북핵문제가 타결된다 해도 선군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북핵문제외에 북한인권, 마약, 위조지폐, 미사일, 재래식무기 문제 등을 해결해야 북미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이런 현안들이 모두 해소되지 않는 한, 미국이 "동북아 지역을 자기 세력권에 넣고 세계에 대한 패권적 지배를 위해 조선을 기본 과녁"으로 삼고 있다고 북한이 믿는한 미국은 북한에게 제국주의 세력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따라서 선군정치 역시 요지부동일 것이다.

그러나 안보위협은 하나의 사실이기 이전에 인식의 문제이고, 정도의 문제이다. 안보위협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이고, 그래서 선군정치를 끝내기에 적절한 시점이 언제인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 김정일 위원장의 군부대를 방문해 현지지도하고 있다. ⓒ EPA


이 질문의 난점은 또 있다. 이 질문은 선군정치와 비(非)선군정치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과연 그 구분이 가능한가? 국방위원회라는 기구의 위상이 한 단계 격상된 것을 선군정치의 주요한 특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선군정치와 비선군정치의 경계선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당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국방위원회라는 헌법상의 기구가 갖는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선군정치의 다른 특징은 김정일 위원장의 군부대 중심 현지지도다. 그러나 군부대 현지지도는 미국의 위협이 높아지면 빈도가 잦고, 위협이 낮아지면 빈도가 떨어지는 등 정세 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다. 선군정치 시대라고 해서 항상 군부대 현지지도의 비율이 높은 것은 아니다. 선군정치를 군부대 현지지도의 비율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임의적이다.

대신 당조직의 정상 운영 여부를 기준으로 고려할 수 있다. 당대회 및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정기적 개최등 당조직의 정상 가동은 선군정치의 종언과 일치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군정치는 당우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당조직이 정상화될 때 선군정치의 빛이 바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군정치가 끝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어차피 선군정치는 당-군관계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군정치인가'이다

이렇게 양파껍질 벗기듯이 하나하나 벗기다 보면 선군정치라는 정치적 상징만 남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사실 선군정치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포괄할 수 있는 매우 큰 그릇이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적 지향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군부세력의 강경한 목소리가 반영돼 대내외 정책이 강경 일변도로 갈 수도 있다. 그 반대인 개혁 개방의 길로도 갈 수 있다. 북한은 체제안정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개혁 개방을 추구할 가능성이 없지만, 선군정치를 통해 체제안정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다면 선군정치 하에서 개혁 개방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군정치는 오히려 개혁 개방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선군정치 아래에서도 여러 가지 하위의 정치방식과 정책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군정치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막연한 것이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선군정치가 어떤 뚜렷한 노선과 정책을 지향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노선과 정책지향을 갖고 있는 선군정치인가 하는 등의 구체적인 논의를 하지 않으면 공허해지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은 이미 김정일의 모든 통치 방식을 선군정치로 명명하고 있다. 이제는 '어떤 선군정치인가'라고 묻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 질문에 별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총대'이지 '선군정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6-06-16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ㆍ국제담당 에디터

 


 

 김정일과 ‘2·16’ 놀음…‘666’의 비밀은?

"백두산 봉우리 216개"…생일마다 '신비현상' 주장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은 북한의 가장 큰 명절이다.

수령우상화와 신격화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은 최고지도자인 김정일의 생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독재 찬양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김정일의 탄생에 관련된 것은 김정일의 출생지는 백두산 밀영(실제 출생지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이고, 출생 당시 빨치산들의 존경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등으로 김정일 일가의 혁명역사를 신비화하기 위해 철저히 조작되어 있다.

특히 김정일 생일인 216이란 숫자는 북한에서 다양한 형태의 ‘수령우상화’에 이용되고 있다.

◆ 충성의 상징… 216 번호판 벤츠 자동차

김정일은 측근들에게 벤츠나 BMW 등 고급승용차에 ‘216-0000’ 번호를 달아 선물한다. 김정일은 차값을 금괴로 결재한 벤츠사의 최고 고객중 한 명이다.

이 번호판이 없으면 김정일의 처소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고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증언했다. 216으로 시작하는 번호판을 단 벤츠 자동차는 김정일의 측근, 북한의 최고위층을 의미한다.

또한 김정일 일가의 전용 비행기는 ‘216호’라고 부른다. 216호 기내에는 넓은 라운지와 개인 방도 몇 개 있다. 평양공항의 일반 터미널 반대쪽에 216호 전용 터미널이 위치해 있다.

◆ 정일봉에는 2월 16일마다 이상한 신비현상?

‘정일봉’은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백두산 밀영 귀틀집 뒤에 있는 산봉우리. 김일성이 김정일의 출생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백두산에서 경치가 좋은 곳을 직접 찾아내 ‘밀영지’로 정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북한 당국은 ‘정일봉’과 ‘귀틀집’ 사이(고도 차이)가 216m이며, 정일봉의 높이는 216m 42cm라고 선전하고 있다. 42cm는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해인 1942년을 뜻한다.

그 뒤에 거대한 바위에 엄청나게 큰 글씨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큰 공사를 진행했다. 북한에서는 이 바위의 무게를 ‘216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정일의 50회 생일날 ‘정일봉에서 제비 216 마리가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관이 펼쳐졌다’는 등 김정일의 생일마다 정일봉을 둘러싼 신비화 선전도 벌이고 있다.

북한은 또 백두산 천지와 그 일대에 대한 측량조사를 한 결과 ‘20m 이상 되는 봉우리’가 216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 216으로 시작하는 번호판을 단 벤츠승용차(좌), 김일성이 김정일의 50회 생일(1992)에 직접 지었다는 송시(가운데), 금수산기념궁전 광장

◆ 건축물은 우상화의 최고봉

216과 연관된 대표적인 구조물은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이다. 금수산기념궁전은 김일성 생전에는 금수산의사당 또는 주석궁으로 불리면서 김일성의 집무실 및 거처로 쓰였다.

기념궁전 앞에는 김일성 광장의 두 배에 달하는 대형광장이 있는데 이 광장의 폭이 415m, 길이가 216m라고 한다. 4월 15일은 김일성의 생일이다.

이외에도 평양에 있는 노동당 기념비는 216개의 돌로 만든 원형의 구조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기념비의 지름은 42m이다.

평안남도 연풍호를 굽어보는 철석봉 기슭에는 송암동굴(평남 개천시 서남동)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지난 60년대 중반 발견돼 2004년 개방된 이 동굴의 관광코스도 총 2160m다.

◆ 666에 얽힌 비밀

1999년 7월 6일 북한 노동신문은 ‘위인전설 666’이라는 논평을 통해 “6을 세 번 곱하면 216, 즉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이 나오고, 북한이 조선반도에서 6번째로 세워진 국체(國體)“라고 밝혔다.

김정일은 1998년 7월 최고인민회의 10기 대의원 선거 당시 666호 선거구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666은 기독교의 성서(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악마의 숫자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북한은 216의 21은 21세기를, 6은 ‘조선민족이 세운 여섯 번째의 나라, 사회주의 노선’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김정일 영도자께서 21세기 통일된 조선을 이끄실 태양이심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일은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는 649선거구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북한 기관지 민주조선은 ‘649’가 “무심히 대할 수 없는 숫자”라며 “6, 4, 9 세 숫자를 곱하면 216이며, 거꾸로 9와 4를 곱한 뒤(36) 6을 더하면 42란 숫자가 된다”고 밝혔다.

[양정아 기자]

2007-02-16

데일리NK

 


 

“북한의 1000여개 지하교회에 13만5000여명의 신자 활동 중”

 6ㆍ25 전쟁이 끝난 후부터 현재까지 최소 1만5000명의 북한 기독교인이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사실이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 李盤石(이반석) 목사의 논문을 통해 밝혀졌다.
 
  <북한 지하교회의 존재에 대한 선교학적 이해>란 제목의 이 논문은 1953년부터 2006년까지 발표된 관련 문헌과 국방부 자료, 증언 등을 종합한 결과 총 1만5657명의 북한 지하교인이 정권에 의해 ‘순교’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논문은 9월말 미국 선교학회를 통해 발표될 예정이다.
 
  그동안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의 공개처형 소식은 몇 차례 보도됐지만, 사례를 종합해 학술논문으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논문의 저자인 이반석 목사는 “1만5657명이란 숫자는 기록으로 드러난 사례만 합산한 것”이라면서 “실제 순교자 수는 그보다 두 배 정도인 3만여명으로 예측된다”고 했다. 1958년 ‘중앙당집중지도사업’을 비롯해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처형 사례가 상당수에 이른다는 분석이다.
 
  10년 동안 진행된 연구 과정에서 약 120권 분량의 문헌 자료가 수집됐고, 그 가운데 761건의 순교 사례가 정리됐다.
 
  1996년 12월, 月刊朝鮮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 100여개의 지하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손자에게 고발당해 순교한 신자, 성경 밀수하다 총살당한 사례, 라디오 부품 조립해 한국 방송을 듣는 신자 등 그동안 ‘지하’에서만 존재하던 북한 지하교회의 현실이 이 기사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탈북자들의 증언과 관련 보도가 이어졌지만, 지금도 일부 북한 전문가와 기독교계 인사들은 지하교회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한 탈북자는 지하교회가 없다고 주장하는 북한 보위부 출신 탈북자의 주장에 대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못 본 것일 뿐”이라며 “북한 전역에 수많은 지하교회들이 핍박 속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논문의 저자는 “현재 북한 지하교회 신도가 약 13만5000명에 이르며, 1000개 이상의 지하교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논문은 戰後(전후) 북한 기독교의 역사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눈다. 1953년부터 1972년까지는 교회말살 정책이 시작되고 지하교회가 조직된 시기로, 이 기간 동안 최소 1만897명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1958년 시작된 중앙당 집중지도사업 이후 거의 모든 종교가 자취를 감췄다. 전문가들은 당시 약 3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평안북도에서만 최소 9444명 희생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 동상 앞에서 참배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 美 국무부는 북한을 2001년부터 7년 연속 ‘종교자유탄압 특별관심국’으로 지목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는 지하교회가 수난을 당한 시기다. 299명이 처형당하는 동안 지하교회는 더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1988년 이후 7년 동안 순교자 수는 두 배 이상 증가해 741명에 이른다. 그중 427명이 네트워크 조직으로 적발됐다. 논문은 이를 지하교회의 再(재)성장이 시작된 것으로 해석했다. 1995년부터 북한 지하교회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교인 수가 크게 늘어났고, 순교자 수가 동시에 증가했다. 기록에 의하면 최소 3720명이 이 기간 중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희생됐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적발된 지하교인들은 대부분 잔인하게 처형됐다. 1973년 11월 30일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벌어진 공개처형 현장에 대한 탈북자의 증언이다.
 
  “안전원들이 달려들어 세 명의 노인들을 끌어다 철판 위에 눕히고 머리를 압축판 쪽으로 밀어 넣었다. 군중에서 선동적 외침이 나왔다. ‘저 인간쓰레기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라!… 작동 구령과 함께 25t급 프레스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압축판이 노인들의 머리를 향해 조여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두개골 터지는 소리와 함께 뇌수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논문은 지역별 순교자 통계를 통해 북한 지하교회가 전국에 퍼져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적발된 곳은 평안북도, 총 9444명이 처형됐다. 이 중 9185명이 1953년과 1972년 사이에 처형됐는데, 1958년 ‘중앙당 집중지도’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분석된다.
 
  함경북도의 경우 32명에 불과했던 순교자가 1995년 이후 2111명으로 증가했다. 중국 접경지역을 통해 기독교가 유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평균 150명 단위의 ‘네트워크’ 규모로 적발된 수가 131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볼 때, 지하교회의 조직화가 상당히 진전됐음을 알 수 있다.
 
  지하교회 네트워크는 현재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논문은 희생된 지하교인들의 조직 형태를 크게 4가지로 분류했다. 개인과 가족, 그룹, 네트워크다. 그룹은 4~8명 정도가 모인 신앙조직을 말하고, 이러한 그룹들이 서로 연결돼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지금까지 총 209명이 개인으로 적발됐다. 가족단위로 희생된 사람은 143명이다. 그룹과 네트워크로 적발돼 집단 처형된 지하교인은 각각 6677명과 8628명이다.
 
 
 
지하교회, 1995년을 기점으로 급속 성장
 

평양 봉수교회 예배 광경. 북한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국내외 북한전문가들은 서방국가와 남한의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교인 수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조직규모도 함께 성장했다. 1995년 이후 통계를 보면 그룹의 평균 인원은 10.3명. 네트워크는 150명이다. 지금까지 최대 규모로 알려진 네트워크는 적발된 신자 수만 2000명을 넘어섰다.
 
  논문은 “주민감시구조가 엄중한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일부 남한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장에 대해 “네트워크 조직으로 순교된 수많은 사례들이 북한 지하교회의 존재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며 반박했다.
 
  북한의 기독교 전파는 주로 가족과 知人(지인)들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총 3710명의 북한 지하교인들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를 분석한 결과, 개인 전도가 1750명으로 가장 많았고, 두 번째는 부모로부터 전도(1358명)였다. 1945년 이전부터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들이 177명에 이르고, 탈북자들에 의한 전도는 338명이다. 그 외 공식 국외 여행, 라디오, 비디오, 성경책 직접 계시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은 특히 ‘1995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지하교회의 형태와 운영 방식 등 모든 체제가 급변했다. 1995년 이전에는 6·25 전부터 신앙을 지켜온 高(고)연령층이 지하교회의 주축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족과 친척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했다.
 
  1995년 이후 중국을 공식·비공식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40대 미만의 ‘젊은 세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절대적 폐쇄’보다는 가능한 수준의 개방을 통해 이전보다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하교회의 빠른 성장과 네트워크 단위로 적발되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 모두 세대 교체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논문에 따르면,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개최된 ‘남북기독자협의회’에서 남북 기독교 대표자들은 조국이 독립한 지 50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했다. 희년이란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선포해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되고, 가난한 자의 빚은 탕감되는 해를 말한다. 논문은 선교학적 관점에서 1995년이 남북 기독교의 희년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북한의 ‘공식적’ 기독교 인구는 1만2000여명이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은 “북한에 현재 517개의 가정교회가 있으며, 19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우릴 향해 부르짖고 있다”
 
  북한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북한 헌법 제5장 68조 내용이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국내외 대북 전문가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柳錫烈(유석렬) 前(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조그련 위원장인 姜永燮(강영섭) 목사는 해방 이후 기독교 탄압에 앞장 선 인물”이라며 “조그련은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설파해 한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선교기금을 지원 받으려 한다”고 했다.
 
  국제 기독교 단체인 ‘오픈 도어즈 인터내셔널’의 아시아 책임자 첼링 씨는 “북한에 현재 최소 10만에서 최대 40만에 이르는 지하교회 신자들이 존재한다”며 “이들 중 수만명이 지금도 강제수용소에서 고통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재 북한 기독교 인구를 약 1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美(미) 국무부는 북한을 중국·이란·미얀마·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2001년부터 7년 연속 ‘종교자유탄압 특별관심국’으로 지목했다. 한국 통일연구원이 펴낸 <북한 인권백서 2007>은 “북한에서 종교를 전파하는 행위는 중범죄로 분류돼 가족 전체가 정치범 수용소에 가거나 공개 처형된다”며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지하교인 집단총살은 최근까지 자행되고 있다. 미래한국신문 보도에 따르면 2005년 4월 기독교 라디오방송을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남포시 주민 102명이 한꺼번에 적발돼 40명은 총살됐고, 62명은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 15관리소로 보내졌다.
 
  탈북자들은 끊임없이 북한 지하교회의 수난을 호소하고 있다. 李民馥(이민복) 기독북한인연합 대표는 1995년 탈북난민 1호로 남한에 왔다. 그는 “지하교회가 진짜 교회고 북한에서 선전하는 교회는 가짜”라면서 “왜 남한 기독교계가 가짜 교회에 지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탈북하기 전 북한에서 기독교와 무속신앙 등 종교 활동의 흔적을 수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1967년, 제가 11살 때였습니다. 평양에 대홍수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겼어요. 그때 15년 가까이 하수도에 숨어 모임을 가졌던 ‘악질반동’들이 발각돼 처형당했습니다. 처형 현장을 다녀온 어른들이 ‘산보 가듯 밝은 얼굴로 죽었다’며 ‘공산당을 위해 죽을 각오를 가졌다는 사람들보다 더 정신력이 강해 보였다’고 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들이 지하교인이라는 걸 알았죠.”
 
  유석렬 전 교수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라고 했다. 對北(대북) 선교사인 이삭 목사는 “오늘도 북한 지하교인들은 ‘우리 여기 있어요,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대한민국을 향해 부르짖고 있다”고 말했다.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조선노동당 주민통제 어떻게 하고있나?


▲조선노동당의 혁명을 설명하는 선전구호판


북한 조선노동당은 당원과 비당원을 포함해 고위층에서부터 일반 주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생활을 장악하고 통제한다.

노동당이 국가 위에 군림하면서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국가의 헌법이나 형법이 아닌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10대원칙)’이다.

노동당이 주민들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도구로 삼고 있는 ‘10대원칙’은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죽을 때까지 그 내용을 암기하고 학교, 직장, 가정에서 준수해야 한다.

‘10대원칙’은 김정일이 노동당 조직비서 업무를 수행하며 작성을 주도했으며, 1974년 2월에 북한 전역에 공표됐다.

김정일은 ‘10대원칙’을 기반으로 북한 주민의 하루 일과와 밀접히 연관된 생활과 행동을 규범으로 정해 놓았다.

당 생활 총화를 통한 감시 통제

당 생활 총화는 노동당이 당원들의 모든 업무수행과 사생활을 감사하는데 가장 전형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10대원칙’ 8조 5항에 보면 “2일 및 주 당 생활총화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수령님의 교시와 당 정책을 척도로 자기의 사업과 생활을 높은 정치사상적 수준에서 검토총화하며 비판의 방법으로 사상투쟁을 전개하며 사상투쟁을 통하여 자신을 혁명적으로 단련하고 끊임없이 개조해 나가야 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북한에서의 생활총화란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업무수행과 개인생활, 모든 말과 행동, 사고방식 등에서 나타난 결함들과 과오들을 솔직히 털어놓고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진행하는 일종의 회의다.

이런 생활총화는 주(週)․월(月)별로 생활 총화를 진행하고 3개월에 한번 씩은 분기별 총화를 진행한다.

총화에서는 자기의 과오를 숨기거나 축소하려고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시 준비를 하거나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2006년 입국한 탈북자 김 모씨는 “대수롭지 않은 결함까지도 크게 잘못한 마냥 과장하여 눈물을 흘리며 크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총화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분기 당 총화는 보통 반나절 혹은 하루 종일 진행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특히 총화를 통한 상호 비판이 끝나고 나면 상급 당회의 지도간부가 김정일이나 중앙당 조직 지도부의 비준을 거친 결론을 발표한다.

한국의 판결문과 비슷한 이 결론문은 경고, 엄중경고, 자격정지 등의 비교적 가벼운 벌을 받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한 달 혹은 수개월 동안 탄광이나 농촌에서 무보수노동, 강직, 직위해제, 지방추방, 보위부이관 등 중벌이 내려지거나, 구속 기소돼 노동단련형이나 교화형을 받기도 한다.

각종 지도와 학습을 통한 감시체계

노동당은 주민들에게 각종 학습과 교양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들을 세뇌시켜 감시와 통제를 진행하고 있다.

‘10대원칙’ 4조 5항을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 사상을 배우는 학습회, 강연회, 강습을 비롯한 집체학습에 빠짐없이 성실히 참가하며 매일 2시간 이상 학습하는 규율을 철저히 확립하며 학습을 생활화, 습성화하고 학습을 태만하거나 방해하는 현상을 반대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특히 매주 토요일마다 전당적으로 진행하는 토요학습과 강연회, 영화문헌학습은 철저히 선전선동부의 계획과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북한주민 세뇌교육의 가장 기본적이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주민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세뇌교육 방법은 문답식 학습경연이다.

문답식 학습강연은 체육대회처럼 예선, 준결승, 결승까지 치르며 모든 간부와 당원, 주민들은 선전선동부에서 내려 보낸 1백 페이지가 넘는 ‘문답식 학습제강’을 받침하나 틀리지 않고 완전히 통달해야 한다.

이 ‘문답식 학습제강’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각종 노작들과 ‘당의유일사상체계확립의10대원칙’을 포함하여 주체사상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 김(金)부자의 위대성과 덕성을 찬양한 자료들, 김(金)부자 찬양내용의 각종 시, 노래들을 문제별로 수록하고 있다.

최종결승에서 이긴 단체와 개인에게는 TV등 선물과 표창이 따르지만 경연에서 패한 단체들은 자체 사상투쟁을 벌이고 선수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상학습을 게을리 했다는 이유로 소속단체와 당조직의 비판 대상이 된다.

각종단체조직을 통한 주민통제


▲계급 교양을 받고있는 북한여성들


북한에서는 노동당원들을 제외한 모든 비당원들은 의무적으로 다양한 노동당 외곽조직들에 포함돼 당의 지도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

노동당 외곽단체로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 직업총동맹(직맹), 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 민주여성동맹(여맹), 소년단 등이 있다.

청년동맹은 북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이 적극적인 정치조직이며 모든 노동청년, 학생, 군인들 중 비당원 들이 망라되어 있는 유일한 청년조직이다.

청년동맹은 모든 청소년들의 사상교양과 조직생활에 대한 통제를 통해 세대교체에 따르는 주민의식 변화를 철저히 차단하며 생산과 건설, 군복무에서 청년들의 돌격대적 역할 보장을 위한 각종 동원의 조직자적 역할을 한다.

청년동맹은 학생, 청년들 속에서 그 어떤 반체제적인 결사(結社)나 행동의 요소도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하고 있다.

청년동맹원들 중 나이가 30세 정도에 이르러 당에 입당하지 못한 노동자와 하급 관리들의 경우 직맹에, 농촌청년의 경우 농근맹, 가정주부의 경우 여맹에 가입해야 한다.

이런 근로단체들에 대한 지도는 노동당 당중앙위원회와 그 산하의 각급 당위원회들의 근로단체 사업부가 주관한다.

또한 북한의 모든 기관, 기업소, 단체들 내의 초급당 위원회들과 당세포들은 같은 기관이나 부문내의 근로단체 말단조직들과 근로단체성원들의 생활과 업무활동을 지도,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모든 비당원들은 자기가 속한 근로단체조직의 지도통제와 함께 자기가 근무하는 기관이나 부문의 당조직의 이중적인 지도통제를 받게 된다.

조선노동당 63년의 세월은 이처럼 북한주민들에 대한 철통같은 통제와 감시를 통해 김일성-김정일 개인독재의 중추를 형성해왔던 ‘오욕’의 역사였다

2008-10-08

 


 

 국방위원 장성택, 후계구도 징검다리 놓나?

 

 

두 번이나 강등됐다 되살아난 장성택 부장

김정일 3기 체제가 닻을 올렸다. ‘북한호’ 김정일 선장을 보조할 항해사의 면면도 드러났다. 바로 최고 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 위원들이다. 국방위원회는 김정일 위원장이 전면에 등장한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이후 최고 권력기관으로 격상됐다. 4월9일 열린 12기 최고인민회의 첫 회의에서 종전에 9명이었던 국방위원이 13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4월5일 광명성 2호 발사에 공헌한 주규창 노동당 중앙위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을 비롯해 김 위원장의 최측근인 김정각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 주상성 인민보안상,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수석부부장이 새로 진입했다.

하지만 새로 선임된 국방위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다. 그는 지난해 김정일 위원장 와병 중에 ‘대리 통치’를 한 것으로 전해진, 명실상부한 ‘넘버 투’이다. 최근 김 위원장의 현지 지도를 수행한 횟수만 보더라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장 부장은 2007년 4차례, 2008년 14차례 김 위원장을 수행했지만, 지난 3월까지 올해에만 무려 19차례나 김 위원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했다. 권력의 바로미터나 다름없는 그림자 보좌가 눈에 띄게 늘어난 셈이다.

김 위원장이 장 부장을 국방위원에 깜짝 발탁한 이유는 ‘양수겸장’을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자기 권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후계 구도까지 직접 짜겠다는 포석이라 보고 있다. 후계 구도와 관련해 자신의 구상에 따라 설계와 건축을 맡을 일꾼들로 국방위원회를 채웠다는 분석이다.

장 부장과 김 위원장은 알려진 대로 처남·매제 사이다. 장 부장은 김 위원장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경희 노동당 중앙위 경공업부장의 남편이다. 두 사람은 ‘로열 패밀리’보다 더 끈끈한 특수 관계이기도 하다. 197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 수업을 받던 시절부터 장 부장은 김 위원장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기사회생 장성택, 승승장구


하지만 그는 두 번이나 김 위원장한테 강등당하며 위기를 겪었다. 1978년과 2004년 쓴 잔을 마셨다. 두 번 다 장성택의 큰 씀씀이와 잡기에 능한 성미에다 호방한 기질에 따른 권력욕이 빌미를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1978년 당시 장성택은 외교부 간부들과 김정일식 파티를 흉내 내다 남포시 소재의 강선제강소로 쫓겨나 2년간 노동자로 일하며 근신했다. 2004년에도 그는 탄탄대로를 걷다, 갑자기 공식석상에 사라졌다. 이때도 결정적인 단초는 자기 측근들이 연루된 호화결혼식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그의 큰 씀씀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장성택의 권력 독식론’이 퍼지면서 정리 작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가 당의 인사와 조직을 한손에 쥔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오래 지내면서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거나, 반대로 권력 풍향계에 민감한 인사들이 그를 알아서 따르면서 독식론이 제기됐다. 여기에 김 위원장의 부인이자 정철·정운의 어머니 고영희 그룹과 장성택에 맞서는 이른바 초당주의자들이 연합을 이뤄 그를 견제하면서 한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1년10개월가량 사실상 권력 핵심에서 배제된 생활을 한 뒤, 2006년 1월 당 중앙위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이듬해 12월 당 중앙위 부장으로 승진하며 기사회생해 넘버 투로 급부상했다. 분파주의자로까지 몰렸던 그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김 위원장의 결단과 장 부장 자신의 마음 비우기 덕분이었다.

장 부장의 복귀 당시 권력 주변에서 반대 의견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자신의 의중을 꿰뚫고 추진력을 발휘해 밀고 나갈 만한 인물이 없어 통 큰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장성택 부장이 복귀한 뒤 맡은 첫 임무만 보아도 김 위원장의 두터운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그해 자신이 직접 둘러본 중국의 광저우 선전 등 남부 개혁·개방 중심도시를 그에게 답사하게 했다.

또 다른 배경은 2004년 그가 강등된 뒤 마음을 정리했다는 풀이도 나온다. 그는 군에서도 인맥이 두껍다. 게다가 그의 첫째 형 장성우는 북한 인민군 차수이다. 그래서 한때 자신이 직접 권력을 넘겨받은 ‘킹’을 꿈꾸기도 했지만, 강등과 복귀의 부침 과정에서 ‘킹 메이커’로 마음을 비우면서 김 위원장의 신임을 회복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지난해 김 위원장의 건강 악화로 빚어진 권력 공백기 때 그가 대리 통치를 한 것도 이런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는 해석이다.

후계자는 누구?


그렇다면 이제 관심은 마음을 비운 그가 김 위원장의 의중을 꿰뚫고 과연 후계자 가운데 누구와 손을 잡느냐로 모아진다. 김 위원장과 성혜림 사이에 난 첫째 정남이거나, 김 위원장과 고영희 사이에 난 둘째 정철이나 막내 정운 가운데 한 명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의 딸 설송도 후계자 그룹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설송이나 건강이 좋지 않은 정철보다는 정남과 정운으로 후계자 구도가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는 데 이론이 없다. 

 

 

북한은 지난 4월8일 김정일 3기 체제 출범을 앞두고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10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명성 2호 발사를 축하했다.

장 부장은 애초 둘 가운데 김정남을 후계자로 민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소식통들을 통해 국내에는 중국이 김정남-장성택 구도를 선호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면서 지난해 김정일 와병 상태에서 한동안 장성택-김정남이 공동 통치했다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 1월 이 구도가 바뀌었다는 첩보가 잇따랐다. 장 부장이 자신을 견제하던 김정운을 후계자로 추천하고 그가 낙점을 받는 데 공헌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김 위원장의 넷째 부인으로 알려진 김옥도 가세해 정운의 후계자 지목을 거들었다는 정보도 더해졌다. 이에 대해 국책기관의 한 관계자는 “지금 단계에서는 (후계자가) 누구라고 속단할 수 없다. 김정운이 가능성이 높지만, 중요한 건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국책기관 관계자는 “누가 지목되든, 김정일 위원장보다 더 정통성이 약하기에 집단지도체제가 지속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이런 분석은 김정일 위원장이 걸어온 길과 비교해보면 일리가 있다. 김 위원장은 1972년부터 후계자 수업을 시작해 사실상 20년 뒤에나 정권을 넘겨받았다. 지금은 포스트 김정일 체제를 마련할 시간이 넉넉지 않다. 게다가 김 위원장이 지난해 건강 이상을 한 차례 겪은 뒤라 후계 구도 마련을 더 늦출 수 없다. 후계자 조기 가시화 이후 집단지도체제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김 위원장이 넘버 투인 장성택을 국방위원회에 끌어들인 것도 취약한 후계자를 뒷받침하는 버팀목으로 삼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언제쯤 후계 구도가 가시화할 것인가? 지난 3월8일 3기 체제를 뒷받침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내 언론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후계자 가운데 한 명이 대의원에 뽑힐 것이라는 보도가 많았다. 이른바 김정운 대의원설이 그것이다. 정운이 대의원으로 전격 부상하면서 후계자로 지목될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무색했다. 별일 없이 치러졌다. 11기 대의원 교체 비율인 50%와 비교해보면 12기 전체 687명 가운데 46%가 바뀌어 큰 변화도 없었다.

대의원 면면도 신진 세력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세대별로 노장청과 권력 집단에서 당·정·군, 친위 그룹인 측근 그룹, 그리고 친인척 그룹이 골고루 포진했다. 이번 대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건강이상설을 털어내고 김 위원장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선거로 요약된다. 물론 353호와 454호, 682호 선거구 3곳에서 각각 선출되었다는 ‘김철’ 등 ‘뉴페이스’를 두고 물음표를 달기도 한다. 국책기관의 한 관계자는 “대의원 명단을 보면 확인이 안 되는 인물들이 새로 등장하는데, 이 점 때문에 후계 구도와 관련해 3기 체제를 이끌어갈 대의원 변화가 아주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후계 구도 가시화는 북한이 내세우는 구호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2012년을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선포했다. 이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로 정치사상 강국·군사 강국을 달성했고, 이제 경제 강국만 이루면 된다고 강조한다. 2012년 수령의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으며 주체사상이 최고조로 발현된 강성대국의 원년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올해 후계체제 준비 단계를 거쳐 내년에 구축 단계, 2012년에는 공고화 단계로 들어설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3월21일 평양 금수산 기념궁전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군 전초병 열성자 대회에 참석했다(사진).

4월5일 발사된 광명성 2호도 이런 후계 구도의 길을 닦는 선전 도구로 활용할 공산도 없지 않다. 굳이 발사일을 4월5일로 잡은 것도 김정일 3기 체제 시작을 극대화하는 축포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 광명성 1호가 발사된 1998년에도 그랬다. 1998년 8월31일 북한은 광명성 1호를 쏘아올린 나흘 뒤인 9월4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를 열었고, 바로 다음 날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국방위원장에 앉았다. 김정일 1기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 서막을 그들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한 광명성 1호가 장식한 것이다. 이번에도 축포가 쏘아올려진 나흘 뒤인 4월9일 김정일 3기 체제가 공식 출범했다.

2012년 후계구도 마무리?

물론 1998년이나 지금이나 광명성은 체제 안정화를 노린 대내용이고, 단번에 북·미 관계를 돌파하기 위한 협상용에다, 이란 등에 미사일 세일즈를 노린 판촉용 성격까지 띠고 있는 다목적 카드다. 여기에 광명성 2호 발사에 보이지 않는 공헌자로 후계자를 슬쩍 끼워넣어 후계자 선전용 카드로 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미 북한은 이번 로켓 발사를 “강성대국의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우리 심장을 쾅쾅 울려주는 소식이다”라며 선전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장성택 부장의 진입으로 주목받는 국방위원회가, 후계자 만들기가 아닌 김 위원장의 권력 누수를 막는 차원의 관리에만 그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견해도 나온다. 고난의 행군을 끝냈다고 하지만 김정일 3기 체제 아래 경제 상황이 호전되지 않을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자원 배분권을 김 위원장이 놓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남북협력연구센터 소장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북한 경제는 위에서 아래까지 약탈경제로 바뀌었다. 체제 유지 자체가  자원 배분권에서 나오는데 김 위원장이 자신이 쥐고 있는 분배권을 넘길 후계자를 당장 지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04월 13일

고제규 기자 unjusa@sisain.co.kr

시사인

 


 

 정부, 北 정치범수용소 위치-인원-실태 첫 공식 확인

 

북한이 평남 개천을 비롯한 6곳에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면서 정치범 15만4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정부가 16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에게 제출한 ‘북한 정치범수용소 현황’ 보고서에서 확인됐다. 북한의 대표적인 인권 유린 지역으로 알려진 정치범 수용소의 세부 현황이 정부 차원에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실태에 대해 2005년 이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지만 남북관계 악화 등을 우려해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밝힌 수용소 위치와 현재 수용인원은 △평남 개천(14호·1만5000명 수용) △함남 요덕(15호·5만 명) △함북 화성(16호·1만5000명) △평남 북창(18호·1만9000명) △함북 회령(22호·5만 명) △함북 청진(25호·5000명) 등이다. 수용소는 번호와 함께 관리소로 불린다. 평남 개천 수용소를 ‘14 관리소’로 부르는 식이다.

이 가운데 요덕 수용소는 일정 기간을 거쳐 심사 후 출소할 수 있는 ‘혁명화 구역’과 사망할 때까지 종신 수용되는 ‘완전통제구역’으로 분리 운영되고 있다. 나머지 5곳은 모두 종신 수감 시설이다. 북한은 2000년 이전까지 총 10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용했지만 △평북 천마(11호) △함남 단천(21호) △함남 덕성(23호) △자강 동신(24호) 등 4곳을 폐쇄했다고 정부는 밝혔다.

정치범들은 주로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밀려난 고위층이나 반체제 인사, 탈북자 등이지만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모욕하거나 단순한 말실수를 한 일반 주민도 다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정부는 파악했다. 수감 절차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주관하며 재판 없이 동행 명령에 의해 끌려간다. 일반 주민의 경우 정보원의 신고로 반동분자를 색출한다고 한다. 숙청 대상에 오른 당 간부에 대해선 허위 사실을 유포해 여론을 조작한 뒤 보위부 조사를 거쳐 수용소로 데려간다.

수용소 내에서는 기본적인 생존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인권 침해가 심각한 것으로 파악됐다. 수감된 정치범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강제 노동에 동원되며 의료혜택도 전혀 제공받지 못한 채 하루 평균 100∼200g의 급식을 받는다. 식량배급제를 실시하는 북한의 0∼4세 배급 기준이 234g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생존 자체가 쉽지 않은 수준이다. 탈주를 시도한 정치범들은 모든 재소자가 모인 가운데서 공개 처형되며 여성에 대한 강간도 수시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윤 의원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최악의 수용 시설이자 정신적인 고문 수단”이라며 “이를 해체시키는 것이 국제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북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2009-10-17

동아일보

 


 

北, 화폐개혁 후유증 치유 `안간힘'

"北 신화폐 가치 10분의 1로 폭락" (서울=연합뉴스) 작년 11월 북한의 통화개혁(디노미네이션:통화가치 절하)이후 신화폐의 가치가 10분의 1로 추락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9일 베이징발로 보도했다.


내각총리 사과, 당 계획재정부장 해임 `민심 달래기'

양대 보안기관 연합성명 `불순세력 성전' 위협도

(서울=연합뉴스) 장용훈 기자 = 북한이 최근 화폐개혁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작년 11월30일 `구권 100원 대 신권 1원' 비율로 화폐교환을 단행했지만 국정가격 고시가 늦어져 상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뒤이은 시장폐쇄 조치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주민들의 생활 형편이 급격히 나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외화사용 금지는 극심한 공급부족을 더 부채질했다. 북한의 공급부족을 채워줬던 중국산 재화가 외화사용 금지로 거의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혼란을 무마하고 민심을 잡기 위해 강온양면책을 구사하는 있는 듯하다.

최근 시장 거래와 외화사용을 사실상 다시 허용한 것 자체가 더 이상의 민심 악화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내각 총리가 직접 주민 대표 앞에 나서 정책 실패에 대해 사과한 것에서도 북한 당국의 다급함이 읽혀진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의 김영일 내각 총리는 이달 초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 평양 시내 인민반장 수천명을 모아놓고 화폐개혁과 시장폐쇄 조치의 여러 가지 부작용에 대해 사과하고 국정가격 운용 등 후속 조치에 충실히 따라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인민반장은 당국의 조치를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최일선 메신저로 `민심'과 바로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인민반장들을 모아놓고 내각 총리가 머리를 숙인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의 내각 총리까지 나서 사과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과 후계자 김정은한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민심이 돌아가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화폐개혁과 시장폐쇄 등을 주도한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을 해임한 것도 민심 달래기의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대북 소식통은 "1월 중순 중앙당 간부들이 모여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하는 `중앙당 대논쟁' 자리에서 박 부장이 호되게 공격을 받은 뒤 1월 중순 해임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최근 함경남도 함흥시의 2.8비날론연합기업소를 이틀 연속 시찰한 것도 경제 향상에 전력하고 있음을 과시하려는 `민심 무마용'으로 보는 분석도 나온다.

화폐개혁 희생양, 북한 계획재정부 박남기 부장(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난해 3월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의 새 수영장을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 오른쪽 두번째가 북한 경제를 지휘하는 노동당 계획재정부 박남기 부장으로 최근 화폐개혁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0.2.3


그렇다 해서 북한 당국이 유화책에만 매달리는 것 같지는 않다.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도 병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8일 사상 처음으로 나온 북한 양대 보안기관의 `연합성명'이다. 북한의 인민보안성(경찰)과 국가안전보위부(방첩기관)는 이 성명에서 `불순세력을 쓸어버리기 위한 보복성전'을 선언,주민통제를 대폭 강화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대북 라디오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은 함경북도 온성군의 통신원 전언을 인용, "직장의 당비서가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노동신문에 실린 연합성명 전문을 읽어주면서 적들의 반공화국 책동에 각성할 것을 강조했다"며 "휴대전화나 불량 녹화물(동영상)을 소지한 경우 자수하라고 강요했다"고 전했다.

이 방송은 또 9일 오전 청진시 수남시장 인근에서서 40대 초반의 화교 남성 두 명이 북한의 내부정보를 유출한 혐의로 처형당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민심 수습을 위해 화폐개혁 등의 정책실패를 자인하더라도 계속 유화책만 펴면 국가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보고 `공포정치'를 병행하는 것이 북한의 일반적인 행태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jyh@yna.co.kr

2010-02-11

연합뉴스

 


 

* 참고자료: 탈북한 오영철(장성) 충격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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