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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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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2

 

 귀신(鬼神), 일본인의 이웃

 만화를 보면 일본이 보인다(2) - 범신론적 세계관

▲ '나의 지구를 지켜줘'(사진)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은 일본의 자연중심적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일본만화를 한 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초자연적 세계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이는 일본의 전통 종교가 흔히 말하는 범신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신은 어떤 존재라기보다 초월적인 힘에 가깝다. 또한 일본인은 그 힘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초자연적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을 보호가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를 수호하는 행위는 단순한 환경운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내 눈엔 보이는 너

일본에서는 신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자칫하다 ○○신의 저주라도 받으면 ‘원령공주’의 주인공처럼 고통에 시달리다 죽을 운명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해 한성진 합동신학교 교수는 “일본이 나라로 볼 때는 선진국이지만, 원시종교인 ‘애니미즘’을 믿는 등 전근대적인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신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살다보니 영적인 존재와의 동거가 이질적이지 않다. 그래서 일본에는 귀신과 영매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또한 우리가 귀신을 축출대상으로 보는 반면 일본은 더불어 사는 존재로 이해한다.

전광식 고신대 교수는 “일본 문화 ‘어제와 오늘’의 주인공은 어쩌면 귀신”이라며 “과거는 신사(神社)를 중심으로, 현재는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귀신숭배가 판을 친다”고 강조했다.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은 영적인 것을 감지하는 주인공이 특정한 물건에 얽힌 사연을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사연이라는 것이 대부분 귀신과 관계된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음양사(일종의 주술사) 아베노 세이메이가 주인공인 ‘음양사’나 클램프의 신작 ‘XXX홀릭’도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퇴마사라기보다 귀신들의 카운슬러에 가깝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 정도인 것이다.

▲ 일본만화는 전통적인 '음양사'를 다룬 것부터 지극히 현대적인 작품까지, 귀신과 주술 등을 주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데스노트’처럼 ‘사신(死神)과 죽음을 부르는 책’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도 이 범주에 든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

서구 만화에서는 쫄바지(?)의 영웅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말 그대로 ‘힘’써 왔다. 이러한 단순무식에 가까운 노력 끝에 지켜낸 지구는 인간이 살아갈 공간이다. 그래서 ‘지구를 지킨다’라기 보다는 ‘인류를 지킨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반면 일본만화에서 지구를 지키는 것은 힘을 사랑하는 민족답지 않게 ‘물리적 힘’이 아니다. 무식하게 힘만 쓰다가는 ‘자연’을 거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만화는 ‘자연과 더불어 사이좋게 살자’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외경’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연숭배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감독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그리면서도 인간에게 어떠한 특별한 지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성진 교수는 “하야오는 ‘인간이란 최고의 존재이며 신에게서 선택받은 유일한 존재’라는 개념에 반감을 가졌다”고 강조했다.

‘나의 지구를 지켜줘’(‘내사랑 앨리스’라는 해적판 제목으로 더 유명하다)도 일본 특유의 내세관, 운명론 등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일본에 환생 붐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얻은 이 작품은 전생이나 각성 등 신비주의적 요소가 크다.

여기서 ‘나의 지구’는 등장인물들이 사랑한 아름다운 별이다. 외계인(?)인 이들은 달 기지에서 지구를 관찰하고 연구하던 중, 치명적 전염병으로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하는 전염병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달에서 죽고, 지구에서 환생한다.

그 이후 이들 사이에 얽혀있는 비밀과 지구와 달 사이의 관계 등이 미스테리 형식으로 그려지지만, 결국 만화는 ‘지구에 대한 러브스토리’로 귀결된다.

구굿닷컴

 


 

니폰필’에 사로잡힌 한국의 젊은이

"예약 안 하셨어요? 자리 없습니다~."
2월28일 저녁, 서울 이태원 제일기획 사거리 앞. 일본식 이자카야(居酒屋·일본식 선술집) 여섯 곳이 연달아 있는 이 거리는 벌써 불야성이다. 그나마 토요일이라 한가한 편이지, 금요일 저녁엔 발 디딜 틈도 없다. 이곳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한 주점의 경우 밤 10시가 넘어서도 예약이 꽉 차곤 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20~30대 한국인이다. 한 잔에 8000원인 아사히 생맥주, 웬만한 건 5만원을 훌쩍 넘어가는 사케(일본 청주) 가격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들은 일본 음식 예찬에 열을 올린다.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던 이현진씨(29·직장인)는 "이 집 꼬치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 신선한 재료를 숯불에서 구웠기 때문에 동네 선술집에서 먹던 것과 차원이 다르다. 여기에 거품이 살아 있고 쌉쌀한 일본 생맥주를 한두 잔 곁들이면 최고다"라고 말했다. 그는 "안주 값이 2만원 안팎이고, 주로 한국 소주를 마시기 때문에 가격이 부담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이 '삼일절'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국 독립기념일에 영어 공부 하지 말아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처럼 이태원과 홍대 앞 등 젊은이가 즐겨 찾는 유흥가에서는 일본 음식에 '꽂힌' 마니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복고양이·기모노 인형 등 한껏 일본풍으로 치장한 이들 음식점의 점원은 손님을 맞을 때도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라고 외친다. 1990년대 로바다야키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면 이자카야는 한결 대중적이다. 초밥·돈카스·꼬치구이 따위 일본 음식을 파는 음식점도 우후죽순 늘었다. 2009년 2월 현재 음식업중앙회에 등록된 일식집은 1만2645곳이다. 어느덧 양식집(1만4810곳)을 얼추 따라잡았다.

도쿄에서 초밥 먹고, 후지TV 시청하고
먹을거리뿐 아니다. 입을거리와 놀거리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고, 초밥을 먹고 사케를 마시는 일상이 자연스러운, 이른바 '니폰필(Nippon Feel)'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다. 한때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던 '오타쿠(광적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는 어느새 전문가 뺨치는 식견을 갖춘 아마추어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인터넷상에서는 '~한다는'으로 끝나는 일본어투 문장을 사용하는 누리꾼이 차고 넘친다.

젊은 세대가 일본 문화에 사로잡혔다는 이야기는 과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98년 10월, 1차 일본 문화 개방으로 '망가' 등이 들어온 이래 지난 10년 동안 니폰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 전에도 해적판 만화를 보고, 프라모델을 수집하면서 일본 문화를 답습한 이는 많았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확실히 다르다. 후지TV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도쿄 쓰키지 어시장 초밥 맛을 논하고, 다이칸야마에서 쇼핑을 즐기는 등 거르지 않은 일본 문화를 '날것' 그대로 접한다. '동경에서 일상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김석희씨(26)는 청소년 시절부터 일본 여행을 꿈꿨다. 음반과 프라모델을 좋아하는 그에게 일본만큼 구미 당기는 여행지는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갔을 때 그는 맨 먼저 시부야에 있는 '타워레코드'부터 찾았다. 자주 찾던 서울 강남 타워레코드가 사라진 마당에 7층짜리 건물 전체가 음반으로 가득 찬 광경은 그를 황홀하게 했다. 음반도 책처럼 검색해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했다.

김씨는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Uniqlo) 옷도 즐겨 입는다. 싸고 질 좋고 디자인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는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옷을 싫어한다. 그는 "로고가 박힌 옷은 디자인이 촌스럽거나 괜히 비싼 경우가 많다. 유니클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유니클로는 일본의 대표적 중저가 브랜드다. 본사가 생산·유통·판매를 직접 맡아 옷값 거품을 뺀 게 강점이다. 1000~ 2000엔대가 대부분이다. 2005년 한국에 입성한 이래 연간 150~200%씩 폭발적으로 성장해 첫해 3개였던 매장 수가 지금은 25개로 늘었다. 지난해 말 17만 장 기획상품으로 출시된 1만9900원짜리 셔츠와 레깅스는 불황 속에서도 3개월 만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김씨의 말처럼 유니클로 제품은 심플하다. 화려한 치장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느낌이다. 이들의 판매 전략은 '믹스 앤드 매치(mix & match)'. 소비자가 선택해서 조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유니클로를 판매하는 FRL코리아 김태우 마케팅팀 주임은 "유행에 민감한 요란한 제품 대신 심플한 스타일을 유지함으로써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게 하는 것이 유니클로의 방침이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명동 유니클로에서 만난 박진희씨(24)는 "유니클로 제품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있다. 캐시미어 제품의 경우 원료가 되는 양 목장까지 본사가 직접 관리한다고 들었는데, 일본인의 꼼꼼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다"라며 유니클로 제품을 추어올렸다.

한류 아줌마 뺨치는 '자니스 팬'
패션은 물론 '헤어'에도 일류(日流)는 거세다. 이른바 '섀기커트(머리 끝이 삐죽삐죽하게 여러 층으로 자르는 커트)'라 불리는 머리 손질법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드라마 < 온에어 > 에서 탤런트 김하늘이 선보여 인기를 끈 스타일이다. 이들 미용실은 병원처럼 차트를 작성해 고객을 관리해 큰 호응을 얻는다. 명동 헤어숍 모어스 디자이너 곤씨는 "일본 드라마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일본 스타일을 요구하는 한국인 고객이 부쩍 늘었다. 커트 요금이 2만~3만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세심한 상담과 머리 손질에 만족하는 고객이 많다"라고 말했다.

한때 '한류의 식민지'처럼 여겼던 일본 연예계의 공세도 위협적이다. 일본 연예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니스'라는 세 글자를 기억해야 한다. 자니스란 뮤지션이나 영화배우의 이름이 아니다. 1965년 설립된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다. 우리로 따지자면 'SM 엔터테인먼트' 같은 연예기획사인 셈인데, 남성 연예인만 양성하는 게 특징이다. SM 역시 자니스를 롤모델로 삼아 출발했다. '소년대' '히카루겐지' 'SMAP' 'V6' '아라시' 등 시대를 풍미한 일본 아이돌 그룹이 모두 자니스 소속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아라시 내한 공연 때는 예매 30분 만에 좌석 2만 개가 매진돼 행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내 자니스 팬층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일본 교토로 교환학생을 다녀와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일본어 특기자로 인턴십을 하고 있는 이 아무개씨(26). 학창시절 누구나 그렇듯 책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 보다 일본 만화를 접했다. 만화의 애니메이션 판을 보다가 주제가에 심취했고, 그 주제가를 부른 '자니스' 소속 뮤지션에 빠져들었다.

이씨와 같은 자니스 팬들은 일본 마니아 중에서도 가장 충성도가 높다. 이들은 매년 일본으로 정기 여행을 떠난다. 코스는 대개 이렇다. 1차 목적지는 대형 콘서트장이다. 이들은 콘서트 현장에서 한정 판매하는 '우치와(응원용 부채)' 등 '굿즈(기념품)'를 구매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니스샵'에 들러 사진과 머그컵 같은 굿즈를 더 사거나, 일본 전역에 퍼진 중고 서적 체인점 '북오프'을 찾아 희귀 음반과 과월호 잡지를 산다. 열혈 팬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자니스 연예인의 출생지나 본가를 찾는 '성지 순례'를 떠나기도 한다. 일본 '전국 투어'를 쫓아다니는 극성팬까지 있다. 이들에게 웬만한 일본어 회화는 기본이다. 날마다 노래와 드라마를 통해 '자발적으로' 학습한 결과다. 일본의 '한류 아줌마' 뺨치는 수준이다.

이들이 자니스에 빠져든 건 단지 꽃미남에 열광해서가 아니다. 40년 넘는 관록을 자랑하는 자니스의 '스타 관리 전략'에 대한 이해도 한몫한다. 자니스에는 '자니스 주니어'라는 제도가 있다. 우리처럼 훈련된 스타를 한순간에 '뻥' 터뜨리는 게 아니라, 아직 무르익지 않은 아티스트를 일찍 데뷔시켜 대중이 스타의 발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달리 10년 이상 '장수하는 아이돌' 스타가 많다. 자니스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을 세 차례 다녀온 직장인 이해영씨(28)는 "올해 데뷔 18주년을 맞은 SMAP처럼, 나와 함께 늙어가는 아이돌 스타를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없다' 대 '일본을 배우자'
일본을 찾는 한국 여행자 수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총 238만3000명이다. 전체 외국인 여행자 중 28.5%로 단연 1위다. 타이완(139만명, 16.6%), 중국(100만명, 12.0%)과 비교해도 큰 차이다. 엔화 가치가 폭등한 2008년 10월 이후 일본으로 여행 가는 사람은 줄었지만, 환율이 100엔당 700~800원대였던 2007년에 비해 겨우 8.4% 감소했다.

일본 마니아의 삶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다. 이들은 '일빠' '매국노'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한일 누리꾼 교류 사이트인 네이버 '인조이 재팬'이 소모적 논쟁의 장으로 변질해간 점에서 알 수 있듯 젊은 세대에게도 '일본'은 민감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일본 문화를 여과 없이 접하다 영혼마저 '일본화'할지 모른다는 염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염려에 대해 당사자는 물론, 전문가도 기우라는 반응이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은 "학교에서 반일 교육을 철저히 하는 만큼 '일본화' 걱정은 과하다. 오히려 젊은 세대가 일본에 열광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를 통해 우리 문화 토양을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선우정 조선일보 도쿄특파원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 아직 모던(근대)에 머물러 있다면, 일본은 포스트모던(탈근대)이다. 이런 일본의 장점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진보와 도약의 첫걸음이다"라고까지 주장한다.

과거 일본은 양날의 칼이었다. 한쪽에선 '일본은 없다'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일본을 본받자'라고 외쳤다. 어느 편도 섣불리 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일본에서는 한류가 몰아쳤고, 한국에서는 일류에 열광하는 세대가 성장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문화 교류'가 최근 봇물 터지듯 이뤄진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이를 통해 런던 대학 모리시마 미치오 교수가 제안한 '동북아 공동체'의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3월9일 저녁, 홍대 앞 이자카야에서는 DMB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을 시청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4회 초 한국팀 4번 타자 김태균이 결승타를 때리자 이 일본식 술집은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이치로를 비난하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렸다. 그들은 아사히 생맥주와 사케 그리고 한국 소주를 섞어 마시며 이날 승리를 자축했다. 쇼비니즘적 애국심과 니폰필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취재 도움:이해나(대학생)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야스쿠니신사엔 야스쿠니가 없다

2,466,532명. 야스쿠니신사를 떠도는 혼령의 숫자다. 이 가운데 태평양전쟁 전몰자는 2,133,915명이며 2만1천여명이 조선 출신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신도(神道)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이 있었기에 평화로운 일본이 건재하다”고 한다.

침략전쟁을 영광스런 전쟁으로 묘사하고 음울한 군국주의만 감돌고 있는 야스쿠니신사. 흰 비둘기를 상징물로 내세워 ‘평화주의 일본’을 외치지만, 침략적 망상을 떨치지 못한 우익세력이 우매한 내셔널리즘의 향연을 펼치는 곳이다.

그들이 말하는 ‘천황 각하’중심의 국민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 희생자를 신으로 둔갑시켜, 죽은 자에 다시 피가 묻은 군복과 무기를 던지는 도쿄 야스쿠니신사는 아직도 전쟁중이다.

-전쟁에 의한, 전쟁을 위한 신사-

야스쿠니신사는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성격면에서 ‘전쟁신사(war shrine)’로 불리고 있다.

일왕과 국가를 위해 죽은 전몰자를 신으로 모시는 군사적 종교시설이다. 메이지유신 후 정부군쪽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든 도쿄초혼사가 전신이며, 일본의 대외침략과 발맞추어 국가 신도의 군사적 성격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매김했다.

일본 내 8만여개의 일반적인 신사와는 달리 야스쿠니신사는 과거의 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신도 모시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합사제’라는 행사를 통해 늘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 죽은자의 영혼을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군인과 일반 국민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신들이 증가할수록 국민들의 일왕을 향한 충성심도 고양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침략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에 대해서는 “도쿄재판은 전승국들의 보복이며 A급전범은 존재하지 않는다”(야스쿠니신사 팜플렛)고 왜곡한다. 신사 어디에도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참혹함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전몰자의 사진이나 육성 유서, 편지를 비롯해 자살공격용 인간어뢰 등 무기 10만여점이 즐비하다(전쟁박물관 유슈칸). 게다가 “천황각하를 중심으로 찬란한 일본을 만들어 가자는 크나큰 사명”(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이라는 말은 이 곳이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덧칠해 군국주의를 보급하는 전쟁신사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희생자 추모’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뜯어보면 ‘국가가 주도한 전쟁으로 죽은 군인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아가 ‘병사의 사기를 높여 국가의 전쟁을 추진하는 것’이 최종목적이라 할 수 있다.

-제멋대로 합사…묻지마식 이지메-

고이즈미 총리는 “(A급전범이 합사됐다고 해서 참배를 비난하지만) 죽은 자에 대해 그렇게까지 선별해야 하나”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야스쿠니신사야말로 죽은 자에 대해 엄격히 선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말하는 천황에 충의를 다바쳐 전사하는 것이 최우선 조건이다. 다음으로 일왕에 직속된 신분이 필요하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군대와 함께 싸웠다고 해도 야스쿠니신사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일왕의 군대에 소속된 군인 또는 공무원 신분으로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 야스쿠니신사는 그들이야말로 일왕에 대해 최대의 충절을 다했다고 평가한다. 즉 신분이나 죽는 방법에 의해 합사 여부가 결정되는 대표적인 ‘이지메’ 장소다.

야스쿠니신사는 “군인 뿐만 아니라 여성들, 그리고 어린이들도 신으로 모시고 있다”(홈페이지)고 자랑한다. 실제로 오키나와의 ‘히메유리 학도대’와 ‘철혈근황대’, 어뢰공격에서 숨진 700여명의 당시 초등학생들이 합사돼 있다. 그러나 당시 침략지에서의 희생자나 공습 또는 원폭 희생자들이 무시되는 대목에서는 신사측은 명확한 합사 선별기준을 설명 못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유족과 동창생들은 증언하고 있다.

히메유리 학도대 유족들이 희생자 명부를 작성해 후생성에 유족연금을 신청했을 때 명부가 야스쿠니신사에 전해져 ‘육군군속’으로 합사됐다. 그러나 생존하고 있는 히메유리 학도대 동창생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는 신사측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그들은 모두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시가와 호국신사의 ‘대동아전쟁대비’라는 석비에 ‘히메유리 부대’ ‘철혈근황대’의 이름이 새겨진 것에 대해 동창회 측은 “그런 사실은 전혀 통보받지 못했다. 그 전쟁을 ‘성전’이라는 바보같은 주장에 화가 치민다”고 울분을 토했다.

게다가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대만 출신의 군인 등 5만여명도 합사돼 있다. 침략전쟁의 최대의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의 유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맘대로 합사,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이라고 선전한다. 억울하게 죽은 그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공범자로 끌어들여 재차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셈이다.

희생자 유족들은 “우리들은 살아서 강제연행돼 죽어서도 합사돼 있다. 이중의 강제연행이다”고 통곡한다.

-그래도 ‘평안’을 외치는 전쟁수용소-

야스쿠니신사 정문(神門)에는 지름 1.5m의 거대한 국화 문양이 시선을 압도한다. 이는 일왕가족의 상징물로 야스쿠니신사와 일왕의 밀접한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2차대전 당시 국화 문양은 군대가 일왕 직속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부대 막사는 물론 개인 소총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현재 국화 문양은 초법적 존재인 일왕을 대신해 정치 지도자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자국 헌법을 무시하는 고이즈미. 참배해 놓고 “태평양전쟁을 미화, 정당화 할려는 게 아니다. 비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그의 말처럼, 야스쿠니신사는 ‘어쩔수 없는 자위(自衛)적 전쟁이었다’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이었다’고 외치는 얼빠진 극우세력의 순례 성지다.

나카소네 전 총리나 자민당 주요 인사들까지 참배중단의 결단을 압박하고 있지만 고이즈미는 “평화를 기원해 참배하는데 왜 참견이냐”고 들이댄다. 무엇보다 고이즈미는 ‘야스쿠니신사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곳인가’에 대해 뚜렷한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야스쿠니신사는 “靖國의 ‘靖’는 평안하다(安)는 뜻과 동일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어 ‘安’은 ‘값싼’ ‘경솔한’의 뜻으로도 쓰인다. 죽은 이들에 결코 편안치 못한 전쟁수용소 야스쿠니신사. 정말로 품격없는 값싼 나라의 경솔함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ydko@khan.co.kr

경향신문 2005-07-17

 


 

日군국주의 부활 상징인 '天皇'과 '神道'

[심층분석] 일본인들에게 천황과 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우경화를 완성하고 이에 머물지 않고 ‘영광의 일제회귀’를 위해 광분하는 일본의 사회분위기는 필시 천황제와 신도에 기인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특유의 천황제로 국가시스템을 운영해오고 있다. '타테마에'(겉마음)와 '혼네'(속마음)를 가진 이중성으로 일본인의 성격을 갈파하지만, 상징천황제와 수상이라는 묘한 정치구조가 또한 일본인의 국민성에 딱 어울리는 것 같다.

아사히신문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1945년도 조사 때 상징 천황제지지가 78%, 폐지가 5%였으나, 30년 후인 1975년에는 지지73.3%, 폐지7%,1986년에는 지지72.4%, 폐지5.6%로 각각 나타났다. 이처럼 천황제에 대하여 70%대의 고 지지율은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더욱 높아져 최근에는 그 지지율이 80%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천황제를 반대하던 공산당조차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천황제는 일본인에게 있어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자, 실생활은 물론 의식적인 면에서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보이지 않는 최고권력’이다. 이유는 천황제가 일본인들이 생활종교 철학으로 신봉하는 신도와 수어지교(水魚之交)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천황제와 신도(神道)

신도는 조상숭배사상으로 그 유래는 일본열도에 불교가 전래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백제로부터 538년에 처음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때마침 일본열도에 불어 닥친 역병으로 실패하였다. 이는 역병창궐을 ‘외래신인 석가를 믿기 때문’이라며 신도파가 정권투쟁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신도를 믿는 모모노베씨 일족에 의해 불교는 철저히 거부되고 탄압받았다. 이후 다시 552년에 백제로부터 불교전래가 있었으나 재차 역병창궐로 저지되었다. 이들 모모노베씨 일족은 ‘하느님(천제)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큐슈로부터 동진해온 천손족이자,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로 가야 김수로왕에 관한 전설인 구지봉 설화와 고천원(高天原)의 관계와 구시후루 (구지봉의 일본어?)전설 등을 고려해볼 때 가야와 관계깊은 종족이라 할 것이다.

당시 나라지역에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천상세계의 주신(主神)이자 천황가의 조상신)를 믿고 있던 모모노베 일족과는 달리 이즈모(현, 시마네현)로부터 미와산 근처의 야마토지역으로 이주해온 신라와 관계 깊은 집단들도 있었다. 이들은 미와신(三輪神)를 숭배하는 신도파로 미노노베씨와는 주도권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도파를 무너뜨리고 일본에 불교가 퍼진 계기는 587년에 소가노 우마코와 쇼오토쿠타이시(聖德太子)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를 멸하고부터이다. 이후 일본열도에서는 불교와 신도가 융합하는 신크레티즘(syncretism:혼교주의)이 일반화되어 사찰 안에 신사가 있고, 신사 안에 사찰이 있는 기묘한 형태를 이루다가 1868년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으로 제 모습을 찾았다.
 
조상을 숭배하는 신도의 사상은 신사의 건축으로 이어졌다. 일반 국민은 씨족단위로 신사를 중심으로 종교의식을 거행했고 천황가는 조상신을 모시기 위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세워 신궁에서 사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민의 단결을 꾀하게 되었다.  
 
역시 조상숭배 사상이 있었던 신라에서도 차차웅3년(서기6년)에 박혁거세 시조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고, 487년 2월에는 경주 나정의 내을에 신궁(神宮)을 세웠다는 기록이『삼국사기』에 보인다. 일본보다도 이른 시기에 신궁이 세워졌음이다.
 
다만, 한반도 국가에서는 불교의 조기전파로 조상숭배 사상이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반면, 불교 전파가 한반도 국가보다 늦었던 일본에서는 신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조상숭배 사상이 종교로까지 발전하지 못했지만, 씨족단위의 사당이나 신라, 백제, 고려, 조선 왕실에서 선왕들을 제사지내는 종묘로 이어졌음이다.     

일찍이 일본에서는 천황과 신도(神道)라는 두 축에 의해서 국가체제가 고대로부터 이어졌음이니, 일본인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숙명적으로 이를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인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천황제와 신도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정신적 안정감과 마츠리 등을 통해서 단결심을 심어주는 순기능 역할도 하고 있다.
 
이처럼 두 제도는 평상시 공기의 존재처럼 느껴지다가도 국가위기 시에는 구국의 중심점으로 재부상하는 것이다.  천황제와 신도의 순기능적 역할이 또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국가를 구하는 생명선과도 같다할 것이다.
 
일찍이 1274년과 1281년에 일어난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에 의한 일본 공격이 일기를 예측 못한 결과로 폭풍우에 의해 패퇴하였는데 이조차 일본에서는 카미가제의(신이 불게 해준 태풍) 덕택이라 하여 신도와 천황제를 더욱더 신봉하게 했을 정도였다.

존왕양이 사상의 기치아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후 일본에서는 폐불훼석(廢佛毁釋-불상을 파괴하고 사찰을 훼손함)사건이 일어났으며 신도 내에서도 논쟁이 치열해졌다. 한쪽에서는 신도를 국가종교로 삼으려 했고 다른 쪽에서는 신도의 순수한 종교성만을 강조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13개 교파로 갈라져 대별하면 신사신도(神社神道)와 교파신도(敎派神道)로 구분된다.  1921년과 35년에 대규모 탄압을 받던 대본교(大本敎)와 일제 때 한국에서 많은 문화재의 유출과 포교에 열심이었던 천리교는 교파신도에 속한다.

'텐노오'(天皇)호칭의 유래  

이미 약 2천년 전에 일본지역에서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음은 중국사서에서 발견된다. 서기 57년 의『한서지리지』기록에 “왜인은 백 여국으로 갈라져, 일부의 나라에서는 전한의 낙랑에 조공해 왔다.”라 서술하고 있다.
 
『후한서』107년 조에는 “왜노국(倭奴國 )이 후한 광무제로부터 인수(印綬-금인(金印)과 끈, 끈(綬)이란 신분이나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관인(官印)을 몸에 차기 위한 끈)를 받았다.”하고 그 금인이 1784년 후쿠오카에서 발견된 ‘한위노국왕(漢委(倭)奴國王)이라하나, 미심쩍은 면도 없지 않다.

중국의 기록에서 보듯이 왜국을 표시함에 있어 중국을 높이고 주변국을 멸시하는 ‘춘추필법’에 쫓아 당시의 왜국 중 하나인 ‘왜노국’을 기록하였으나 정식 국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뜻이 ‘왜놈국(왜놈의 나라)’이라는 의미로 읽히기에 더욱 그렇다.

하여튼 중국에서는 일본에 대하여 처음 왜노국이라던가 야마대국(야마토국?)이라 호칭했다. 4세기부터 6세기 초의 왜5왕 시대에는 왜왕찬, 왜왕제와 같이 왜왕을 호칭하며 장군호와 함께 왜국왕(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칭했다. 여기서 왜왕, 왜국, 왜국왕 할 때의 ‘왜(倭)’는 종족명이나 민족명이라기보다는 일본열도를 가리키는 지역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국이 일본이라는 국가명칭으로 바뀌는 시기는 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이는 우리측 기록에도 남아 있는바, “왜국이 왜(倭)자를 싫어하여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670년 12월『삼국사기』기록에 보이고 있다.

처음 왜국왕을 일컬을 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왜왕이라 칭했다. 일본에서는 자국왕에 대하여 처음에는 ○○국가의 왕이라는 칭호에서(예:야마대국왕)를 사용하다가 4-6세기에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됐음이 금석문을 통해 확인된다.
 
여기서 대왕이라 함은 백여 개의 소국에서 점차 야마토정권을 중심으로 통합을 해가면서 유력한 왕(King of king)을 대왕이라 일컬었음이다. 당시까지도 지방의 소국에는 ○○왕이 상당수 존재했음이다.
 
바로 가장 강력한 야마토의 왕이 ‘왕중왕’으로 ‘대왕’으로 불려지고 있었음이니, 이는 471년 제작으로 보는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철검과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 출도 도명(刀銘)에 ‘획가다지로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글에서 충분히 ‘대왕’ 명문이 입증된다. 당시까지도 일본열도에서는 천황이라는 명칭도 일본중심의 화이질서도 없었던 때이다.

열도 내에서 천황이란 호칭이 사용된 시기는 아무리 빨라야 6세기 후의 일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학계에서는 처음 추고조(재위:592~628)라는 설이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천무조(재위:672~686) 또는 지통조(690~697) 때부터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후자는 일본이라는 국가의식이 나타나『고사기(712)』나『일본서기(680~720)』가 씌어지던 시절로써 천황칭호도 비슷한 시기에 사용하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일본을 중심으로 화이질서 사상이 나타났음이니, ‘일본판 중화사상’의 출발점이다. 이로써 야마토정권은 자신들이 있는 나라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천하관(天下觀)으로 삼았음이다. 때문에 동남아계 인종으로 일컬어지는 남부 큐슈의 하야토민족이 세운 오오스미국(大隅國-현, 카고시마현 일대)과 류큐왕국(현, 오키나와), 동일본의 아이누민족을 변방국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천하중심사관은 한 발 더 나아가 한반도 국가마저 번국(蕃國-신하국)이라 보게 됨으로써『일본서기』는 심하게 왜곡된 대 한반도 기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용의 양적 면에서도 70% 가까이가 대 한반도 관련 기록이라 하니, 이를 어찌 일본역사서라 할 것인가? 제3국인이 볼 때는 가히 한국의 변방역사서라 평할만하지 않겠는가?  
 
일본이 야마토중심의 천하관인 화이질서사상을 가지고『일본서기』를 쓰면서 일본역사는 신빙성이 떨어지고 천황계보조차 불신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자승자박의 역사서술은 연대 끌어올리기로부터 시작되니, 편자가 참위설에 근거한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에 맞춰 초대 천황인 신무(神武)의 즉위년을 기원전으로 대폭 올려 기록했음이다. 즉 추고9년인 601년(신유년)으로부터 60×21=1260이라 산출하고, 이를 소급 적용한 결과 기원전 660년에 신무가 즉위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어차피 실재하지 않았던 신화 상의 천황이었지만 기원전 660년이면, 일본 역사에서는 죠오몬시대 말기에 해당된다. 죠오몬인은 일본열도의 원주민으로 아이누민족의 직접 조상이 되는바,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신무가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다면, 너희 조상이 아이누냐?”하면 심히 무례하다하여 기피당한다.
 
이처럼 일본의 역사교육은 모순점이 많기에 일본 우익들도 후지무라 싱이치의 구석기시대 날조에 일조하며 역사 끌어올리기에 한 때 몰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부정확한 기록은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많은 연대차가 난다. 이는 무리하게 연대를 늘이다보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역사시기에 들어서도『일본서기』는 무령왕 지석으로 연대가 일치하는 등 더욱 그 가치성이 확인되는『삼국사기』와 정확히 120년(2주갑-60갑자가 두 번 순환)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두 사서가 연대 일치를 이루는 시기는 추고조(推古朝)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일본에 연호가 처음 사용된 해는 645년 6월의 대화개신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대화원년’이라 사용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은 연호를 서기와 병기해 사용한다. 2005년은 헤세(平成)17년에 해당된다. 일본이 연호를 고집함은 ‘일본판 화이질서’의 고집을 의미하며 이는 천황제와 신도와도 관계 깊다.
 
이는 고대로부터 일본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국 중국이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본만은 아직도 과거의 ‘일본판 중화사상’을 지니고 있음이다. 일본인 학자가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백제나 신라는 물론 후속왕조 조차 계속하여 중국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황가의 만세일계는 허구

일본 천황가의 기원전 660년부터 현재까지 한 핏줄이라는 만세일계를 믿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있다면 “종교는 무조건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맹목성이거나 지적으로 평균 이상을 넘지 못하고 신도를 철설같이 믿는 일본 우익 인물뿐일 것이다.  
 
이처럼 만세일계 사상은 일본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백제역사를 보아도 혈통이 몇 번 바뀌었음을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즉, 고이왕과 비유왕, 문주왕, 삼근왕의 출자에 대해서는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일찍이 와세다 대학의 교수였던  미즈노 유 교수는 일본 천황가의 ‘3왕조 교체설’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제1대부터 제9대까지는 가상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제10대 숭신이 실제로는 제1대조 왕조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제2대조 왕조는 인덕천황이며, 제3대조 왕조가 계체천황이라 주장한다. 결국 계체로부터 현 천황(125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왕 계체(제26대) 사후의 기록도 많은 의혹이 든다. 왜냐하면 일본역사서는 계체의 두 아들인 안한(安閑-제27대)과 선화(宣化-제28대)를 이어 같은 형제인 흠명이 제29대 왜국왕으로 계승된 것처럼 해놓았으나, 실제로는 계체와 흠명도 다른 계통일 가능성이 크다.
 
즉, 제 25대 무열과 다른 계통인 계체가 정권을 잡은 후 다시 무열계 또는 반 계체파인 흠명에 의해 531년에 계체와 황자인 안한과 선화가 동시에 살해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안한과 선화는 계보 상으로만 이어놨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일본서기』에 그 내용이 주(注)로 처리되어 부기되어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즉,『일본서기』가 계체기 말미에『백제본기』를 끌어들여 주석을 달면서 “일본천황(당시의 정확한 명칭은 ‘왜대왕’) 및 황태자가 함께 죽었다(俱崩薨)”라고 분명히 기술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정변에 의해 계체 부자가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일본서기』편자가 후대인들에게 역사적 사실(史實)을 숨길 수 없어『백제본기』를 끌어들여 부연설명을 해 놓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흠명도 계체와는 다른 혈통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할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제1대 신무(神武)로부터 제14대 중애(仲哀)까지를 실재하지 않았던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125대 계보는『황통보(皇統譜)』에 의한 것으로 이는 만세일계에 의한 편의적인 것으로 학술적인 연구 성과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천황제를 보는 시각

일본에 있어 천황제에 이의를 제기함은 곧 불경죄요 심하면 대역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인 학자들에게 있어 에도시대 때부터도 황통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도 천황계통을 중국 오나라 태백의 후손이라는 주장과 조심스럽게 한반도 계통임을 주장하는 설까지 나왔다가 탄압당하거나 문서가 불태워졌다. 이러한 주장은 미군의 일본 진주 후 에가미 나오미씨의 ‘기마민족 정복설’로 나타났음이다.
 
즉, 대륙의 기마민족의 한 부류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천황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있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이제는 좀더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으니, 천황제에 대한 몇 몇 학자의 주장을 실어본다. 
 
(1)츠다 소우키치(1873~1961)는 일본역사를 깊이 연구한 학자로 ‘천황이 직접 정치권력을 잡지 않았다,’는 ‘천황불친정론(天皇不親政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천황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실제 권력자는 귀족, 무사들이었음으로 역설적으로 천황제가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이시이 료오스케(1907~1993)-천황친정이 이루어진 시기는 고대와(필자주:대왕시절)와 근대의 한정된 시기에 지나지 않았다고 츠다의 불친정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실제로 츠다와 이시이의 주장대로 일본 천황은 고대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실제적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정권을 잡았던 것은 후지와라씨, 아시카가씨, 토요토미, 토쿠가와 일족이었다.
 
귀족과 무사에 의한 권력의 이중구조 하에서 겉모습으로는 천황이 최상위 권력자이지만 실권은 유력 귀족이나 무사 출신이 잡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천황은 정치적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1945년 미국으로부터 패망한 후에도 일본 극우 군인들이 자신들의 책임만을 강조하며 천황 살리기에 앞장섰던 한 이유가 됐는지도 모른다.

물론 중세에 있어서도 천황실권을 꿈꾸고 시라가와(白河) 상황(上皇)이 원정(院政)을 실시한 적도 있고, 고다이고 천황은 건무신정(建武新政-1334년)으로 사무라이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며 막부를 위협한 적도 있었다. 

무로마치막부의 제3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는 스스로 천황이 되려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와 그 자신의 급사로 중지되고 말았던 적도 있다. 이처럼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천황가와 유력 무사 간에는 실제의 정치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과는 아시카가, 토요토미, 토쿠가와 막부로 이어졌고, 미천한 신분이었던 키노시타(토요토미)는 천황을  움직여 새로운 성(키노시타→하시바→토요토미)을 하사받았고 최고관직인 캄빠꾸(關白)에도 올랐다.
 
토요토미는 워낙 미천한 신분으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천황제를 적절히 이용했다. 때문에 그는 왕정복고를 꾀해 천황의 권위로 제대명(諸大名)들을 통제하려했다.

반대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황가를 일부로 경시하거나 멀리하면서도 그 자신을 신격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천황의 권위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적 행동을 하였다.  
 
이처럼 무가에 의해 실제권력이 휘둘러지던 일본은 유신의 명분을 찾던 시골 무사집단인 사쓰마(현, 카고시마현)와 쵸오슈(현, 야마구치현) 무사들에 의해 다시 빛을 봤지만, 그 때도 실제권력은 상기 두 지역의 삿쵸오(薩長) 사람들이 쥐고 있었다. 메이지천황을 올려놓고 과두체제로 일본근대화를 이끌었던 셈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쇼오와천황 때까지 이어진다.

(3)미노베 타츠키츠교수(美濃部達吉)-1935년에 “천황은 신이 아니라 국가기관이다.”라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하여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미노베교수의 이러한 주장이 신성시되던 천황과 천황제에 대하여 논쟁의 시발점이 됐음도 사실이다.

(4)전후 상징천황 일본에 있어 천황은 오랜 역사의 중심인물로 고대에 있어서는 나라를 이끌던 주체에서 중세부터는 명목상의 실권자를 거쳐 현재는 다시 상징천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천황의 호칭은 처음 왜왕에서 출발하여 대왕→천황으로의 변천을 가져왔다.  근대의 메이지정권 탄생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듯 하나, 실질적으로는 사쓰마. 쵸오슈우 출신에 의한 과두체제에 불과했다.
 
전후 쇼오와천황은 진주 미군에 의해 ‘신격(神格)을 부정당하고 인격(人格)으로서의 천황임’을 선언해야했다. 이로써 일본천황은 실제 권력에서 배제된 채 상징천황으로 자리를 잡아야했다.

그러나 일본이 국가적으로 위기에 빠지거나 큰 혼란이 있을 때에는 일본 역사가 증명하듯이 천황제가 반드시 큰 구심점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현재 천황제는 상징성에 머물러 있으나 언제라도 부활하여 일본 팽창외교의 한 중심점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일본 우익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천황을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만들자!’는 주장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의 팽창주의

추고조 때의 섭정이었던 성덕태자가 607년에 수양제에게 국서를 보냈다. 그의 국서는 당시의 왜국 국력으로서는 얼토당토않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국서에서 성덕태자는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 서신을 보낸다.”하여 괄괄하였던 수나라 양제가 격노했다고『수서』「왜국전」에 전하고 있다.
 
당시 왜국의 국력이 그에 미치지 못했지만 의식적인 면에서는 이미 ‘왜국판 중화주의’라 할만한 팽창주의적 사고가 형성되어 있었음이다. 이 국서에서 이미 일본 중심의 천하관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근세 토요토미 히데요시에도 이어져 직접 군사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19세기 말의 메이지 정부나 20세기 전반기의 쇼오와 정권 때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토요토미의 망상은 국력에 비해 턱없이 지나쳐, 명나라를 쳐 천황을 북경에 살게 하고 자신은 영파(상해부근)에 살 것이며 인도까지도 정벌하겠다는 망상을 가졌었다. 이 모든 사상의 근원은 ‘천황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팔굉일우’사상에 연유한다.

천황제와 신도가 두 축을 이루는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나 이슬람이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를 행함으로써 적극적인 평화세계에 도달한다.’는 ‘제로섬 게임식’사상과 같다. 타종교, 타민족, 타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이기적 사상 때문에 카미가제 특공대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이웃국가 침략에 대해서도 윤리·도덕적으로 무감각한 것이다.
 
일본의 신도에서는 홍익인간 사상이나 인류평화, 박애주의는 찾아볼 수 없으며, 오로지 일본 민족의 이기심만 들어있을 뿐이다. 일본이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도 반성과 사과는 커녕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과서에서조차 왜곡을 일삼는 것은 팽창주의적 사고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 천황제와 신도 사상에 연유한다. 때문에 일본이 국력이 약할 때는 의식적인 면만이 확대 지향적이어서 다른 문화와 선진문화의 흡수에 열심이나 일단 국력이 강해지면 인접국부터 천황의 지배 하에 넣으려 획책한다.
 
바로 천황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사상 때문이며, 이는 메이지유신 직후 나온 정한론과 일부러 일으킨 강화도 사건 이후 줄기차고 끈질기게 한국을 침략하던 외교에서도 입증되고도 남는 일이다.
 
그러므로 일본에 천황제가 지속되는 한 또 하나의 정신적인 축인 이기적이고 편협한 종교적 사상으로 말미암아 인접국은 편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황제는 제로섬 게임에 의해 그 지배영역을 꾸준히 넓혀 우주 전체를 차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러한 팽창주의를 막을 방법은 오로지 힘에 의하거나 문화의 힘으로 일본보다 우위에 설 때만이 가능하다. 
 
천황제와 부락민(部落民)
 
귀한 신분이 있으면 천한 신분도 있어야한다는 것이 근세 일본정치를 담당하던 위정자들의 인식이었다. 천황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많은 조세부담은 필경 불만이 많던 농,상,공인들에게 있어 분명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부터 농민의 지배를 한층 강화하며 조세의 기초를 닦기 위해 태합검지(太閤檢地:타이코우켄치-농지측량)를 실시하였다. 1588년 2월에는 도수령(刀狩令:카타나카리레이)을 내려 병농분리(兵農分離)를 꾀하였다. 이는 사원이나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창, 칼, 활, 조총 등의 무기를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농민봉기를 줄이고, 농사에 전념케 할 목적과 무사들에 대한 권위를 강화할 필요성 때문에 실시되었다.
 
때문에 사회는 안정되었다. 1591년 8월에는 신분통제령(身分統制令)을 내려 신분이동을 금하였다. 이는 바로 조선침략을 준비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으로 이러한 정책을 폈음이다. 특히 농민들로부터 창, 칼 등 금속류를 몰수했다함은 일제 때 한반도에서 놋그릇 등 철붙이를 몰수해 갔던 정책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때 토요토미의 뇌리를 타고 섬광과 같이 하나의 기발한 발상이 나왔다. 많은 징세와 부역에 대한 사회 불만을 일거에 해소할 새로운 신분제도의 창출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일본인들의 집단 따돌림 현상인 이지메에서 잘 나타나듯이 조선 침략을 준비하는 상공인들과 농민들의 불만을 이들에게 돌림으로서 잇키(반란)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천민인 부락민 탄생의 시초라고 일본학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즉 농민이나 상공인들보다도 더 못한 천민인 부락민들이 있음으로, 농민들이나 상공인들의 불만에 바람빼기를 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찾게 하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다. 이들 차별받는 부락민이 현재 300만명으로 아직도 일본에서는 취직이나 결혼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 이들 상당수는 공산당 지지층으로 ‘동화정책(同和政策)’의 대상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차별받는 이들은 3K(우리의 3D) 업종 중의 하나인 버스 운전기사로 많이 일하는데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수당을 받아 같은 직종의 일반인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역차별을 주장하는 일본인도 있을 정도다.
 
아울러 한국인이 스스로 ‘부락민’이라 부름은 일제가 한국인을 경멸하면서 퍼트린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하는 소리이다. 우리말 ‘마을’이라던가 ‘촌락’ 등 좋은 말 놔두고 ‘부락’ ‘부락민’이라 말함은 일제의 간교함을 모르고 하는 말로, 앞으로는 사용치 말아야 할 단어이다. 왜 우리 스스로 천민임을 내세우는가?
 
메이지유신 후의 자유민권 운동 때에 각 당에서 모의 헌법 초안을 만든 일이 있었다.1881년 9월에 성립된 자유당 계열의 릿시샤(立志社)는 초안에서 인민주권과 저항권을 넣었으며, 군주권의 축소를 주장했다. 이츠카이치 가쿠게이 코오단카이(五日市學藝講談會)에서도 인민의 권리를 중시하며 군민공치(君民共治-군주와 백성이 함께 통치)와 삼권분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좌파적 사상은 일제시대에도 이어져 많은 탄압을 받았다. 당시의 파시즘정권은 공산당과 사회당 계열의 정치사상을 강압통치 했는데, 1910년에 그들 사회주의자들이 천황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전국에서 수백 명이 검거되었고 코오토쿠 슈우스이(幸德秋水) 등 12명이 대역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좌파성향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일본 사회에서 취업과 결혼에서 차별받는 300만 명의 부락민이 주 기반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층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당도 이제는 천황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으며 결국 수년 전 천황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작금 우경화 돼가는 일본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류의 양심으로 버티던 사민당과 공산당의 지지율은 형편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공산당은 지지율이 2-3%대를 유지하며 2003년 9월의 중의원 선거와 2004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공산당은 이제 중의원,참의원 합쳐 18명(중의원 9, 참의원 9)에 불과하고 사민당 또한 11명(중의원 6, 참의원 5)으로 무늬만 정당으로 추락했다.
 
총 722명의 의원 가운데 양심 세력인 공산당과 사민당 의원 모두를 합쳐도 29명에 불과하니, 일본 정치계에서 양심적인 비판이나 주장을 듣는 것도 이제는 무리일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한 여름 날의 한 마리 모기 소리만도 못할 것이요, 그들의 비중은 이미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음이니, 이는 일본의 비극이요, 이웃 한국의 비극이자, 세계인의 비극이다.
 
일본우익이 보는 한.일관계의 위상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1868년에 조선에 사절을 보내 그동안 조선과 맺었던 외교관계와 통상의 수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메이지 일본은「천황」국가임을 내세워 이전과는 다르게 일본국이 상위의 입장에서 외교관계를 다시 맺을 것을 요구하였고, 조선은「천황」의「황(皇)」이 중국 황제의「황(皇)」과 동열임을 들어 이 요구를 거절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본우위(優位)의 사상은 오늘날의 일본 우익인사들의 기본적인 대한관(對韓觀)을 형성하고 있다.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인 쿠로다 카츠히로 등이 “국제관례”라며 한국인이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데에서도 그들의 한국에 대한 우월성을 엿 볼 수 있다. 일본 우익인사들은 고대의 한.일 관계를 매우 잘 아는 인물들로 그러기에 지금도『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초.중등학교에 뿌리고 일반인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은 비판받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요, 하나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니 장기적으로 볼 때는 역사날조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역사창조가 되는 셈이다. 일본인들은 대개 한국, 한국인에 대하여 우월과 콤플렉스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성향은 매우 친해지거나 술 취한 상태에서 그 혼네(본심)을 보여주나 평상시에는 듣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은 천황보다 일왕이라 불러야  일본 우익인사들이 일왕을 천황으로 불러주기 바람은 바로 천황이 한국 대통령보다는 상위 개념이라는 메이지 당시의 생각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일본 우익인사들의 이러한 요구는 너무나 일방적이고 무례하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 달라 요구하지 못하면서 한국에만 이를 강요함도 부당함이요, 국제관례대로라면 그들이 매일 계속되는 일기예보 방송에서 ‘한반도’를 ‘조선반도’라 부르지 말아야할 것이다. 아울러 남북한 한반도인을 총칭할 때 아직도 ‘한국인’보다는 ‘쵸오센징(조선인)’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이 말 속에는 아직도 한반도,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의식에 잠재해 있다는 증거이다. 북한과는 국교도 없는 일본이 인구수나 경제문화 교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는 한국과 관계가 깊으면서도 ‘조선반도(쵸오센 한토오)’나 ‘조선인’을 선호함은 어불성설이요,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달라 하기 전에 이 점부터 고쳐 부르고 한국인에 천황이라 불러달라 요구할 일이다.
 
앞 뒤 재지 않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일본 우익인사들의 사고는 바로 일본민족만을 위한 신도의 편협성과 천황제에 지나치게 함몰돼있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독립 후 그렇게 강요하던 신도가 한반도에서 하루아침에 눈 녹듯 사라짐은 불교경전이나 이슬람 경전, 또는 성경처럼 논리적이고 고차원적인 경전이 없기 때문이요, 인류 전체의 사랑과 평화를 제시하지 못하는 편협성과 저급성에 찾을 수 있다. 
 
신도는 오로지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의 종교’일 뿐이지, 세계로 전파되지 못함이요, 강제로 믿어라 해도 그 한계성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천황제와 신도의 사상을 기본에 깔고 한일관계를 바라보는 일본 우익인사들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한국인이 바라보는 천황제  한국의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일본의 천황제를 매우 부러워하여 우리도 왕조부활을 꾀하자는 주장도 한 때 있었다.
 
이는 국가에 어른이 있어야 국력을 집결시킬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로 비치나, 일제시대를 거친 나이 많은 일부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확인되는 사항이다. 그들 또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고 시끄러운 한국적 상황에 이러한 주장을 했음직하다. 
 
일제는 한국인에 천황숭배와 신도의 보급을 위해 남산 정상에 신사를 세워 강제로 참배케 했었다. 여기에는 식민지 하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던 개신교계가 강제적이든 자진해서이든 앞장이 노릇하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음이다.
 
한때 한국에 왕조의 전통이 끊어짐을 매우 애석해 하면서 천황제를 부러워했다는 위정자가 있었을 정도이니, 이는 수백년 왕조시대 경험을 가진 우리로서는 한번쯤 누구나가 생각했을 법하다.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 없음에 한탄하며 일본처럼 왕조의 부활을 계획했다는 소문마저 돌던 때가 있었다.  
 
일본과 달리 아이큐가 세계 제일인 우리 민족에 있어 저급한 수준의 종교는 믿기 힘들 것이요, 기존의 단군신앙조차 우상숭배라 하여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학교에 세워진 동상 목을 치는 일까지 있다. 이는 지나친 외래종교에 대한 맹신으로 우리 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래의 사상이나 학문, 철학을 무조건 따르고 좋아하는 사대성에 있다할 것이다.
 
조선시대 때 유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중국에 사대외교하며 자주성과 독립성을 가지지 못했던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 것, 우리가 단결할 수 있는 사상도 가지지 못한 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건국신화나 세계관을 맹신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논리적이고 수준 있는 고등종교에는 쉽사리 빠져드는 한국인이지만,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천황숭배와 신도를 아무리 강요했더라도 이는 독립과 더불어 눈녹듯 사라졌듯이 일본 종교는 한국인을 설득시킬 수 없음이다. 때문에 신도 사상의 기반위에 선 천황제를 바라보는 한국인은 천황제와 신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고 비우호적인 것이 사실이다. 아니, 일제가 심어놓은 결과물로써 우리가 이웃국가의 천황제와 신도를 경계함은 너무나 당연할지도 모른다.
 
특히 태평양전쟁 때 우리 민족을 강제징용하거나 위안부로 끌고가 많은 치욕을 안긴 일본이 전범들을 야스쿠니신사에 안치하고도 진정한 사과 한마디 없이 역사왜곡과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함에 한국인을 아직도 치를 떠는 것이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은 천황제에 대하여 평소 이를 의식하지 못하나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처럼 위기시에는 언제라도 천황제가 부활, 일본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민족적 위기시에 단군신앙으로 뭉치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제가 훨씬 민족적 구심점을 갖추는 데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천황제는 평상시의 일본인들에게 있어 공기와 같은 존재이지만, 호흡이 곤란할 때나 위기 시는 공기의 고마움을 느끼듯이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언제라도 부활되어 심리적 안정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는 마치 마약처럼 일본국 위기 시 일시적으로나마 정신적 안정감을 주는 것과 같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이 마약과도 같은 천황제에 홀려 '닛뽄반자이(일본만세!)'와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만세!)'를 외치면서 카미가제전사가 됐던 역사에서도 입증된다. 이들은 신성국 일본을 침략한 미군에 대하여 반드시 몰아내야할 귀축(鬼畜)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미군 함대를 향하여 용감무쌍하게 달려드는 카미카제전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천황이 통치하는 신성국 일본이 패하자, 장군의 부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하나 둘 진주군의 품안으로 달려들어 천황을 구하는 여전사가 되었던 것이다. 천황을 구한다는데 어찌 부군(夫君)인 패장이 부인을 욕할 것인가? 바로 이러한 정신이 일본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1945년 원자탄 두방에 일제가 미군에 패망당할 때 입증된 사실 아닌가?  때문에 일본인은 천황제와 신도라는 주박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이러한 일본민족만을 위한 좁은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세계인이 가지는 인류 보편적인 철학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한 일본이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고 기왕에 이룬 경제발전을 밑바탕으로 군사대국화에 이어 정치대국화마저 실현하려 바삐 움직이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귀축이라고 죽음도 불사하고 달려들던 미국에 대하여 이제는 반대로‘1등에는 무조건 올인’하면서 일본의 국익을 극대화 해가고 있다.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이 진리처럼 여겨지듯이 역사는 아이러니컬하다고 비판해도 소용없는 듯하다. 21세기 들어 초강국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에 일본이 민첩하게 승차하여 다시금 천황제의 부활을 꿈꾸고 큰일을 저지르지 않을지 심히 유감이다.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과 맞물려 점점 우경화의 늪으로 빠지는 일본이 후지산처럼 급히 일어섰다가 급격히 패망하는 악순환을 또다시 연출할 것인가?  이웃 국가인 한국에서도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왜곡, 독도문제 제기 등에 대하여 언제까지 이를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인류평화와 공존이라는 철학 없이 자국만의 이익극대화에 올인하는 이웃 철부지 일본의 팽창정책에 철저히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천황제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는 지구상에서 오로지 한국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팔현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200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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