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라는 에슈케너지 유태인은 1863년에 2명의 동업자와 함께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사를 설립하고 정유 사업을 시작하여 1872년에는 미국 정유업계의 25퍼센트, 1879년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대부분을 독점 점유하였습니다.
이후에 무기산업과 금융산업에서도 손을 뻗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존 록펠러는 프리메이슨 로스차일드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각종 부정한 방법(카르텔, 독점, 정경유착)을 동원했습니다.

 


 

록펠러의 석유산업 독점

 

1. 쎄븐 시스터즈(seven sisters)와 록펠러

 

exxon mobil은 현재 자산 규모로 분류할 때, 전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국가가 운영하거나 투자하지 않은 사기업으로 세계 최대 석유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유가 시대엔 exxon이 fortune 500리스트에 늘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매출액을 기록하는 회사로 랭크되었으며, mobil은 2위에서 5위 사이를 차지하는 기업이었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1998년), 에너지 업계의 1위 자리를 위협하는 다른 초국가기업들의 추격을 의식, 기업합병을 통해 exxon mobil 이라는 이름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엑슨과 모빌은 원래 한 뿌리에서 탄생했던 기업들이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20세기 초 미국 원유/정유 시장을 독점하는 형태가 되었고, 이것은 당시 안티-트러스트 운동과 맞물려 미국의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1911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록펠러의 스탠다드 트러스트를 36개의 베이비 스탠다드로 분할 시킨다. 엑슨은 당시 스탠다드 뉴저지를, 모빌은 스탠다드 뉴욕을 모태로 하는 자매 기업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약 88년 후에 재 결합한 것이 바로 엑슨 모빌 코퍼레이션인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세계 석유 시장에는 소위 쎄븐 시스터즈라고 불리는 7개의 메이저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기업들이었다.


△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 현재 bp amoco

△ 걸프 오일(gulf oil company), 현재 쉐브론(chevron corp.)의 일부

△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petroleum/shell oil)

△ 소코니 버큠(socony-vacuum), 모빌(mobil)의 모태이며 현재 엑슨 모빌

△ 스탠다드 오일 캘리포니아(standard oil of california), 현재 쉐브론

△ 스탠다드 오일 뉴저지(standard oil of new jersey), 엑슨의 모태, 현재 엑슨 모빌

△ 텍사코(texaco inc.) 


위에서 알 수 있듯, 이 7개의 거대 에너지 기업들은 모두 앵글로 색슨 계열의 기업이며, bp와 로열 더치 쉘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 기업이었다. 이 5개의 미국 기업은 또한 모두 록펠러의 스탠다드 트러스트에서 분리된 새끼 스탠다드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7개 거대 기업들은 상호 출자와 합작 등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석유 시장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갖고 있던 또 하나의 자매가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최대 에너지 기업 cfp로, 이 회사는 다른 7 자매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 이권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쎄븐 시스터즈, 이태리어로 sette sorrelle라는 말을 만들어 앵글로 색슨 카르텔을 맹공한 사람인 이태리 국영 석유 회사 eni의 회장 엔리코 마테이(enrico mattei) 입장에선, 프랑스를 포함하여 8자매라 부르며 공격하는 것이 전략상 불리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쎄븐 시스터즈의 해체가 아니라, 이들의 카르텔에 eni, 즉 이태리를 끼워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1911년 미국에서 36개로 쪼개졌던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는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더욱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스탠다드 트러스트의 변천 도표-첨부 파일 참조) 그리고 그들의 수장 노릇은 늘 exxon의 몫이었다.


흔히 석유 수출국 기구, 즉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을 석유 카르텔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 opec 결성을 확정지은 것은 사실 당시 exxon의 회장이었던 몬로 래스본(monroe rathbone)이 주도하던 쎄븐시스터즈 카르텔이 내린 결정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opec이란 카르텔은 쎄븐시스터즈라는 카르텔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유국들의 안티-카르텔 카르텔(cartel against cartel)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쎄븐시스터즈들은 중동 및 베네주엘라 등의 석유를 자신들이 결정한 공시가(post price)로 파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 판매 수익을 해당 산유국과 50대 50으로 나누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 엑슨의 레스본 회장이 직면한 문제는 일종의 공급 과잉에서 오는 가격 경쟁 문제였다. 즉, 소련이 앞에서 언급한 이태리의 eni에게 쎄븐시스터즈의 공시가격보다 배럴당 60센트 싼 공급계약을 맺었으며, 같은 쎄븐씨스터즈끼리도 일본 같은 시장에 큰 폭의 할인가격으로 팔았던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인도 같은 시장에도 덤핑 가격으로 치고 들어오자,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그 문제란, 수익은 경쟁으로 인해 줄어드는데도 불구하고, 공시가격에서 일정율의 경비를 제외한 계산상의 수익 50%에 해당되는 금액을 산유국에 지불해야 하는 당시 시스템은 쎄븐 시스터즈의 이익을 잠식하고 위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손해를 볼 상황은 물론 아니었고, 단지 이익율이 다소 낮아지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즉, 위협적인 소련의 저가 오일 공급에 대항하여 시장 점유율과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시가의 하향 조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쎄븐 시스터즈내에서도, 그리고 엑슨 이사회에서도, 주류 의견은 이러한 수익율 악화의 부담을 일방적으로 산유국에게 전가하는 것보다, 서로 타협하여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록펠러에게 보고하는 래스본의 입장이 그런 의견들을 묵살하게 된다)


이때 엑슨은 산유국들과 마주 앉아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는 방법을 취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신이 주도하는 쎄븐시스터즈 간의 회의 결과를 일방적으로 공포하는 형식을 택했다. 이미 1959년에 18센트를 하향 조정한 공시가를 다시 일방적으로 내리겠다는 세븐시스터즈의 결정에 가장 분개했던 것이 당시 사우디 석유상이었던 압둘라 타리키(abdullah tariki)와 베네주엘라 석유 장관 페레즈 알폰소(perez alfonso)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로 1960년 9월 14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사우디,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베네주엘라 등 5개국을 멤버로 하는 opec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때의 분위기를 전하는 말로, 당시 중동 산유국 가운데 가장 친미적이며 이스라엘에도 석유를 팔고 있었던 이란의 팔레비 샤 국왕이 한 말을 인용한다. “공시가를 더 인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합리적 생각이나 그러한 결정을 사전 동의 없이 내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후, 소련의 석유 덤핑은(쎄븐시스터즈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야 얼마든지 정당한 시장경쟁이었을 뿐이다) 동구 위성국가들에게 공급하기도 바빠진 소련의 수출 여력 감소로 문제가 되지 않았고, opec의 반카르텔 단합은 산유국간의 자중지란으로 그림의 떡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국제 석유 시장의 구조란 것이 1960년 이전부터 2004년 현재까지, 결코 자유 시장 경쟁원리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유가를 포함, 모든 국제 석유 시장의 중요한 변화들은 언제나 이 두 개 카르텔간의 이해관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엑슨-모빌로 대표되는 시스터즈들의 담합과 조작에 의해 결정되어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들이 선택한 입장은 미국 행정부의 입장과 정확하게 일치되어 왔다. 

 

지금 이들은 쎄븐시스터즈가 아니라 엑슨모빌, 쉘, 비피-아모코, 그리고 쉐브론-텍사코 등 four sisters가 되어 있다. 참고로, 엑슨모빌, 비피-아모코, 쉐브론-텍사코 3개 회사는 아직도 1911년 분할되었던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에 속했던 35개 회사들 가운데 14개 이상을 그 치마폭에 감싸 안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오일 쇼크라든가 유가 급변 등이 주로 중동 산유국 콧수염 멋진 왕족들이 롤스로이스나 걸프스트림 자가용 비행기가 몇 대 더 필요해서 만들어 내는 탐욕의 제물인 것으로 착각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이란, 이라크, 베네주엘라,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알제리아, 인도네시아, 리비아, 나이제리아, 카타르, 그리고 아랍토후국연합(uae) 등 11개의 멤버 국가로 구성된 opec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사실과 괴리된 인식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아랍 및 기타 지역 산유국의 원유를 판매하는 회사(대개 국영 석유회사란 명칭을 가지고 있다)들의 소유권은, 1920년 9월 17일 로열더치 쉘, 앵글로-이란니안 그리고 스탠다드 오일간에 체결된 석유 가격 책정 카르텔 합의문에 기초하여, 아직도 쎄븐시스터즈를 근간으로 하는 국제적 컨소시엄이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겉으로 막강해 보이는 이 opec이란 존재는, 아랍의 석유 자원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세력이 이들 카르텔임을 숨기고, 마치 국유화 돌풍을 거쳐 모두 중동 산유국들에게 넘어 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쎄븐시스터즈들의 교묘한 위장술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언뜻 생각할 때, 미국 알래스카 프루도베이 유전의 채굴권과 그 원유 운반 파이프 라인은 당연히 미국적 기업인 엑슨모빌이나 쉐브론-텍사코가 갖고 있어야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적으론 브리티시 페트롤리움과 엑슨이 합작으로 소유하고 있다. 왜 그럴까? 에너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미국이,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석유도 아닌 자국의 자원을 왜 타국과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엑슨이나 모빌 등이 자본력이나 기술력이 딸려서 비피를 끌어 들여 공동 소유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요즘 우리 기업을 외국 헤지펀드 등에 넘기는 것과 비슷하게..

 

물론 그렇지 않다. 미국과 미국의 에너지 자본이 알래스카 석유 자원과 그 파이프 라인이라는 에너지 동맥의 상당 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영국의 비피에게 양보한 이유는 돈이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1911년처럼 또 다른 안티트러스트 열풍에 휘말려 강제로 쪼개지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다국적 소유 형태로 분산 방어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일 뿐이다. 


프랑스의 cfp(companie francaise de petroles)를 포함한 앵글로색슨계 오일 메이저들은 실제 중동만이 아니라, 소련, 아프리카, 중남미 등의 웬만한 유전은 모두 합작과 투자 등의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는 실체적 독점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제품이나 자원도 일단 그 공급 사이드의 카르텔이 존재하는 이상, 그 시장의 모든 변화는 그들의 정책 또는 통제에 따라 일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며, 에너지 자원이라고 예외가 아닌 것이다. 유가가 20불에서 40불로 뛰면, 중동의 산유국들 세수만 두 배 이상 세배, 네배까지 늘어 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메이저의 순수익도 앉은 자리에서 그만한 배수로 증가하는 것이다. 

 

소련이나 중국 등, 일견 메이저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자원국의 수입도 그것이 직접 메이저의 구좌로 분배되어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또 다른 갈쿠리인 거대 상업은행들의 손을 거쳐 들어 온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의 거대 상업은행이 이사회를 개최하면 참석자의 3분의 1 정도는 오일 메이저들의 이사들이 차지한다. 반대로 오일 메이저들의 이사회에는 거대 은행의 이사들이 그만큼 참석한다. 미국의 금융권력과 에너지 권력은 우리 나라 조중동과 재벌들의 혼맥 이상으로 강한 법적 혼맥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한 가족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 언론과 재벌의 유착관계가 정치권력과 어떤 함수관계 또는 조폭적 동지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즉, 미국의 경우, 에너지 자본과 금융자본의 유착이 언론권력 및 정치권력과는 어떤 위상관계를 갖고 있는가? 

 

 

2. 소유를 넘어 선 탐욕 - 통제 권력


이 글 앞에 인용한 록펠러 1세의 세 가지 발언 가운데 마지막 것은 ‘경쟁은 죄악이다” 입니다. 미국, 나아가 세계 석유 자원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고픈 록펠러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유 경쟁이나 시장의 자율을 금과옥조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자본주의 권력의 정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드리며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foreign policy in focus라는 일종의 인디펜던트 성향의 싸이트에 게재된 한국 경제학자의 논문이었습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장하준” 박사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케임브리지 교수로 있으며 발표한 “kicking away the ladder 사다리 차버리기”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은, 대단히 칭찬해 주고 싶은 글이었습니다.


논문 자체의 핵심적 주제는 wto 등을 통해 자유 무역을 외치는 선진국들의 행동이 사실은 자국 산업 보호 정책 주의를 통해 자본 권력의 지붕 위에 먼저 올라 가 지배적 위치를 점한 다음, 다른 후진국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리는 행동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명확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고찰이나, 깔끔하고 세련된 표현이나, 두루 흠 잡기 어려운 아름다운 글이었습니다.


이런 두뇌가 세계은행이나 imf, 그리고 wto와 같은 세계화의 주력 전차들을 비판하고 자본권력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겨누는 것은 큰 위안입니다. 앞으로도 이 사람이 그들의 그룹에 편입해 들어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록펠러가 경쟁을 혐오한 것은 자신이 이미 확보한 에너지 자본 권력에 도전해 오는 잔챙이들이 귀찮은 모기처럼 느껴졌던 것도 있겠지만, “소유보다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되고 싶다는 끝없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욕망은 인간의 속성이며 생존 양식의 불가결한 요소지만, 그것이 도를 넘으면 탐욕이 되고 탐욕의 추구가 끝도 한도 없을 경우 악마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록펠러라는 인간은 위에 인용한 그의 두 번째 발언처럼 “소유라는 욕망을 넘어 모든 것을 통제하는 권력”이 되고 싶어 했던 악마적 탐욕의 소유자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란 대국의 모든 석유 자원을 독점하다시피 한 그는 정유산업과 석유 제품 소매시장을 자기 호주머니로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편안한 생을 만족스럽게 마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계 석유 시장을 통제하는 권력을 원했고, 그러기 위해 금융권력을 장악해야 했으며, 정치권력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원했습니다. 


정치권력이란 대중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며, 대중의 마음은 미디어에 의해 조종됩니다. 미디어들이 대중을 조작할 수 있는 기획력과 실천력은 교육된 엘리트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갑옷을 입고 자신을 위해 싸워 줄 또 다른 엘리트들이 있어야 그런 엘리트들을 미디어의 후광으로 키워 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미디어를 장악했고, 미디어와 정계에서 활약할 재능 있는 자들을 조직적으로 키워 내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록펠러 가는 대략 이러한 그랜드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지금 4대에 걸쳐 미국을 지배하는 위치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위치로 전환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은행들과 방송사들, 재단과 연구 기관들, 그가 후원하는 수많은 단체들과 드러나지 않은 조직들은 그를 인류 최고의 자선 사업가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한 연출과 가면일 뿐, 록펠러는 자신을 지원했던 유럽의 로스차일드(독일식으로는 로스칠트) 가문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악마적 탐욕과 지배욕의 화신이며 노예였을 뿐입니다.  

 


 

록펠러-모건 재벌과 한국전쟁

 

전쟁의 늘 한가운데에 미국이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4일 전에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지에는 1면 톱으로 `루즈벨트의 전쟁계획`이 특종으로 보도되었는데, 여기엔 루즈벨트 대통령이 얼마나 전쟁을 고대하고 있는가가 잘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미국의 함정에 빠지듯이 기습을 감행했다.

한국전쟁을 보자. 4백만 명 이상의 한국민이 전쟁 때 죽었고, 그 3/4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다. 충복 영동군의 노근리를 비롯해서 말이다.

98년 한국전쟁 48주년 때 `38선도 6·25도 미국의 작품이다`라는 책을 썬 전 극동지역 CIA고위책임자 하리 마오 박(한국이름 박승억)은 99년 6월호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6·25 5개월 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정보를 입수해 보고했는데 워싱턴 당국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이 애초 예상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이 2년이나 빨리 끝나 버리자 산더미같이 쌓인 남은 무기, 전쟁물자, 농산물들 때문에 미국경제는 공황으로 치달았다. 아사지경에 빠진 미국 거대 군수산업은 줄곧 트루먼 행정부를 괴롭혔다. 결국 워싱턴 당국은 한국전쟁을 유도해 38선 언저리에서 정전을 하고, 국토재건에 미국의 잉여물자를 쏟아 붓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미국정부의 전쟁계획이 파놓은 함정이듯 한국전쟁도 미국 군수산업의 전략적인 함정 속에 빠진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또 "50년 당시 미국의 GNP는 전 세계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대국이 아무리 전후 공황이 와서 실업자들이 아우성을 친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독립해서 살겠다고 버둥대는 한국에서 무자비하고 처참한 전쟁판을 벌여서야 되겠는가" 라고 토해냈다.

한국전쟁 최후 점검으로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를 파견하여 50년 6월 19일 38선 일대를 비밀리에 시찰까지 마친 뒤 북한을 유인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충북 영동의 노근리를 비롯한 한민족에 대한 양민학살이 록펠러-모건 재벌의 록히드사 전투기의 기총사격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체적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딘 애치슨 미 국무부 장관의 직함을 벗겨내면 그는 유엔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탄약제조업체 [듀퐁]의 고문변호사였고. 로버트 로베트 국방장관은 록펠러 투자은행인 [브라운 형제 해리먼]의 중역이었고, 한국전쟁당시 전쟁정책과 전략을 수립한 리지웨이 장군은 록펠러 동지인 멜런가의 [멜런 공업 연구소]의 사장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미국본토 네바다 주에서 대기권 핵실험이 30여 차례 있었다. 50년 `영화연맹`의 회장인 존 웨인은 전쟁과 핵실험을 앞장서 주장하게 된다. 영화연맹은 모건이 나치즘을 지원하기 위해 부동산업자를 시켜 설립하였다. 존 웨인과 일행은 네바다 주에서 가까운 사막에서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지만 다수가 암에 걸린다. 결국 그는 79년 6월 암으로 사망하고 죽기 전까지 록펠러의 석유와 얽히고 설킨 조무래기 투기꾼 인생을 마감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신문기자들이 영화배우들의 신변잡기, 주변기사만 쫓아다니다 보니까 진짜 역사는 모르게 된다.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 전쟁이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었다.

록펠러 가의 축복을 받으며 재클린과 결혼한 케네디가 61년 록펠러-모건 재벌의 이익을 위해 베트남에 비밀부대를 파견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고, 14년에 걸친 살상극이 펼쳐진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의 딘 애치슨은 베트남전쟁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을 드러낸다. 이미 딘 애치슨은 트루먼 대통령당시 때부터 프랑스의 베트남개입을 지원할 것을 권고한 탄약제조업체 [듀퐁]의 고문변호사였다. 전쟁 제일보를 내딛은 미국은 비밀부대 파견 뒤 늘어나는 미군전사자를 핑계로 본격적으로 개입을 해 미국전체가 전쟁에 돌입했다.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장관(닉슨때 국무장관)등은 케네디의 막후에서 베트남 전을 확산시킨 軀渶?모건 재벌의 관계자들이다. 록펠러-모건 재벌은 쉬는 날이 없었다.

또 베트남 전쟁의 종식을 위한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불과 반년만에 록펠러-모건 재벌은 오일쇼크의 발단이 된 제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은 유태인재벌을 미국 내에서 조종해 아랍민중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 폭발시킨 인공전쟁이었다.

1984년 논픽션 `죽음의 상인`을 쓴 조셉 그루덴은 "이 지구상에는 불가사의한 집단이 존재한다. 세계최대의 군대와 은행을 장악하고 그 은행에 금화를 그득 채우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기공장을 완전 가동시켜야 하는 집단이다."라고 할 정도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끝까지 무기를 팔아먹을 뿐이다."

노병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걸프전은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냉전이 끝나면서 국방예산이 줄어들자 국방관련 조직과 군수산업체에는 마치 마약중독자에게 마약 투입을 중단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금단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방예산 감축에 따른 금단현상이 가장 심한 곳은 아무래도 군수산업체였다. 국방예산 가운데서 군수산업체 몫으로 들어가는 빵의 전체크기(군복에서부터 항공모함에 이르기까지)가 87년에는 무려 2천60억 달러였는데,92년에는 1천6백10억 달러로 22%나 줄어들었다.약 3백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 10%가 넘는 31만 명의 군수공장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적절한 위기’인 바로 전쟁이 필요했다.

걸프전쟁의 위기가 크게 고조될 당시의 한겨레신문 94년 2월 2일자 외신 면을 살짝 보자.

미 중앙정보국(CIA) 전 요원이었던 필립 에이지는 "군산복합체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위기’가 필요하며, 걸프전쟁은 바로 미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군사적 케인스 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했다.

또 지칠 줄 모르는 록펠러-모건 재벌의 007 무기 가방은 유고로 향했다..

미국과 나토의 유고에 대한 침략전쟁행위는 미국 군산복합체들의 이윤추구에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고전쟁에서 군산복합체들이 신이 났다.

미국의 유고침략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산복합체들의 월스트리트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다. 미국의 침략전쟁행위가 두 달이 채 되기 전 미국하원은 99년 5월 18일 120억 달러의 전쟁 지원금을 통과시켰다. 상원통과는 물어 볼 필요도 없다.

4월 17일 `워싱턴 포스트`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교적 자세하게 무기제조업체들의 이윤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상하원의 뒷이야기 기사를 다루었다. 물론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굴지의 신문 방송들도 발칸전쟁 발발 이후 월스트리트의 군산복합체 주가들이 횡재 만난듯 껑충 뛰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미 공군이 세계 제1의 군산복합체인 록히드 마틴사(Lockheed Martin Corp.)에게 "21세기형 순항미사일"(21st-century cruise missile) 제조를 주문하는데 30억 달러를 지불했다고 밝혔다. 역시 같은 기사는 미 해군 또한 새로운 형태의 미사일개발을 위해 굴지의 미사일제조업체인 레이시온사 (Raytheon Corp.)와 8억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전했다. 그들은 또한 현재 소유하고 있는 624개의 구식 순항미사일을 배 모양 형태의 미사일로 바꾸는데 긴급예산에서 4억 2천만 달러를 지출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폭격이 두 달 가까워 오면서 역시 굴지의 미국 군산복합체 중의 하나인 보잉(Boeing)과 그 계열사들은 그들의 이해를 성실히 대변하는 공화당의원들을 동원하여 미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모든 무기장사꾼들의 활기 띤 거래는 워싱턴 포스트지를 비롯한 미국 주요신문들에 유고폭격에 동원되고 있는 전함과 폭격기들이 사용하고 있는 미사일의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사가 나온 직후의 이야기들이다.

미국의 건국이 원주민 대량학살로 이루어졌다면, 건국 이후의 역사는 해외침략과 전쟁,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으로 이루어진 역사다. 19세기 이후 2백년 동안 미국의 해외침략사와 전쟁사, 내정간섭의 역사는 끝이 없다.

트리폴리 전쟁 (1801∼1805), 모로코와 전쟁 (1801∼1805), 스페인과 전쟁 (1803∼1806), 캐나다와 플로리다를 빼앗긴 위해 영국에 선전포고 (1812∼1815).... 중국 상해, 광동 침공 (1854∼1856)...조선 침공 (1867∼1872)....하와이 제도 병탄 (1898)...조선 상륙 (1904), ...니카라과 침공 (1926∼1933)...코리아 전쟁 (1950∼1953)...통킹만 무력도발 (1964), 베트남 전쟁 (1964∼1972)...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1973)...이란에 대한 군사행동 (1979∼1981), 카스트로 암살 기도 (1960∼1981), 카다피 암살계획 (1981)...인디라 간디에 대한 음모 (1981)...그레나다 침공 (1983), 걸프전 (1990-1991), 소말리아 무력개입 (1992-1995), 수단, 아프가니스탄 미사일 공격, 이라크 공격 (1998), 유고연방 침공 (1999), 이라크 공격 (2000),이라크 공습 (20001 2월).

지난 200년 동안 세계 민중이 겪어온 역사적 경험은 미 군산복합체는 제3세계에 대한 지배와 약탈을 강요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데서 미 민주당 세력이나 공화당 세력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록펠러- 모건재벌과 노벨 평화상

다만 전쟁사 그 어디에도 록펠러나 모건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꼭꼭 숨어있을 뿐이다.

위에 살펴 본 해외침략, 내정간섭, 해외비밀공작, 전쟁에 대해서도 미국은 자국에게 유리하게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세상사람들이 모르게 덮어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적어도 2백년이 넘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이제는 거의 체질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년간의 전쟁에 깊숙히 개입한 루즈벨트, 루트, 우드로 윌슨, 찰스 도즈, 조지 마샬 등의 자랑스러운(?) 노벨 평화상 수상자 6명은 군산복합체 록펠러나 모건 연합의 대표들이다. 또 헨리 키신저도 수상자였다. 오른손으로 평화를 내세우며 왼손으로 전쟁을 수행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면모를 보여준다. 노벨 평화상은 전쟁수행을 위한 `케인즈의 경제학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스웨덴의 다이너마이트 제조업자 노벨은 그의 군수공장 `보펄즈`의 미국지점인 [듀퐁]탄약제조업체를 탄생케 하고 모건 상사와 1~2차 세계대전을 치룬 병기업자였기 때문에 노벨상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짜고 치는 수상잔치인 것이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데이비스 컵` 테니스 대회의 데이비스는 `모건 상사`와 손잡고 나치스에 융자한 [전쟁금융회사] 중역이었으며, 록펠러가 투자한 콜럼비아 대학에 저널리즘학과가 생기면서 퓰리처상이 탄생했고, 그래미상의 비밀 투표용지는 `디트로이트 하킨즈 세일즈 회계사무소`에 보관되는데 이 사무소는 록펠러 가의 군수산업에서 중추적 지위를 차지하며 악명높은 월스리트 가의 8대 사무소의 하나다. 퓰리처상, 그래미상,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환상에서 언제까지 헤맬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이 이런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