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CIA 추락하는 것은 날개도 없다?


탈냉전시대에도 007과 같은 첩보요원이 필요할까
냉전시대에 미국의 눈과 귀로 각광받던 CIA가 각종 비리사건이 폭로되면서 몰락 의 길을 걷고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수호를 앞세워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했던 CIA도 역사의 심판 앞에서는 무기력한 것인가 추락하는 CIA대신 정보기구의 1인자로 급부상한 것은 FBI다.

최근 미 중앙정보국(CIA)의 한 부서에서 의외로 많은 요원들이 사표를 내고 나가버려 그 이유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다. CIA의 고위당국자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90년대 들어 수년간 해당부서에서만 젊은 비밀 공작요원 10여명이 이직했다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96년 1월26일자 2면에 이같은 기사를 게재하고 탈냉전시대 CIA의 임무와 사기문제를 다뤘다. CIA의 대변인 마크 맨스필드는 특정 부서의 명칭을 공개하진 않았으나 「워싱턴 포스트지」는 그것이 극동국 소속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미국에서 이직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처럼 직장을 옮기는 데 사회윤리적 부담감도 거의 없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서는 국익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강한 CIA요원들이 줄줄이 그만두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조사는 우선 CIA가 타국으로부터 은밀히 사주받은 흔적이 있는지의 여부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CIA요원들의 사기와 직업관 등에 변화를 준 내부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구체적인 결과가 발표되지 않더라도 CIA요원들이 과거 냉전시대만큼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거대한 적국 공산 소련이 무너지자 그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던 국가안보기구의 존재의미에 대해 미국인들의 평가가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CIA 같은 정보기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해외주둔군 감축과 국방예산 삭감 압력 등으로 군부 역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미 군부의 경우 소련 붕괴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아랍국가들의 적대행위를 응징하는 등 그런대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91년 1월의 걸프전은 미국민들에게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제 미국의 적대세력은 아랍권을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 산재해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냉전이 종식된 후 인종 종교 언어가 다른 이질문명권으로부터의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미국의 장래를 좌우한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안보관은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이른바 「문명충돌론(The Clash of Civili-zations)」으로 대표되고 있다. 헌팅턴은 탈냉전시대 미국의 새로운 적대세력이 아시아와 중근동지역의 이슬람 불교 유교권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지역이 그리스도 기독교와는 다른 정교회(Orthodox)를 믿는 이질성 때문에 궁극적으로 미국과 유럽에 의한 서구문명권에 통합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국사회를 주도하는 핵심계층의 이같은 보수적 역사관이 계속되는 한 군사력 유지의 필요성은 항상 충분한 지지기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국력을 과시하는 직접적 수단인 군에 비해 정보기관은 숨어서 일하기 때문에 그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의 군사행동을 비롯한 주요 대외정책 수행은 대부분 정보기관들의 사전지원을 받고 있다.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는 집중적인 정보 수집과 비밀공작이 가해진다. 그러나 평소 중요한 것은 국가정보 요약보고서(NID:National Intelligence Digest)로 이것이 세계 구석 구석을 들여다보는 미국정부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한다. 이 보고서가 바로 CIA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들에 의해 작성되는 것이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등의 수뇌부에 정기적으로 배부되는 이 정보보고서가 정책결정자들의 기초 판단자료가 된다. 따라서 단순화시켜 서 말하자면 정보수집 활동이 부실하고 그 결과 정보보고서가 엉터리로 작성될 경우 미국의 정책결정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 단적인 예가 지미 카터 행정부(1977∼81) 시절, 주(駐)이란 미국대사관 인질구출 실패사건이다. 당시 CIA국장은 카터 대통령의 해군사 관학교 동기생인 스탠즈필드 터너 제독.

터너는 고도의 기술군인 미 해군 제독 출신으로 베테랑 요원에 의한 정보수집보다는 과학기술력을 이용한 정보활동을 중시했다. 또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카터 대통령의 친구답게 도덕주의자인 점도 기존의 CIA 국장들과는 차별화됐다.

이 두 가지 특징을 지닌 터너 국장은 취임하자마자 CIA의 개혁을 단행했다. 고참요원들의 대량감원이 단행된 데 이어 수백명의 정보인력이 감축됐다. 그러자 CIA 토착세력들이 이에 대해 반발, 사보타주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에서 인질사건이 터질 것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조기에 첩보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사건이 벌어지자 백악관은 기습공격에 의한 인질구출 작전을 입안했다. 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가 우간다의 엔테베공항에서 팔레스 타인 게릴라들의 인질극을 일거에 소탕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미 해병대가 테헤란에 접근해 보지도 못한 채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망신이었으며 대내적으로는 카터 행정부에 대한 미국민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리는 결과가 됐다.


레이건 시대의 전성기

카터 대통령의 재선을 좌절시키고 백악관에 입성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1∼88)은 미 공화당 노선에 걸맞게 도덕과 이상보다는 미국의 국가위신과 현실 중시 정책을 폈다. 레이건은 카터 행정부 시절 위축된 CIA를 중흥시켰다.

레이건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위대한 미국 건설」은 경제적으로 레이거노믹스와 함께 외교안보면에서 군사력증강과 국가정보기구 확충 을 통해 시도됐다.

레이건은 취임 첫해인 81년 12월, 당시 60억달러였던 CIA 연간예산을 4년 후 무려 세배 반에 해당하는 2백억 달러로 증액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만 보아도 정권의 국가경영 철학에 따라 정보기관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 있다.

카터 행정부시절 CIA의 위상이 추락한 결과 80년 요원모집 응모자는 9천2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 2기 첫해인 85년엔 무려 15만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려 대조를 이루었다.

레이건 행정부시절 윌리엄 케이시 CIA국장은 정보기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CIA인력을 30% 이상 증원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보기관으로 이름을 날렸던 전략지원국(OSS) 출신인 그는, 순수한 정보수집보다 정치·군사적 공작을 좋아했 다. 레이건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제3세계 분쟁지역에서 50여건에 달하는 비밀공작을 벌였다. 아프가니스탄 무기지원과 니카라과의 콘트라반군 재정지원, 그라나다 침공 등 레이건 시절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힘이 행사됐으며 이 모두가 CIA의 작품이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시대상황이 바뀌자 그런 비밀공작의 부작용들이 CIA의 업보로 다가왔다. 과거 CIA의 비리가 곳곳에서 폭로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묵인됐던 CIA의 비인도주의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적들이 규탄의 대상이 됐다. 물론 CIA의 입장에서 보면 냉전시대에 국가 이익과 세계안보를 위해 불가피했던 일들이 냉전종식 후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비판받는 것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CIA의 비리 중에는 냉전이냐 탈냉전이냐의 시대상황과 관계없이 보편적 규범에 역행하는 반문명적 행위도 있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같은 과거 행적에 대한 미국내 비판여론이 CIA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카터 시절 CIA 요원들이 대량 감원되는 사태는 있었어도 자진 사표를 내는 일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집단 사직사태를 맞은 지금의 CIA는 몰락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련 같은 거대한 적이 사라지자 정보기관이 외교안보 지원이라는 본래 임무보다 마약밀매와 같은 국제 조직범죄 감시에 더 자주 동원되는 실정이라는 것.

이로 인해 신세대 정보요원들은 CIA 근무를 통해 보람이나 명예심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됐다.

한편 고참 정보원들은 윌리엄 케이시 국장 시절 무분별한 증원정책으로 인해 CIA가 내밀한 특수기관 성격에서 일반 관료집단으로 전락 했다고 불평한다.


병든 CIA 떠맡은 레이크 국장

지난 93년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한 후 제임스 울시와 존 도이치 국장이 여성과 소수민족계를 상당수 채용했는데, 이는 미국의 지배계층인 명문대학 출신 백인 중심의 CIA구성원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즉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집단인 CIA에 물타기가 행해져 이제는 핵심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고참요원들이 CIA를 떠나 는 중요한 이유로 이런 불만들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12월6일 신임 CIA국장으로 지명된 앤소니 레이크 역시 하버드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프린스턴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은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과 함께 CIA국장을 새로이 지명함 으로써 자신의 집권 2기 외교안보팀을 일신했다.

이들 클린턴의 새 외교안보팀은 상원의 인준을 거쳐야 정식 임명되는데, 미국 언론들은 레이크 국장의 프로필에서 냉전 이후 전환기의 CIA를 어떻게 요리해갈지 궁금하다고 썼다. 또 그가 합리적이고 온순한 성격이어서 거칠고 텃세가 강한 CIA를 제대로 장악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다.

레이크 국장은 그의 전력으로 보아 CIA 토착세력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제3세계에 대한 비밀공작강화 등의 방식으로 탈냉전기 정보기관의 중흥을 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닉슨 행정부(1969∼74) 시절 키신저 백악관 안보특보팀의 일원이었던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중인 미군 이 베트콩기지 소탕작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닉슨행정부와 결별했다.

미국의 무분별한 군사행동에 반대하고 대외정책에서 나름대로 도덕적 기준을 확고히 지키겠다는 표시였다. 그 후 레이크는 미 동부 매사추세츠의 농장에서 양을 기르며 대학에 출강하는 전원생활을 즐겼다.

미국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대중지 「유 에스 에이 투데이」는 96년 12월9일자 기사에서 『레이크는 생색 안 나는 피를 흘리면서 세계문제에 개입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미국을 지키는 실용주의에 도덕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평했다.

이어 이 신문은 그가 정부기구 중 도덕적으로 가장 모호하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기관에서 일을 시작한다고 썼다. 레이크 자신은 CIA의 임무에 대해 『테러와 무기증강으로부터 미국민을 보호하고, 대통령에게 적국 동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원론적인 수준의 발언이지만 비밀공작이나 권력행사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신임국장인 그가 추락하는 CIA에 어떻게 날개 를 달아줄 것인지 자못 주목된다.

그러나 도덕성면에서 강점을 지닌 것 같은 레이크도 백악관 안보보좌관 재임중의 실책 때문에 쉽게 상원인준을 받기 어려우리란 전망도 제기됐다. 그의 실책은 지난 94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란의 무기공급을 묵인했다는 것.

또 백악관 보좌관들은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된 증권을 사들였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란은 비밀리에 보스니아 회교정부에게 무기를 공급했으며, 이를 미 정부 당국자가 묵인한 것은 유엔의 금수조치와 미국의 이란 고립화정책을 위반한 것이라고 상원에서 발표 된 바 있다. 레이크는 이 문제와의 관련사실을 부인했으나 상원 청문회에서 혐의를 벗지 못하는 한 인준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퇴임이 예정된 존 도이치 현 CIA국장은 후임으로 지명된 레이크의 상원인준 여부와 관계없이 조기 사임할 방침이다. 도이치는 새 외교안보팀의 국방장관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지명 탈락에 불만, 업무를 부국장에게 맡기고 물러날 뜻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되면 CIA는 항해사를 잃은 함정 신세로의 몰락현상이 가속화될 조짐이다.


CIA의 뿌리 OSS

오늘날 CIA 몰락의 원인을 알려면 그 태생과정과 과거 냉전시대의 「명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CIA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전략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해리 트루먼 행정부(1945∼53)에 의해 청설됐다. CIA는 전형적인 냉전의 산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 등 극우 전체주의에 대결하기 위한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에 공산정권들이 들어서고, 이어 그리스와 터키 내전에서도 공산권이 좌익세력 을 지원하자 미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수호에 나선다.

47년 3월 트루먼 행정부는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자금으로 4억달러를 의회에 요청하면서 공산주의 팽창전략에 대한 봉쇄정책을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트루만 독트린이다. 이는 소련과 동구공산권이 붕괴된 90년대 초까지 반세기 가까이 계속된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어 48년 3월 트루먼 행정부는 서구자본주의 부흥을 위한 마셜플랜을 확정, 54억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소련과의 대결정책에 쏟아붓 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공산권 대봉쇄전략의 일환으로 47년 7월 CIA가 창설된 것이다. 미 국가안보회의(NSC) 산하 정보기관으로 탄생 한 CIA의 뿌리는 영국 대외첩보국(MI-6)의 도움으로 조직된 OSS였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국가정보기구의 창설을 구상한 사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933∼45)의 친구였던 윌리엄 도노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데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두 배경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보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무기가 됐다.

오늘날 미국이 이같은 정보력을 갖도록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백만장자 윌리엄 도노반이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컬럼비아대 법과 대학 동기생으로 젊은 시절 백인 상류층에 기반을 둔 변호사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용명을 날린 「뉴욕 69연대」 소 속 장교로 싸웠다. 22년에는 뉴욕 서부의 지방검사로 일했으며 24년부터 5년간 법무차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이후 미 재계의 중심지인 뉴욕 월가에서 명망 있는 법률가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루스벨트에게 중앙정보기구가 전쟁수행에 긴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40년 두 차례에 걸쳐 도노반을 런던에 파견했다. 영국의 첩보기구를 견학한 도노 반은 루스벨트에게 중앙정보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던 중 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루스벨트 행정부는 2차대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종합정보기구의 창설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42년 6월 대통령령으로 OSS가 설치됐으며 그 초대 국장에 도노반이 임명된다. 당시 OSS가 부여받은 미국사회내에서의 성격과 구조가 차후 CIA로 이어졌다.

도노반 국장은 OSS의 기간요원으로 하버드 예일 등 동부 명문대학 출신들을 다수 받아들였다. 이들 중에서도 핵심인물들은 미국갑부들 의 본거지인 월가와 깊은 인연을 맺은 변호사 출신이었다. 한 OSS기록에 따르면 초창기인 43년에는 예일대 출신만 대거 42명이 OSS에 들어갔다.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45년 3월 대통령직을 계승한 트루먼은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45년 9월 OSS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트루먼 은 비밀공작 활동을 주임무로 하는 정보기관이란 전시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보그룹의 대부(代父)로 정계에 영향력을 미 치던 도노반은 평화시에도 중앙정보기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트루먼도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냉전전략의 중심기구로서 OSS 같은 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됐다.

CIA의 발족을 앞두고 군부와 연방수사국(FBI)은 새 정보기구를 강력하게 견제하고 나섰다. 당시까지 군사정보는 육군과 해군이 각각 수집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 발족한 중앙정보국이 모든 대외정보 관할권을 장악하게 되자 기존의 군사정보 그룹과 FBI는 내심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중앙정보국의 역할은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대세로 굳어졌다. 이후 CIA는 미 정보기관들의 총괄역할을 하면서 냉전시대의 총아가 됐다.


냄새나는 비밀공작

냉전기 CIA가 수행한 비밀공작은 알려진 것만 해도 다 헤아리기 어렵다. 53년 이란의 내부 권력갈등에 개입해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하 고 팔레비의 왕정복고를 성사시켰으며, 54년엔 과테말라에서 좌익정권을 전복시켰다. 미국은 주적(主敵)인 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 초강국에 대결하는 것 외에도 제3세계 국가들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반미정부가 아니고 우방동맹국이라 해도 미국의 정책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내려지면 정권을 바꾸기 위한 군부 쿠데타를 사주했다 . 심지어 우방국의 국가 원수 암살공작도 다반사로 감행했다.

CIA의 전성기는 비밀공작으로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들을 암살하던 60년대와 70년대였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CIA의 후진국 지도자 제거공작의 대표적인 경우가 남베트남 대통령 고딘 디엠의 암살이다.

고 딘 디엠은 카톨릭을 믿는 베트남 상류층 출신으로 54년 미국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친족들을 중심으로 독재정권을 세운 뒤 자신의 종교인 카톨릭을 지나치게 두둔해 베트남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도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처음 CIA는 그의 동생 고 딘 누가 지휘하는 비밀경찰의 조직훈련을 지원했다. 이들 족벌독재정권은 수많은 불교도들을 공산주의 배후조종 혐의로 투옥, 처형했다.

이에 미 국무부는 베트남정부와의 관계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63년 8월 고 딘 누의 지령을 받은 비밀경찰이 반정부세력의 거점인 한 불교사찰을 습격한 사건으로 베트남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대외정책에서 도덕성과 인권문제를 중시하던 케네디 행정부는 마침내 고 딘 디엠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베트남의 군부쿠데타 계획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63년 10월 말 헨리로지 주(駐)사이공 미국대사는 현지 CIA지부를 통해 베트남 군부의 쿠데타일정을 통보받는다. 11월1일 군부쿠데타는 성공을 거뒀고 고 딘 디엠과 고 딘 누 형제는 피살체로 발견됐다.

이어 이들을 사살했다는 군장교도 며칠 뒤 목을 맨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같은 쿠데타 시나리오의 배후에 CIA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통설로 돼 있다.

5·16군사 쿠데타 초기 朴正熙(박정희) 소장도 미군사정보기관의 제거 대상이었다. 당시 쿠데타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한 매그루더 주한 미 8군사령관 등 미 군부는 쿠데타 주모자에 대한 제거공작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CIA한국지부장이던 피어 드 실버가 박정희의 정보인맥인 李厚洛(이후락) 朴鍾圭(박종규)와 뜻이 통하는 바람에 5·16세력은 CIA의 거세공작을 피할 수 있었다.

실버가 지난 74년 펴낸 회고록 『서브 로자』에 따르면 5·16 직전 CIA한국지부는 張勉(장면)정부에게 중앙정보기구 창설을 권유했다. CIA지부는 장면에게 중앙정보기구의 조직과 훈련, 자금지원 등을 제의하면서 대신 이후락을 책임자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락이 한국군 정보장교로 있으면서 미 정보그룹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또 쿠데타 당일 새벽 실버 지부장은 쿠데타 세력과의 첫 통화에서 박종규를 알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박종규는 이후 주한미군측의 강력한 압력 속에서도 CIA한국지부를 통해 미 행정부가 한국의 새 정권수립을 인정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70년대 CIA의 비밀공작의 정점은 칠레 좌익정권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그를 암살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아옌데는 70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수의 지지표를 얻어 집권했다.

그는 취임 후 칠레내 미국소유의 구리광산을 무상으로 몰수하면서 미국과 대결국면에 들어간다. 국내적으로 노동자 농민계층의 절대적 인 지지를 받으면서 그는 중국 쿠바와 수교하는 등 보란 듯이 미국의 비위에 거슬리는 노선을 걸었다. 73년 총선에서는 그가 이끄는 정당이 44%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당연히 미국의 심기가 편안할 수 없었다. 강력한 외교안보 정책을 펴온 닉슨 대통령은 리처드 헬름즈 CIA국장에게 아옌데 제거 쿠데타 를 주문했다. 이에 따라 CIA는 정예요원으로 「트랙 2」라는 암호명의 특공대를 조직한다.

CIA특공대가 칠레군부에 쿠데타를 사주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칠레군부내에서도 강직한 인물로 소문난 육군참모총장 슈나이더였다. 슈나이더는 청렴결백하고 헌정수호에 충실한 장군이었다. CIA는 외교행낭을 통해 권력욕에 사로잡힌 칠레군 장교에게 저격용 고성능 총기를 전달한다.

그로부터 수시간 후 슈나이더 장군은 출근길에 피살당했다. 이어 73년 9월11일 우익 영관장교들의 쿠데타가 발생,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숨졌다.


마약밀매방조·덜미잡힌 간첩

이같이 맹위를 떨쳤던 CIA가 96년부터 급격히 몰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첫째는 CIA가 86년 니카라과 반정부 게릴라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내에서의 마약밀매를 방조했다는 사실이 지난해 9월부터 10월까지 미 언론들에 의해 폭로된 것.

마약밀매 시장이 미국 제2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였으며 이곳 흑인들을 대상으로 팔았다는 점에서 더욱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약밀매 연루란 비도덕성에다 흑인을 상대로 했다는 것 때문에 인종갈등문제로까지 번져 CIA는 궁지에 몰렸다.


두번째는 CIA 내부의 간첩사건

지난 94년 최대간첩사건으로 불렸던 에임즈 사건에 버금가는 것으로 CIA중견간부가 러시아에 매수돼 기밀사항을 넘겨준 것이 드러난 것이다.아무튼 마약밀매 연루사건은 수년간 쌓아온 CIA의 업적과 명예에 먹칠을 했고, CIA의 실체와 존재이유마저 논란의 대상이 됐다.

국가정보기관의 임무는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증진에 있다. 그런 정보기관이 자국내에서 다른 나라 반정부 게릴라단체가 마약을 밀매 해 군자금을 조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방조 내지 묵인했다면 그 존재이유가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시점인 8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흑인 거주지는 크랙이라 불리는 정제 코카인의 천국이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뿐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남부 해안지역은 마약과 관련된 강력범죄가 극성을 부렸다. 바로 그 사회범죄의 배후에 CIA의 대외공작 활동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맨처음 터트린 것은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산호세에서 발행되는 「머큐리 뉴스」라는 지방신문이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마약밀거래 조직이 지난 80년대에 코카인 수천t을 로스앤젤레스 갱단에게 팔았으며 여기서 남은 거액의 이익금을 CIA가 지원하는 니카라과 반군에게 주었다는 것.

이 신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약을 밀매한 니카라과인은 다닐로 블란돈과 노르윈 메네세스라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밝혔다. 이들은 CIA의 지원 아래 조직된 니카라과 반공특공대의 민간인 지휘자였다. 이렇게 마약밀매로 벌어들인 수익금이 10여년 동안 니카라과의 우익 콘트라반군에게 무기구입 군자금으로 제공됐다.

미국 서부지역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가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도 96년 10월8일 이 문제를 심층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당시 FBI 및 마약단속국과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콘트라반군에게 돈을 대준 마약사범들의 거점 12곳을 급습했다.

이 수사로 콘트라반군이 남부 캘리포니아에 코카인을 대량 반입하고 있으며 주로 흑인들에게 팔고 있다는 증거가 잡혔다. 이 마약밀매 범들의 집에서 한 피의자는 『나는 CIA와 함께 일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언론의 폭로기사들이 흑인사회에 널리 전파됨에 따라 로스앤젤레스에서 2천여명의 흑인들이 격렬한 항의데모를 벌였다. 흑인지도자들은 이번 사건을 흑인에 대한 CIA의 조직적인 대량학살 음모라고 규탄했다.

민권 운동가들은 『CIA의 마약음모설은 소수민족의 발전을 방해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비난했다. 워싱턴의 흑인 작가 겸 정신과 의사 인 프랜시스 웰싱박사는 『이 언론보도가 사실이라면 대량학살 기도로 나치에 대해 단죄했던 뉘른베르크 재판 같은 것이 필요할 것』 이라고 말했다.

언론의 폭로와 공격에 CIA의 존 도이치 국장은 『정보수집을 위해서는 일부 범죄자들과 접촉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정보를 얻기 위해 부정과 비리행위를 감수해야 한다는 언급이지만 냉전이 종식된 오늘날 CIA의 그런 비행이 정당화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CIA가 마약밀매 연루사건으로 곤경을 치른 직후인 96년 11월19일, CIA간부가 수년간 러시아에 기밀을 팔아온 혐의로 체포됐다. 이 CIA 내부 러시아간첩을 색출한 기관은 다름 아닌 FBI였다.

CIA는 지난 94년 고위간부인 올드리치 에임즈가 10여년간 러시아의 간첩으로 암약했음이 드러난 후 FBI의 집중감시를 받아왔다.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이 사건으로 에임즈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FBI는 그 후에도 또 다른 첩자가 CIA내에 숨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것이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이번에 FBI에 체포된 CIA간부는 오랜 공작원경력을 가진 훈련원 교수 헤럴드 니콜슨(46). FBI의 초동수사 결과 그는 지난 94년 6월부터 체포될 때까지 러시아에 CIA요원들의 인적 사항과 해외파견 예정자 명단 등을 제공하고 10만달러 이상의 현금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결과는 FBI의 루이스 프리 국장과 CIA의 존 도이치 국장이 합동기자회견 형식을 빌려 발표했다. 두 기관간의 미묘한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두 국장은 『니콜슨이 모스크바 등 해외에 파견될 CIA요원들의 명단을 모스크바에 넘겨준 혐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 FBI는 『니콜슨이 신입요원들의 인적 사항은 물론이고 해외의 현장 공작원들이 보낸 비밀보고서까지 입수할 수 있는 위치에서 근무했다』고 밝혔다.

니콜슨은 CIA에서 16년간 일해온 중견간부로 루마니아 지부장과 말레이시아 부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최근에는 버지니아에 위치한 CIA 의 암호명 「농장」이라 불리는 훈련원에서 외국인 포섭공작 등을 가르쳐왔다.

소련이 붕괴한 후 밀월관계를 유지해온 미국과 러시아는 이번 사건으로 외교적 갈등국면을 맞았다. 미국정부가 니콜슨 간첩사건에 대해 러시아측에 해명을 요구하면서 미국의 보복 가능성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스트로브 탈보트 국무부 부장관은 러시아의 유리 보론초프 워싱턴주재대사를 국무부로 불러 『이번 일은 용납할 수 없으며 미국이 대응조치 권한을 유보하고 있다』고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국무부 고위당국자들도 한결같이 미국정부가 적절한 대응조치를 검토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앞으로도 에임즈나 니콜슨 같은 간첩사 건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2배로 늘어날 FBI 해외 지부

이같은 일련의 CIA비리 사건을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참모들 사이에서는 정보기구 개혁과 개편론이 나오고 있다. 미여론층에서는 CIA폐지론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폐지는 아니더라도 CIA의 조직과 예산 인력 등이 크게 정비될 조짐이다.

많은 영역을 FBI나 다른 신생 정보기관에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지난해 10월11일 미국산업정보의 대외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경제스파이 처벌법」이 새로이 발효됐지만 이 법에 의해 활동영역이 확대되는 기관은 FBI일 것으로 보인다.

CIA의 몰락현상을 더욱 눈에 띄게 하는 것은 대조적인 FBI의 신장세다. FBI는 오는 2000년까지 세계 23개국에 해외지부를 신설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도 98년 FBI지부가 설치된다. 이는 FBI해외지부가 현재보다 거의 2배로 늘어남을 뜻한다.

국내범죄 수사가 임무인 FBI의 이같은 해외업무 확대계획은 바로 정보수사기관의 역할과 위상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냉전종식과 비리폭로, 간첩사건 등으로 위축된 CIA의 활동영역을 FBI가 파고 들어가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CIA측은 『수사권한의 지나친 확대해석이며 중복활동으로 인한 예산낭비』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FBI의 루이스 프리 국장은 『최악의 범죄들이 국제화되고 있다』면서 『국제범죄를 사전에 차단하는 원격정보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으로서는 FBI의 팽창을 막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CIA의 고유업무였던 해외에서의 정보수사활동은 상당 부분 FBI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현재 CIA국장 관할이 아닌 주요 정보기관은 법무부장관의 지휘를 받는 FBI 외에 국무부 산하의 정보분석기관인 정보조사국(INR)이 있다. 그리고 CIA가 총괄하는 국가정보기관으로 국가안보국(NSA) 국가정찰국(NRO) 국방정보국(DIA) 국방지도제작국(DMR) 중앙화상국(CIO) 등이 있다.

이중 CIO는 신생정보기관으로 첨단영역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갈수록 정보수집과 분석평가가 전문화 세분화돼 이런 각종 정보기 관들에게 이관되는 추세다.

미국의 총정보예산은 국방비의 약 10% 정도라고 한다. 이 중 1백40억 달러(한화 약 11조2천억원)에 대해 CIA국장이 관할 정보기관들에 나누어주는 배정권을 갖는다. 약 2만여명을 거느리고 있는 CIA가 직접 사용하는 연간 예산액은 28억여달러(한화 약 2조2천4백억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산을 가장 많이 쓰는 정보기관은 NRO로 50여억달러가 배정된다. NRO는 미국 전체 정보공동체의 위성정찰 계획을 관리하며 위성을 이용해 수집되는 사진과 신호정보의 분석을 담당한다. 극비에 가려져 「흑색기관」이라 불리는 NRO는 고도의 과학기술력으로 운영된다.

지난 60년 5월 소련 상공에서 추락한 U-2첩보기도 바로 이 NRO소속이었다. NSA도 6만여명의 요원을 거느리고 연간 40억달러를 쓰는 거대한 조직이다. 베일에 싸인 NSA는 세계도처에서 통신도청과 암호감청을 주임무로 하고 있다. 지난 7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참모들의 비밀회의가 미 정보기관에 의해 도청당해 파문을 빚은 일이 있다. 당시 미정보기관은 CIA로 알려졌으나 바로 이 NSA의 작품이었다.

이런 과학기술에 의한 첩보활동이 발전되면 CIA의 영향력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보전문가들은 필수정보란 대기공간이나 전화선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접하는 인물과 지상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CIA가 그 임무와 조직을 잘 개혁한다면 제아무리 첨단과학을 이용한 정보기관이 생겨난다고 해도 계속 활용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CIA의 몰락은 마치 한국의 정치군인집단 하나회처럼 과거비리가 그 원죄로 작용한 것이다. 도덕성을 중시해온 민주당 출신의 클린턴 행정부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자못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