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산하고 싶다”
 

빚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용불량자들의 마지막 탈출구… ‘면책결정’으로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선다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은 자유를 팔러 가는 것이다.”

미국 100달러짜리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김연길(37·가명·서울 은평구)씨는 요즘 이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외환위기 뒤 기업부도가 많았던 지난 1998년 회사가 문을 닫아 실직자가 되면서 그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보습학원을 차렸지만 실패했고, 다단계판매에 손을 댔다가 빚만 더욱 늘었다. 생활비와 이자 때문에 자꾸만 카드를 쓰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를 더 만들어 이른바 ‘돌려막기’를 시작했다.

미래가 암담한 신용불량자 322만명

김씨의 빚은 현재 7천만여원으로 불어나 있다. 그는 올 들어 어렵게 취직을 해 한달에 150만원가량을 벌지만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이자 갚는 데 쏟아붓고 있다. 아직 신용불량자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다. 이 상태로는 평생을 고생해도 빚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곤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뿐이다.

빚의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신용불량자가 김씨와 비슷하게 빚이 불어나는 길을 걸어왔다. 다만 신용불량자들의 경우, 이제 더는 빚을 내서 이자를 갚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이 진 빚은 오늘도 고리의 연체이자가 붙어 눈덩이처럼 계속 불어나고 있다. 지난 6월 말 현재 신용불량자 수는 무려 322만명. 경제활동인구의 15%에 이른다. 이들에게 로또복권 말고 다른 희망이 있을까?

지난 8월14일 서울 명동 센트럴빌딩 신용회복지원위원회. 6층에 자리잡은 20여개 상담창구에는 신용회복지원 상담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상담을 하거나 신용회복지원신청 접수를 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은 엘리베이터 앞과 계단까지 점령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하루 400여명. 이 중 200여명이 신용회복지원 신청을 하고 있다. 7층 전화상담실에도 하루 1천여명이 상담을 신청한다.

지난해 11월부터 도입된 신용회복지원제도는 상당수 신용불량자들에게 한줄기 빛을 던져주고 있다. 5개 금융기관에 연체이자를 포함해 3400만여원의 빚을 지고 있던 김아무개(28·인천 남구)씨는 지난해 12월 신용회복지원 신청을 했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그동안 발생한 이자(원리금의 24%)를 감면해주고, 그동안 적용되던 19%의 이자도 10%로 낮춰주도록 제안했다. 금융기관들의 동의로 그는 이제 5년 동안 매달 56만원씩 2653만원만 갚으면 빚에서 해방될 수 있다. 김씨처럼 개인 워크아웃을 받은 사람은 7월 말까지 3631명, 현재 절차가 진행 중인 사람도 1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워크아웃 제도만으로 신용불량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우선 신용회복지원협약을 맺지 않은 금융기관에 진 빚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새마을금고에서 돈을 빌렸거나 사채를 끌어쓴 사람들은 이 제도를 이용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소득에 비해 빚이 많은 사람들이 문제다.

최근 워크아웃을 받은 진아무개(40)씨의 경우 원리금의 3.9%에 이르는 이자를 감면받고 남은 돈을 8년간 나눠 갚기로 했다. 하지만 애초 빚이 너무 많아 남은 빚이 1억원을


넘는다. 그는 앞으로 8년 동안 매달 160만원 이상을 계속 갚아야 한다. 그 사이 소득이 불안정해지면 그는 다시 한번 주저앉을 수도 있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 전화상담원 김영경(35)씨는 “하루에 걸려오는 50건 안팎의 상담전화 중 30%가량은 소득액이 적어 신용회복지원을 아예 신청하기 어려운 경우”라고 말했다.

파산, 채무자의 갱생을 지원한다

신용회복지원제도의 맹점은 지나치게 채권자 중심이라는 데 있다. 채권자의 채권회수에 일차적인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원금의 대폭적인 감면 등을 통한 채무자의 갱생 지원은 거의 이뤄지지 못한다. 1억원 안팎의 빚을 진 신용불량자들이 8년간에 걸쳐 빚을 갚아나갈 경우 원리금 중 이자 감면율은 5% 안팎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8년간 월 150만원 이상씩 계속 갚아나가려면 월소득이 250만원은 돼야 한다. 신용불량자 중 그 정도 소득이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신용회복지원제도를 통해서도 갱생을 꾀하기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져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안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전문가들은 빚이 자신의 수입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개인파산’을 적극 검토하라고 충고한다. 개인파산은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파산상태’임을 법원이 선고하는 제도다. 파산선고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이 제도는 파산선고 뒤 ‘면책’제도를 통해 빚을 탕감해줌으로써, 빚의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부 박아무개(50)씨는 외환위기 당시 남편이 실직하자 주변사람들에게 1천만원을 빌려 식당을 운영하다 실패해 오히려 빚을 졌다. 이자부담은 계속되고, 카드로 생활비를 충당하다보니 빚이 7천만원까지 늘었다. 그는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았다. 이어 지난 5월 면책결정도 받았다. 면책결정이란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사업을 하다 실패해 빚을 진 경우 면책은 비교적 쉽게 이뤄진다. 채권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이제 빚 없이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됐다.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인터넷 홈페이지(www.adamoa.net)를 운영하고 있는 유재민(27)씨도 파산제도를 통해 새 출발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는 3년 전 카드를 이용해 사업하는 친구에게 3천만원을 빌려줬다가 친구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사채를 끌어다가 빚을 막다보니 빚이 1억원을 넘었다. 그는 연체가 시작되자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기 전 서둘러 파산신청을 했다. 그는 법원의 일부면책 결정으로 원금의 80%와 이자 전액, 그리고 앞으로 3년간 발생할 이자를 면제받았다. 그가 전부면책을 받지 못한 것은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뒤에도 추가로 돈을 빌려썼기 때문이다. 유씨는 “파산을 신청하기 전 계산해보니, 현재의 수입 전부를 빚을 갚는 데 써도 원금만 갚는데 13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고 당시 암담하던 상황을 떠올렸다. 비정규직 프로그래머인 그의 수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3년 동안 열심히 일해 3200만원만 갚으면 빚 없이 새출발을 할 수 있다”며 희망에 젖어 있다.

홈쇼핑업체에 다니는 동안 회사쪽의 반강제로 1900만원의 빚을 내 우리사주를 구입했던 김아무개(29)씨. 그는 주식을 팔지 못한 채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뒀다가 주가폭락으로 고스란히 빚을 떠안게 됐다. 결국 카드 돌려막기가 시작됐고 빚이 5천만원으로 불어나면서


남편과도 이혼했다. 수입이 전혀 없는 그는 친지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선임해 파산을 신청했다. 법원은 그에게 파산선고를 내렸고, 그는 현재 면책신청을 내놓은 상태다. 비록 일부면책만 받더라도 그는 끝없는 빚의 함정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면책불허 사유 있어도 일부면책 가능

개인파산은 결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는 게 파산신청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개인파산제도는 오히려 파산 상태에 빠진 개인의 갱생을 위해 도입한 제도”라고 강조한다. 물론 파산선고를 받는 것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기껏해야 채권자들이 “그 사람은 정말 갚을 돈이 없다”고 인정하고, 빚독촉을 줄이는 정도다. 중요한 것은 ‘면책제도’다. 현행법은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이 면책을 신청할 경우, 면책을 불허할 사유가 없으면 반드시 면책을 해주도록 하고 있다. 빚을 모두 탕감해주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얘기다.

성실한 채무자라면 면책불허 사유에 해당할 일이 별로 없다. 파산신청을 전후해 재산을 빼돌리거나, 낭비나 도박 등으로 파산 상태에 빠진 경우, 이미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으면서도 사람들 속여서 돈을 더 빌린 경우, 특정 채무자에게만 채무를 갚은 경우 등이 대표적인 면책불허 사유다. 그러나 면책불허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법원은 사안의 경중을 가려 일부면책을 해주고 있다. 물론 보증 때문에 파산 상태에 빠진 사람, 열심히 사업을 하다 실패한 사람, 불의의 실직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려다 파산 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면책결정을 받을 수 있다. 면책을 받으면 파산자라는 이유로 박탈당한 모든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단지 금융기관 거래만이 조금 어려울 뿐이다. 일부면책을 받은 경우에도 나머지 빚을 갚기만 하면 모든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

‘채권자들의 기억을 지워주는’ 제도

그러나 개인파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인 편이다. 유재민씨는 “파산이라는 용어가 주는 부정적인 어감, 그리고 파산선고를 받으면 평생 기록이 따라다닌다거나 주거가 제한된다는 오해가 파산신청을 꺼리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파산선고 뒤 면책결정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여러웠던 것도 파산을 선택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법원이 ‘도덕적 해이’ 방지에 강조점을 두고 면책결정을 매우 까다롭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증하는 신용불량자, 이로 인한 인간성 파괴 사태는 법원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파산선고와 면책결정을 내리도록 이끌고 있다. 관보공고를 기준으로 보면, 올 들어 7월 말까지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은 905명, 면책결정을 받은 사람은 438명(일부면책 57명 포함)에 이른다. 이미 지난해의 파산선고자와 면책결정자 수를 크게 넘어서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돈을 빌려준 사람은 돈을 빌린 사람보다 훨씬 기억력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채권자는 결코 채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파산 및 면책 제도는 사회전체의 조화를 위해 국가가 “돈을 빌려준 사람의 기억을 지워주는” 제도다. 파산자의 증가는 결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실질적 파산자에게 갱생의 기회가 그만큼 많이 주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한겨레21 2003년 0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