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빚 독촉전화, 녹음기부터 준비하라
 

최근 카드빚 자살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한 심리학과 교수의 진단은 이랬다.

"빚 진 돈의 액수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돈을 갚지 못하는 동안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조여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최후의 해결책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교수는 외국의 사례를 들었다.

"미국만 해도 카드회사는 고객에게 전화해서 함부로 말을 못한다. 잘못했다간 인권 침해로 소송을 당할 수 있고 손해배상액이 채무 액수보다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에 빚 독촉에 상당히 엄격한 편이다."

그래서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왔을 때 채무자는 "녹음을 해도 좋으냐"며 녹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려 협박 등의 불법 채권추심에 대한 증거확보를 하는 일이 채무자의 권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 작년 5월에 열린 참여연대의 신용카드개선 시민행동대회. 연이은 카드빚 자살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2003 조경국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대학생 박선희(25)씨는 카드빚 60만 원이 연체된 지 3일이 지난 뒤부터 카드회사에서 매일 전화를 받는다. 받아야 할 과외비가 이번 달엔 늦어져 결제일을 놓친 것. 그래서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말했으나 직원은 당장 돈을 마련하라며 위협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그래도 박씨는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돈을 못 갚는 '죄인' 신세이기 때문이다.

 

'위력적인'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

신용회복법 제정을 위한 3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정미현 부장은 "피해상담을 의뢰하는 경우 전화로 인한 불법추심이 가장 많다"며 "우리나라 정서상 채무자는 일단 죄인 취급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대부업법 등에서 협박, 폭행 등 위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유형이나 기준이 없어 법 적용에 어려움이 있다. 아직까지 불법 채권추심에 대한 지도나 제재를 받은 업체가 한 군데도 없다."

불법채권추심 등 채무자 보호를 위한 법률은 현재 대부업에 등록 및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대부법)과 여신전문금융업법,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등에 명시되어 있다.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거나 위계 또는 위력을 사용하는 행위"라는 포괄적인 규정 하에 ▲채무사실을 제 3자에게 알리는 행위 ▲정당한 사유없이 채무자 또는 그의 관계인을 방문하는 행위 ▲말이나 글, 음향, 영상, 물건을 사용해 채무자 또는 그의 관계인에게 도달하게 하는 행위 등 "채무자에게 불안감을 유발하여 사생활 또는 업무의 평온을 심히 해치는 일체의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위의 사실을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최근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가족, 직장에 채무사실을 알리는 행위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불법으로 간주된다.

채무자의 심리적 압박에 대한 채권자의 손해배상 책임

하지만 문제는 채무자의 인권과 신용정보 비밀유지를 위해 구체적인 금지사항이 법률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처벌범위가 너무 모호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오후 9시부터 오전 8시 사이에 전화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에 해당하며, 거주자의 허락 없이 방문하는 경우는 주거침입죄, 하루에 한 번 이상 전화하거나 3명 이상의 추심사가 동시에 방문하는 경우 위력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녹음이나 사진촬영 등의 증거확보가 중요하다.
 

 

 

 

ⓒ2003 오마이뉴스 권우성

국민대 법학과의 김용재 교수는 "외국에서도 우편발송이나 전화통화는 일반적이지만 '정보제공' 차원을 넘어서 심리적 압박(emotional distress)을 가하는 것에 관한 손해배상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에 녹음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특히 휴식, 수면시간이나 주말 등 '비즈니스 아워(business hour)'를 제외한 시간에 전화를 금지하는 것은 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헌욱 변호사는 "신용카드사의 추심담당 직원과의 전화통화에서 인격침해로 느껴질 내용이 있다면 녹취내용을 금융감독위원회나 소비자보호원에 제출하라"며 추심사와의 전화통화시 대응요령에 대해서는 "시간을 주면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수준에서 응대하면 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채무자가, 채권자가 가하는 인격모독에 대해 당당히 맞서기란 쉽지 않다. 채권자의 권한이 막강한 상황에서 채무자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면 해코지 등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시민권리팀의 정지인 간사는 "채무자도 인격과 인권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며 "신용불량자가 350만 명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채권자의 권리만 강조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카드사 연체율이 20%를 넘어서고 채무불이행에 대한 법적 처벌이 전무한 실정이라며 악덕채무자에 대한 비난,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자주 거론돼 왔다. 그 사이 채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사실은 묵살돼 왔다. 이제 카드빚 자살의 원인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라는 심리학자의 분석을 귀담아 들을 때가 됐다.


/박형숙 기자 (hspark@ohmynews.com)

오마이뉴스 2003년 0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