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좇다 망가지는‘명품족’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고 양손 가득 든 쇼핑백을 우아하게 외제 승용차에 밀어넣는 여성들. 쥐꼬리만한 월급, 혹은 취직조차 못해 불우한 청춘을 보내며 루마패션(리어카에서 파는 싼 물건)으로 산다고 서러워 할 필요없다. “어쩜 저리 복이 많을까”라고 부러워하는 그들도 어쩌면 호화사치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엄청난 카드값에 시달리는 신용불량자이거나 개인파산을 선고할 형편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결혼한 한 회사원은 “임신 3개월인 아내가 이제야 혼수를 모두 카드로 마련했고, 다른 빚까지 많다고 고백하는 데 경악했다”며 “워낙 씀씀이가 헤픈 여성들이 많은 요즘은 결혼할 때도 건강진단서가 아니라 ‘신용진단서’가 필요한 시대”라고 허탈해 했다.

#핸드백 하나로 바뀐 인생

외출하려다 거울을 본다. 샤넬의 트위드재킷과 돌체가바나 스커트, 불가리 시계, 카르티에 반지, 그리고 루이뷔통의 핸드백 등 고귀한 가문의 영양처럼 완벽한 연출을 했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청구서를 못본 척하고 직장인 룸살롱을 향해 올봄 신상품인 프라다 샌들을 신은 발을 옮겨 애마 BMW에 오른다. 어지간한 샐러리맨의 연봉을 온몸에 걸치고 전셋값에 맞먹는 차를 타는데, 왜이리 서글프고 초라하게 느껴질까.

정은은 흔히 말하는 호스테스다. 2년 전만 해도 청순한 대학생이었다. 중소도시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는 유명대에 합격한 딸이 자랑스러워 빚을 내어 등록금도 내고 자취방도 구해주셨다.

착실히 공부해 부모님 은혜도 갚고 성공하리라 다짐을 하던 그의 삶이 기묘하게 꼬인 것은 핸드백 때문이었다. 사촌언니가 대학 합격 선물로 예쁘장한 핸드백을 선물했는데 그것이 얼마짜리고 어떤 제품인지도 모르는 채 학교에 들고 갔다. 그런데 같은 과의 한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너, 나랑 취향이 비슷하구나. 나도 이 브랜드 마니아거든. 난 다른 빛깔로 샀어”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동아리에서 만난 남학생도 핸드백을 보고 “패션감각이 뛰어나군요”라고 했고 머리를 손질하러 간 미용실에서도 “핸드백 멋지네요”라고 찬사를 보냈다. 도대체 이 핸드백의 정체가 뭘까. 선물을 한 사촌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거 1백만원도 넘는 거야”라며 마냥 흐뭇해 했다.

그날 이후 그는 명품에 빠졌다. 인터넷을 뒤지고, 백화점이나 압구정동 또는 청담동의 명품 매장을 샅샅이 조사했다.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모아 핸드백과 같은 디자인의 손지갑을 샀다. 손바닥만한 게 40만원이 넘었다. 돈을 낼 때 바들바들 떨렸지만 지갑을 꺼낼 때마다 ‘아, 루이뷔통이구나’라고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 뿌듯했다. 사고싶은 게 너무 많지만 돈이 없었다. 고향에서 고생하는 부모님에게는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신용카드로 신용잃고 나락으로

유미에게 나타난 것은 백마를 탄 왕자가 아니라 신용카드였다. 학교 앞에서 발급받은 카드는 마술사였다. 닥치는대로 핸드백, 시계, 구두, 스카프, 심지어 헤어밴드까지 유명브랜드를 골랐다.

대학친구들은 그가 부잣집 딸인 줄 알고 친절하게 대했다. 수백만원대의 카드값이 나왔을 때는 이미 카드의 세계에도 눈뜬 후였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카드를 발급받아 돌려막기도 하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친구들과 근사한 레스토랑에도 가고, 자취방도 원룸으로 옮겼다.

몇달을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패스트푸드점에서 1시간에 2,0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해서는 환갑이 되어서도 못갚을 액수였다.

그때 한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은밀한 제의를 했다. 룸살롱에 나가면 재미있게 놀면서 용돈도 벌 수 있고 재수 좋으면 값비싼 명품을 선물로 척척 사주는 아저씨들도 만날 수 있다고. 여대생의 품위, 경악할 부모를 생각하기엔, 아니 양심의 목소리를 듣기엔 그의 경제사정은 최악이었다. 지하철에서 만났다면 자리를 양보할 만큼 늙은 영감과 있으면서도 ‘이 순간만 견디면 샤넬백이 생긴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견뎠다.

#‘마에 낑’ 5천만원에 청춘을 팔다

이제 겨우 스물한살의 유미. 그는 5천만원을 받고 룸살롱에 ‘입사’했다. 5천만원은 스카우트비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스란히 빚.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것이다. 마에 낑은 선금이라는 의미. 가게를 옮길 땐 반드시 갚아야 한다. 이자가 없으므로 일하면서 갚을 수도 있지만 이미 명품 등 과소비에 노출된 몸이라 헤어나기 힘들다. 외제차 구입하느라 사채로 쓴 돈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낮과 밤이 다른 두 인생. 처음엔 카드값을 완전히 갚은 다음 알뜰한 여대생으로 거듭나려 했지만 이젠 포기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에 눈물지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저 내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우리 부모는 항상 장래를 염려하며 옷 한벌 안사입고 여행 한번 안가고 절약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뭔가. IMF땐 직장에서 쫓겨났고 평생 모은 돈이 외제승용차 한대 가격도 안된다”

#여성신용불량자 절반이상이 20대

‘신용불량자’ 낙인이 찍히는 젊은 여성들이 늘고 있다. 백화점 명품코너의 주고객층은 70%가 20~30대 여성. 많이 사는만큼 빚도 많다.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여성 신용불량자 수는 3월말 기준으로 1백8만8천2백1명. 이가운데 53.3%가 20대 여성이다. 신용카드 연체자들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명품만이 아니라 유흥업소의 술값, 승용차 구입, 오피스텔 유지비, 해외여행, 심지어 애완견을 사는 데도 카드를 닥치는 대로 긁은 다음 안갚고 버티는 ‘배째라’족도 많단다.

명문 대학원생도 명품과 스포츠카를 구입하느라 빚을 지자 인터넷 동거사이트에서 남성을 유인, 강도짓을 하며 ‘인터넷 꽃뱀’으로 전락했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카드빚에 몰려 자살을 하거나 카드값을 안갚아준다고 친엄마를 살인교사한 잔혹한 20대 딸도 있다. 지난달에는 딸의 카드빚을 대신 갚으라는 신용카드사의 빚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음독자살했다. 2천3백만원짜리 집에 사는 그의 무직자 딸은 은행마다 카드를 만들어 이것저것 사느라 1억5천만원의 빚을 졌다.

유흥업소 관계자들은 “요즘 카드결제일인 20일이나 월말이면 싱싱한 여대생들이 술집에 잔뜩 나온다. 전엔 동생 학비나 부모 병원비 때문에 술집에 나왔다는 홍도형이 많았지만 요즘은 ‘카드빚 갚아야 한다’는 사치형이 대부분이다. 여대생 호스테스만 1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남에 한집 건너 생겨나던 성형외과 대신, 요즘은 명품전당포와 함께 ‘중고명품 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성업중이다. 이곳에선 중고 명품을 판매하며 위탁판매도 해준다. 명품을 구입했다가 카드결제일이 돌아오면 이곳에 맡기거나 판다.

명품전당포 주인은 “예전엔 옹색한 살림에 도움이 되려고 결혼반지 등을 맡기러 온 이들이 많고 대부분 안찾는데 명품을 맡긴 젊은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다시 찾으러 온다”며 명품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설명했다.

한 회사 신입여사원은 “어느날 한 동료가 갑자기 값비싼 명품을 들고다니기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중년아저씨와 원조교제를 하고 있더라”라며 “그런데 동료 여사원들이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부러워하며 ‘나도 펑펑 돈쓰는 아저씨나 만났으면’이란 말을 해서 놀랐다”고 전했다.

#새 신분증명서 명품

첫아기를 임신한 20대 주부는 출산준비물로 기저귀보다 먼저 10만원이 넘는 티파니의 순은제 딸랑이를 샀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명품과 친근해져야 귀티나게 자란다는 것. 이 정도면 이제 명품은 젊은여성들에게 집단 최면이고 브랜드 숭배는 국가적 중독 수준이란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서강대 원용진 교수는 “양반이나 귀족 등 제도화된 계층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브랜드’는 소비자들에게 다른 사람과 차별을 부추겨 계층적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상징하는 도구”라고 명품 열풍을 분석했다.

미친 듯이 명품을 사들이느라 잔뜩 빚을 지고 전기가 끊긴 임대주택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명품세일 광고만 보면 달려간다는 일본 작가 나카무라 우사기는 “품질이 좋고 오래 쓸 수 있어서 명품을 산다는 건 웃기는 핑계”라며 “남들에게 여왕처럼 근사하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상류계층이 되고 싶다는 서민들의 욕망의 산물이며 그들에게 환상과 착각을 주는 마약이란 것이다. 무엇보다 명품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나, 상상속에 그린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줄 가장 빠르고 확실한 변신술이기도 하다.

‘럭셔리 신드롬’의 작가 제임스 트요첼은 “명품은 누구나 평등하게 상류층으로 보이게 만드는 민주화의 수단이란 긍정적 요소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주 고급스런 부티크에서 몇몇 사람만을 위해 파는 것처럼 보이는 고급물건도 알고보면 컴퓨터 도면에 따라 중국의 공장에서 찍어낸 것임을 잊지 말라”는 충고도 곁들인다.

자신의 인생역정, 혹은 인간미나 능력보다 그가 소유한 브랜드로 평가받는 시대에 나 혼자만 청학동 산골아가씨나 간디처럼 살기는 힘들다. 그리고 ‘명품에 빠진 허영덩어리’ ‘사치한 멍청이’ 등으로 매도하면서도 여전히 학교나 가정에서는 돈에 관한 교육을 하거나 제대로 된 소비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부자되세요’만 강조하고 아빠도 ‘부자’여야 존중받는 풍토에서 ‘명품 인간’으로 성장하기는 힘들다. 올바른 소비나 경제관념, 돈보다 더 소중한 게 많다는 덕목을 가정과 학교, 아니 곳곳에서 제대로 알려야 하지 않을까.

-[취재수첩]명품 치장으로 회장 아들과 결혼…알고보니 카드·사채 빚더미 허덕-

최근 패션계 참새족의 입을 바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에서 가장 탄탄한 패션업체 중 하나로 꼽히는 모 회사 사주 아들의 결혼 스캔들이다.

얼마전 이 회사의 한 디자이너가 회장 아들과 특급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명문대 출신에 청초하면서도 이지적인 미모까지 갖췄다. 평소에도 구두부터 머리핀까지 모든 제품이 고가 유명브랜드여서 별명도 ‘걸어다니는 명품관’이었단다.

미모와 지성, 패션감각까지 갖춘 데다 자신이 다니던 회사 회장 아들과 결혼한 ‘신데렐라 스토리’는 주위의 부러움과 한숨을 자아낼 만했다. 주변에선 “워낙 신랑 어머니가 명품마니아인데 자신의 취향과 감각을 만족시킨 여직원이 들어오자 며느릿감으로 낙점해 결혼을 성사시킨 경우”라고 전했다.

그러나 부러움도 잠시. ‘명품 신데렐라’의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면서 스캔들로 전락했다. 그 신부는 본인이나 친정의 재력이 아니라 온통 카드와 주변에서 빌린 돈, 심지어 사채까지 얻어서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다닌 것임이 밝혀졌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명품에 눈뜬 그는 카드로 물건을 산 후, 카드 연체료를 막기 위해 다른 카드를 만들고, 또 단골로 친해진 명품점의 직원들에게까지 수시로 돈을 빌렸다. 최근에는 결혼을 앞두고 동료 직원들에게 “우리 회사 주식을 사주겠다”며 여기저기에서 돈을 받아 가로챘는데 직원들은 아무 의심없이 다른 가족에게 돈을 꾸어서까지 투자했다는 것. 20대 중반의 이 여성이 진 빚이 무려 10억여원에 이른단다.

회사에서는 일단 직원들이 빌려준 돈은 갚아주기로 했다지만 이미 망신살은 뻗쳤고 아름다운 신부와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다음에야 사실을 안 신랑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단다. 주변에서는 “며느릿감의 ‘성품’을 보지 않고 그를 포장한 ‘명품’만 보고 한 결혼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호사스런 ‘명품결혼’은 ‘경찰청 사람들’ ‘사건 24시’에나 등장할 이야기로 막을 내렸다.

 

/유인경기자 alic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3년 05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