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에 대한 문답

 

(김군)

규원사화 진본이 국내에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

(답변)

사실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규원사화가 위서니 가짜니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본 사이트에 진본 사진이 공개되면서 규원사화가 더 이상 위서라 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모두 인터넷의 힘이지요. 진실을 알려주는 힘 말입니다.

(김군)

누가 최초로 확인을 하게 되었는지요 ?

(답변)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1989년 국립중앙도서관을 방문하여 직접 확인을 하게 됩니다.

(김군)

그러면 그 동안은 이 규원사화 진본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

(답변)

아닙니다. 간략히 규원사화 진본에 얽힌 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발견시기

국립중앙도서관이 1945년 말 ~ 46년 1월 사이 책방에서 “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 부터 책값 100원에 구입을 합니다 (당시 100원은 큰돈입니다)

(2) 등록일자 : 1946. 5.25. 貴629(古2105-1)

이렇게 구입한 책자를 1946년 5월 25일에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 629번, 고서 2105-1번으로 등록을 합니다.

(3) 고서심의

이 규원사화를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3인의 고서심의위원이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인 1675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을 합니다.

(4) (사) 한배달 확인

(사) 한배달은 1945년 발견된 이 규원사화 진본을 44년이 지난 1989년 11월 11일 드디어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귀중본 실에서 그 진본을 확인하고 한배달 1989. 12월호에 전제함으로써 그 진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실로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날이지요.

(확인내용)

- 도서열람번호 : 貴629(古2105-1) 1책
- 제작연도 : 1675년 조선조 숙종 1년 3월 상순
- 책 크기 : 24.7 × 16.5㎝

(김군)

사진 등 증거자료가 있나요?

(답변)

물론 있습니다. 자 아래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규원사화” 진본 사진입니다.

▒ "규원사화 진본" 사진





(질문)

책을 복사한 내용 등 구체적 자료는 없나요.

(답변)

물론 있습니다. 고 양주동 박사가 필사한 내용을 가지고 위서니 창작이니 하는 사람들이 이 복사본을 보았다면 다른 말을 못했겠지요.

아래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규원사화 진본의 복사본 내용입니다. 일부만 소개하고 내용전체는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 "규원사화 진본" 복사본 내용





(어떤대화) “규원사화” 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습니다 (2)

(김군)

규원사화를 심의하였다는 심의위원 3인은 어떠한 분들이죠?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세분들 말입니다.

(답변)

세분모두 문화재 위원을 거치는 등 학계의 권위자들입니다. 아래 경력을 참고하시면 심의위원들이 어떠한 분들인지 아실것입니다. 이분들이 조선조 숙종 1년(1675년) 3월 상순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귀중본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이중 손보기 박사님은 1981년 11월26일 ~ 27일간 열린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강단의 무지함을 통열히 비판한 분이기도 합니다.

아래 간략한 이력을 소개합니다.

(1) 이가원 (李家源) (별세)

- 1917년 4월 6일생
- 1966 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
- 1969 中華學術院( 철학박사 )
- 1971 심곡서원 원장
- 1975 한문학회회장
- 1981 도산서원원장
- 1997 학술원 회원(한국한문학)

(2) 손보기(孫寶基) :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 1922/07/07 (음력) (생존)
- 1947 서울대학교사학과
- 1949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 )
- 1963 미국 캘리포니아버클리대( 철학박사 )
- 1996 몽골 과학아카데미역사연구소( 명예철학박사 )
- 1965 - 1981 연세대학교박물관관장
- 1982 - 1988 국사편찬위원
- 1986 - 1995 문화재위원
- 1997/03 - (현)단국대학교석좌교수
- 1997/03 - (현)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관장

(3) 임창순 (任昌淳) : (전)한학자·금석학의 대가

- 1914. 5.30생 (사망)
- 1927 - 1932 보은관선정서숙서 한학수학
- 199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문학박사 )
- 1971 - 1988 문화재위원회위원
- 1989 - 1993 문화재위원회위원장
- 1990 - 서지학회회장
- 1995/05 - 문화재위원회위원장

(김군)

경력사항을 보니 1972년 심의 당시 문화재 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학계의 상당한 지위에 있었군요. 그런데 심의위원들이 이러한 진본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

(답변)

일제도제식조폭식민 사관에 찌들은 이병도를 필두로한 식민사학자들이 일본놈들의 대를 이어 단군은 신화라는게 통설이라고 교육하는 실정에
규원사화 진본을 들어 반기를 들었다가는 결과는 자명하겠지요. “학계에서 매장” 그것입니다.

왜냐면 규원사화가 진본임이 밝혀질 경우 전공하는 사람들의 대학교재 등 대부분의 상고사 관련 책자들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조리 쓰레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뭐 쉽게 말하면 “밥그릇지키기”에 “민족혼”을 팔아먹은 자 들이라고나 할까요.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는 이 규원사화 진본의 존재를 알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소장하고 있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김군)

많은 강단의 학자들이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많은 글들을 발표한 것으로 아는데요, 이 사람들은 진본의 존재를 몰랐나요. 위서라 주장한 대표적 학자들은 누구인가요 ?

(답변)

위서라 강변하던 대표적인 자들은 아래 세사람입니다.

(1) 조인성 : 제가 보기엔 강단의 O위대로 보임(경희대)
(2) 이병도 : 매국조제식조폭식민사학의 출발점
(3) 송찬식 : 월간중앙 1977년 9월호에 “위서변(僞書辯)” 기고

이력을 볼까요.

(1) 조인성(45세) : 경희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홈페이지 참고) 한국고대사, 고려시대사 담당, 교수회관 107호, 전화 961-0882 한국고대사학회 총무이사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1988년) 71p- 88p”에 동인의 글이 올려져 있는데, 동 잡지는 이병도교수의 1회 제자인 이기백이 책임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이병도의 수제자 이기백 학파의 일원들은(한국일보 기사 인용) 김두진, 이종욱, 이기동, 조인성, 신호철, 김수태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이병도

-1896 (음력) (사망)
- 1915 普專법학과
- 1916 일본 早稻田大 고등3부 수료
- 1919 일본 早稻田大문학부사학및사회학과
- 1952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
- 1934 - 진단학회창설·대표
- 1945 - 1962 서울대학교문리대학교수
- 1955 - 1982 국사편찬위원회위원
- 1956 - 진단학회이사장
- 1960 - 문교부장관
- 1982 - 민족문화추진회이사장
- 1987 - 1989 진단학회회장

(3) 송찬식 : 사망

서울대학교 사학과졸업. 국민대 교수

이중 이병도는 진본을 보았고 나머지 둘은 못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병도는 죽기전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실존이라 참회의 글을 발표하고 죽었겠지요. 아마 죽기 전에 여러 명 더 참회의 글을 발표할 것입니다.

▒ 맺음말

아래는 “단군사서별 제왕역대표”입니다 재위연수에 일부 차이는 있으나 단군역대는 3가지 사서가 동일함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 가공이 아닌 오로지 동양 3국 중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실존의 역사입니다.

쓰레기 위서운운하는 OO의 입에서 피를 토하며 민족앞에 용서를 구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 하길




 


 

규원사화 저자 서문

 

북애자(北崖子)는 이미 과거(科擧)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해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강호(江湖)를 방랑하기 여러 해가 되었다. 발길은 이나라 구석구석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차라리 중국을 섬길 바에는 동해 물에 빠져 죽을까 하기도 했다.

때는 양란(兩難:병자호란,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나라 안 마을 어느곳에나 슬픔이 가득하고 관민(官民)의 울분으로 여론이 물 끓듯 하였다.

그리하여 북애자는 남쪽으로 금주(金州:김해)와 월성(月城:경주)에서 사비(泗?) 웅천(熊川:공주)을 거쳐 한산(漢山:서울)으로 들어가 예맥(濊貊)의 옛 도읍을 밟았고, 북쪽으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올라 1만 2천 봉우리를 굽어보니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이어 동해에 돋는 해를 보니 눈물이 저절로 흐르고 만길 폭포를 바라보니 마음이 슬프고 안타까워 속진을 떠나고 싶었다.

다시 서쪽으로 발길을 옮겨 구월산(九月山:황해도 신천)에 이르러 당장평(唐莊坪)에서 머뭇거리며 삼성사(三聖祠)에서 감격의 눈물을 뿌렸다. 다시 평양을 지나 용만(龍灣:압록강 하구에 있는 만의 옛 이름)에 이르러 통군정(統軍亭:압록강 변에 있는 정자)에 올랐다. 북쪽으로 요동의 넓은 터를 바라보니 요동의 나무와 기주의 구름이 손짓하고 부르면 대답할 듯 가깝게 머뭇거리고 있다.

작은 배를 타고 한줄기 압록강을 넘어서면 벌써 우리의 땅이 아니다.

슬프다.

우리 선조들이 살던 옛 땅이 남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년이오. 이제 그 해독(害毒)이 날로 심해지니 옛날을 그리워하고 오늘을 슬퍼하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사당을 세운다고 한다. 장군은 수(隨)나라 군사 1백여 만 명을 살수에서 무찌른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다.

한 달 남짓 지나서 송경(松京:개성)에 다다르니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바삐 집으로 돌아왔으나 더욱 쓸쓸하기 그지없다. 이제 옛집의 남쪽에 있는 부아악(負兒岳) 양지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자(諸字)들의 책을 모아 연구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한다.

무릇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이는 그 힘이 다하면 배반 당하게 된다. 재물로 사람을 쓰고자 하는 이는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이 떠나기 마련이다. 내가 힘과 재물을 갖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바라거나 구한 적도 없으니 황량한 북악(北岳)의 비탈에 무슨 힘과 재물이 있을 것인가, 또한 명예는 손님과 같은 것, 장차 내가 명예를 그리다가 그 꼴이 되면 무엇하랴, 이름도 바라지 않는다.

옛날에 물계자(勿稽子)가 말했다.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비추고 귀신은 사람이 하는 것을 본다.」

무릇 사람의 선악(善惡)과 정사(正邪)는 반드시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밝히 살펴 알 것이다. 죽으면 백골이 되는 인생인데 어찌 작은 명리(名利)에 급급하여 다투랴! 오직 타고난 성품을 간직하여 뜻을 기르며 도를 닦아 공을 세워 후대의 자손들이 본받게 할 따름이니라.

그러나 비록 세상이 끝나도록 이를 알아 주는 이가 없다 하더라도 한탄하지 않으리라. 만세 후에라도 이것을 아는 사람을 한번 만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번쩍하는 동안 지나가 버린 천년을 보면서 백골만 남을 인생이 명예와 치욕에 빠져 바쁜 세월을 다투랴!

내가 말하노니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걱정이다.

춘추(春秋)를 지으니 명분이 바르고 강목(綱目)을 이루어 정윤(正閏), 정통(正統)이 나뉘었다. 춘추와 강목은 중국국의 선비들이 이룬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경사(經史)는 여러 번 병화(兵火)를 입어 흩어지고 없어졌다. 여기에 후세의 고루한 이들이 중국의 책 속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을 옳다고 하며 먼저 근본을 세워 우리나라를 빛낼 줄 몰랐다. 이는 등나무나 칡덩궁이 곧게 뻗어 나갈 줄은 모르고 얽히고 맺히기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천하다 하지 않으리요. 고려 이후 조공 바치는 사신을 수백 년 동안 보내면서도 이를 한스럽게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滿州)를 불구대천지 원수로 여기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아, 슬프다.

오직 하늘이 효종(孝宗)에게 10년만 더 살 수 있게 하였던들 군대는 요심(遼審:요동의 심양)으로 보내는 배를 등채(登菜)로 달리게 하였을 것이 아닌가.비록 패하더라도 시기만 놓치지 않았던들 근세에 보기 드문 통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임금의 나이를 더해 주지 않아 요심 정벌을 끝내 이루지 못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로서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내가 일찍이 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본디 재료가 없고 또한 명산(名山) 석실(石室)에도 진장(珍臧)된 것이 없으니 씻을 듯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어찌하랴!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의 《진역유기》중에 삼국 이전의 고사(故史)가 있는들 구구하게 떠드는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그 기운이 더 높다. 여기에 중국의 고사(古史)에서 기록을 뽑아 보태 사화(史話)를 만드니 밥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이가 있어 이 뜻을 같이하랴.

경전(經典)이 말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했으니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일 하늘이 내게 장수(長壽)를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는 조금 먼저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뿐이다.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연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上之二年 3월 상순

북애노인(北崖老人)은 규원초당(揆園草堂)에서 서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