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되고 있는 이신칭의

 

한번 구원 항상 구원을 외치면서 동시에 첫사랑이 다 식어버린 사람들은 이 생각이 과연 맞는 생각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닌 전체적인 삶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 안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계속 죄를 범하고 회개를 반복하지만 이에 불구하고 전체적인 삶의 방향은 거룩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다.

참된 믿음은 이땅에서부터 그의 죄된 삶을 거룩한 삶으로 바꾸는 능력이 나타난다.이것이 부활의 능력인데 믿음이 있노라 해도 이땅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죽고 나서도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 믿음, 계속 다람쥐 쳇바퀴같이 정체되어 있는 믿음,말씀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땅에서 자기의 계명을 못 지키는 사람이 있고 안 지키는 사람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근본 죄인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이었을 때 그대로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주님의 모든 말씀을 주님을 위해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나 근본 죄된 육신의 연약함으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못 지키는 사람이다.

사울의 아말렉 사건,다윗의 진설병 사건을 서로 비교해보면 안 지키는 사람과 못 지키는 사람의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울은 평상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부분적인 순종을 보였으나 주님께서 그러한 순종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중심에 있는 교만한 마음을 아말렉 사건을 통해 드러내시고 심판하신것이고 다윗은 반대로 평소에 주님의 말씀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순종하는데 전심을 쏟았았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이를 지키지 못해 제사장들만 먹는 진설병을 먹었으나 중심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판단으로 이로 인해 심판을 받지 않았다.

사람이 외형적으로 보면 이 두 사건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를 행하는 이들의 중심에는 각각 근본이 서로 다른 믿음이 거하고 있었다.
못 지키는 사람이 그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적인 주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 받고 또 이 땅에서 주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안 지키는 사람은 여러 선행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교만한 믿음을 인해 주여 주여 해도 주님에 의해 심판 받게 된다.
못 지키는 사람과 안 지키는 사람은 둘 다 죄인인 것은 같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믿음은 근본이 다르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오용하여 사울과 같이 안 지키는 사람이 되려고 이를 합리화 시키는 사람이 지금 교회 안에 알게 모르게 말기 암같이 퍼져 있는 상태이다.
교리에 비추어 나 자신을 분별할려고 하면 안된다. 교리는 틀릴 수 있는 헛점을 갖고 있다. 교리의 무오성이란 말은 없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또 이와 같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이 사랑이 첫사랑 그대로 식지 않고 내 안과 밖에 살아있는지 항상 살펴야한다.
주님에 대한 미지근한 사랑은 사람 보기에 사랑일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가증하고 교만한 것이다.


옮긴글

 


 

구원은 '믿음으로 믿음에'에 있다

 

'오직 믿음'의 오해…'구원 안의 삶 말하는 성도를 '행위구원론자' 이단으로 정죄'

바울은 구약의 '의인은 믿음으로'를 근거로 하여 '믿음으로 믿음에'를 말했습니다.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요약하여 '오직 믿음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인데 그 오해가 오늘날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와 '의인은 믿음으로'는 분명히 다릅니다. 구원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가 '믿음' 이외에 다른 어느 것도 개입을 허용치 않음에 비해서 '의인은 믿음으로'는 '의인'과 '믿음'이라는 구원을 이루는 두 기둥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의인은 믿음으로'(합 2:4)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여호와께서는 직접적인 답을 주시지 않고 동문서답식으로 하신 말씀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이 두 구절은 대구법으로 쓰인 것인데 '그'는 바벨론이며 악인이고 망하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의인'은 유대백성 중에서도 택함 받은 무리이고, 그 품성이 겸손하고 정직한 자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인데 견고함·굳건함·충실·성실 등의 뜻으로 확고부동한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내면의 상태가 겉으로 나타남으로 그 뜻이 완성되는 단어인데, 즉 에무나는 한국어 '믿음+행위'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한국말도 그 어원이 '미쁨'이며 뜻은 '진실'입니다. 이 역시 내면의 상태가 겉으로 드러남으로 의미가 완성되는 단어이며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행위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종합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를 풀이하면 '택함 받은 겸손하고 정직한 의인은 확고부동함을 계속 유지하면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2. '믿음으로 믿음에'(롬 1:17)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두에 자신의 주장의 결론을 먼저 적었습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개역)고 하였습니다. 이는 '믿음에서 출발하며 믿음을 목표로 한다'(표준새번역개정, 난외주)는 말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다'(공동번역)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는 믿음의 두 종류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믿음으로'는 '오직 믿음으로'에 해당하는 것인데 구원에 있어서 종교적 의식행위(안식일, 십일조, 할례 등)라는 전제조건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구원의 문이 이 '믿음'으로 차별 없이 활짝 열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뒤에 있는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신앙인의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으로 구원 안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전자('믿음으로')는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믿음이며, 후자('믿음에')는 의인의 삶을 사는 믿음입니다. 전자는 구원의 문턱에 서 있는 믿음이며 후자는 구원 안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군대의 제식훈련에 비유하면 전자는 '뒤로돌아 서'있는 상태이며 후자는 '뒤로돌아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3. 시간적인 전후관계와 중요성의 문제

구약의 '의인은 믿음으로'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의인'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확고부동하게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믿음으로 믿음에'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누구나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번째의 '믿음에'인데 구원 안의 삶,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의 삶'은 구약의 '의인은 믿음으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믿음에'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처음에 있는 '믿음으로'가 '오직 믿음으로'이며 이 관문을 통하여 두 번째에 있는 구원의 '믿음에' 이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구원 안의 삶인 '믿음에'가 성도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오해를 일으키게까지 하여 구원 안의 삶을 이야기하는 신앙인을 '행위구원론자'로 이단정죄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한국 개신교의 모토를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인 '오직 믿음으로'에서 이보다 더 성경적인 '믿음으로 믿음에'로 바꿀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조규철 caryes@naver.com

뉴스앤조이 2005년 0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