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이지 운동의 본질(1)

1.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

1. 사탄의 기만과 바벨론 종교

뉴에이지 사상의 대부분의 개념은 고대 종교 체계들에서 나온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주요 사상들은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 타락 사건 속에 그 본질적인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불복종의 달콤함으로 유혹하여 복종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사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이브에게 또 다른 세계에 대해 유혹하였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창 3:4-5)

이 성경 본문에 포함된 네 가지 기만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달콤한 유혹이었고, 뉴에이지 운동의 근본 뿌리가 되었다. 사탄의 방법은 상황에 따라 변할지 모르지만.,그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는 시대가 변하여도 불변하여, 시대마다 다른 문화적인 옷을 입고 계속해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 네 가지 기만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만, 즉 모든 것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잠재해 있다는 믿음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기만 속에 나타난 의도와 전략은 뉴에이지 운동에 숨겨진 많은 동양의 종교들과 신비주의, 세속적 휴머니즘 현상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노아 홍수 이후 고대 바벨론의 절대 군주였던 니므롯은 처음으로 시날(Shinar) 땅에 강력한 왕국을 세우고 영걸인 자신이 숭배받기 위해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로 언어가 혼잡해지면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니므롯(Nimrod)을 섬기는 우상 숭배 행위가 전 세계로 전파됨으로써 태양신 숭배를 비롯한 신비 종교를 탄생시켰으며, 고대 이방 종교들의 시조가 되었다. 특히 바벨론의 신비 종교는 모든 종교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본질적으로 뉴에이지의 운동과 종교 의식, 예배, 교리 등 많은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결국 이 운동을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의 체계임을 알 수 있다.

2. 힌두교

힌두교는 B.C. 1500년 경에 생겼는데, 매우 복잡하며 수세기에 걸쳐서 발전했다. 중요한 개념은 살아 있는 존재들 속에 영원한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주에 생명을 주는 우주적 정신(cosmic spirit)을 뜻하고, 개인의 마음 중심에 존재한다고 보며, 힌두교의 유일한 궁극적 실체 즉 신(神)이라고 보는 브라만 개념과 연결된다. 또 운명주의는 인간이 브라만의 일부라는 힌두교의 신앙이기도 하고, 카스트 제도는 섬기는 자가 있고 섬김을 받는 자가 있는 계급 조직이다. 그들의 중심교리인 업(業), 즉 카르마(karma)는 인과율(因果律)이다. 악한 행위들은 악한 결과들을 낳고, 선한 행위들은 선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힌두교의 목표는 생전에 보다 높은 차원을 추구하면서 선한 업을 쌓는 일이다. 그들은 인간 존재의 최후 단계인 니르바나(Nirbana)로 영혼을 데려감으로써 완성되는 윤회의 사슬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요가를 통해서 윤회의 사슬에서 육신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힌두교의 구원관은 극기와 명상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인해 업의 수레바퀴로부터 해방되어 브라만으로서 환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사랑과 인간 관계 속에서 베푼 사랑의 결과 등으로 평가된다.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Veda)는 힌두교의 예배 의식 때 사용되는 태양이나 다른 신성한 존재들에게 하는 기도 주문을 포함하고 있다. 우파니샤드(Upanisads)는 후대의 경전들로서, 보다 불가사의하고 신비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가장 신성한 책으로서 바가바드기타는 B.C. 1세기 동안 기록된 것으로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졌으며, 이 책은 신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인도하는 경전 중의 경전으로 평가받는데, 카르마를 비롯한 많은 교리가 뉴에이지 사상에 흡수되어서 뉴에이지의 사상적 뿌리가 되고 있다.

3. 불교

불교의 현실관은 불심(佛心)을 가지고 인간의 의식을 초입하여 참 자아(自我)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면과 외면의 구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자기 내부에 있는 참 자아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무(無)인 것이다. 표면적으로 시야에 비치는 모든 사물들은 단지 불심을 동요케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불심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2500년 전 인도를 방랑하며 부처, 즉 도를 깨우는 사람으로 추앙되는 수도자 싯다르타(Siddhartha, Gautama)의 생애와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다. 오늘날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 5억이 넘는다. 그들 대부분이 아시아에 편중되어 있기는 하나 상당수가 유럽과 북미주 지역에도 거주하고 있다.

불교는 세계적인 주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실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뉴에이지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불교가 뉴에이지 사상에 미친 영향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불교보다 적어도 천년은 앞서 발달한 불교의 모체인 힌두교도 뉴에이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양대 종교는 특히 윤회(rebirthing)와 업(karma)을 강조한다.

이들은 인간이 오직 선을 충분히 쌓음으로 인해서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 환생의 숙명적인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선(善)을 쌓는 것만이 인간을 물질세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해방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통이 끝나고 영원한 기쁨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선종(禪宗)은 부처 사후 1000년 후에 발전된 새로운 종파로서 서양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뉴에이지 사상들을 제공한다. 명상을 뜻하는 일본어(Zen), 즉 선(禪)도 역시 뉴에이지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데 중국의 타오(Tao), 즉 도교와 많은 연관성이 있다. 도교의 기본 사상은 현상 세계를 움직이는 이면에는 도(道)라는 것이 있으며, 이 도를 현상 세계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이 도는 영원 불변하는 원리이며 우주 만물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수동적인 힘인 음(陰)과 능동적인 힘인 양(陽)의 상반되고 조화로운 세력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고 믿는다. 선은 존재 중심의 상실되었던 상태를 회복하는 사상을 포함한다.

이것은 명상에 의존함으로 “너는 부처이다. 너 자신의 내면을 살펴라”는 것인데 뉴에이지의 맥락에서 보면 이 가르침은 “너 자신 안에서 신(神)을 발견하라”, “인간은 모두 신(神)이다”라는 뉴에이지의 가르침 그 자체이다.

4. 영지주의

이 주의는 유대주의, 동방 신비주의,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를 혼합한 일종의 혼합주의(syncretism)이다. 이 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와 때를 같이 하며 사도시대 말기의 케린더스(Cerinthus), 2세기 초엽의 바실리데스(Basilides)와 2세기 중엽의 발렌티누스(Valentinus)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케린더스는 이집트의 지혜를 공부하였고, 그의 그리스도관은 에비온주의를 따른 것으로서, 예수님이 신성을 가진 것은 침례 받을 때 성령이 그에게 내려옴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성령은 예수님을 떠났고,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 예수라고 한다. 그의 신관은 그리스 철학적인 이원론이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부인하며,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지혜롭고 매우 도덕적인 위인이며,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예수에게 깃들어 계셨다가 십자가형 직전에 떠나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은 가현이라는 것이다.

케린더스주의는 그 후 점차로 가감 증보되어 영지주의의 체계가 형성되었다. 영지주의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의 이원적 신관을 가진다. 많은 에온(Aeon)들의 집성체인 선신(善神)은 유출하여 물질계에 이르고, 또 그것은 악신(惡神)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에온의 하나로서 그의 육체는 가현적이었고, 십자가에서 떠났다. 구원관은 높은 지식을 통해서 얻는다는 것이며, 이로써 이 주의의 이름이 생겼다. 이 지식은 사색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것으로 이를 달성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영지주의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왔다. 이 지식은 비교적 신비적인 것으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pneumatic) 사람만이 소유할 수가 있다. 신앙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는 정신적(psychic) 계급의 사람들이 있는데, 선지자들이나 선량한 유대인들이 이 계급에 속한다. 이들은 참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 한 등급이 낮은 사람들이다. 대부분 인간은 물질적(hylic) 계층에 속하며, 따라서 그들은 사탄과 자신들의 육욕에 사로잡혀 희망 없이 살아간다.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물질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악하며, 구원은 이 물질을 극복하고 없이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은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가능하고, 참 지식은 영적인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온다. 물질을 멀리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물질적 향락을 삼간다. 처음에 이들은 위험의 근원을 발견하고 물질적인 것의 감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순수한 쾌락마저도 거절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할 때에 발생하는 육욕적이고 방종한 생활이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영지주의는 인간은 신(神)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영지가 뜻하는 것처럼 인간이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능력은 무한하다고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죽음 자체를 환생이라고 보고 영지주의를 비밀스러운 계시의 신화로 보며, 특정한 소수에게만 전수되는 밀교적인 지혜는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힘과 싸워서 이기게 하고 또 우주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지혜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이 사상은 뉴에이지의 근본적인 뿌리가 된다.

5. 요가

요가는 일반적으로 의(意)를 다스려 마음의 통일을 기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요가(Yoga)는 결부시킨다는 의미의 Yuj, 즉 영어의 Yoke에서 나온 말로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 한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요가의 목적은 명상에 의해서 절대자와의 합일을 실현함에 있다. 이 요가는 육체적인 훈련과 수양 때문에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으며 차원 높은 목적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 요가의 8단계는 보편적 도덕률 - 자기 정화 - 자세 - 호흡 조절 - 정신을 살핌 - 집중 - 명상 - 초의식 상태 도달이다.

이 요가는 명상 훈련에서 시작하여 자아를 해방시켜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끌어 가려는 힌두교에서 발전되어 나온 힌두교의 구성 요소이다.

뉴에이지 요가의 대부분인 마하리쉬(Maharishi)는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지에서, 요가는 자연법에 근본을 둔 진화론에 근거한 과학으로 접근하기에, 우리 삶에서 직면하는 문제들과 범죄에 대하여 적극성과 조화를 이루어 범죄의 근절을 가져온다고 주장했으며, 이렇게 시작한 신문 지면의 1/5에 해당하는 장문의 글로 자기의 요가 학교를 소개했다.

요가의 대스승이라 불리는 스리 육테스바(Sri Yukteswarh)는 어느 날 아침 햇빛을 받으면서 발코니에서 요한복음 11:1-4의 나사로의 병을 두고 예수님께서 “죽을 병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것에 착안해서, 요가를 통해서 죽지 않은 삶을 실천해 보이고 제자들에게 전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가에서는 물질적 우주와 형이상학적 우주의 합일을 말하고 천국과 지옥은 오직 마음의 산물로 규정하고 있다. 강신술, 마법, 신비 종교 등의 사상적 배후에는 요가의 원리가 있음이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

요가의 사상은 뉴에이지 운동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들로서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자신의 육체와 의식을 다스리며 나아가서는 의식 확장과 고등 의식 개발을 위해 요가의 정신 훈련과 신체 훈련을 하는데, 정신 훈련으로는 명상, 자율신경 훈련, 정신 통일과 ‘만트라’(Mantra)를 반복하는 코안(Koan, 48가지의 요가 자세)을 하며, 신체 훈련은 호흡 훈련과 연화좌, 코브라좌, 물구나무서기 등의 여러 가지 몸의 자세를 포함하고 있다. 가끔 사람들은 이러한 요가의 초보 단계인 신체 요법적 요가는 신체 이완 운동이기 때문에 아무 해악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이완 기법과 자신을 텅 비우는 수련은 다른 영의 유입을 초래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친다. 그리고 요가는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박하며, 성령이 아닌 악령을 영접하게 하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의 진리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사탄의 세력 아래 붙잡히게 하며, 악령 숭배로 귀결하게 한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심도 갖지 않고 요가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말씀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갈 5:1)


- 김 호 지음『성경의 입장에서 본 뉴에이지 운동』(생명의 말씀사)에서 발췌 -


뉴에이지 운동의 본질(2)

김 호

1. 뉴에이지의 철학적 배경

신관 -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인간관 -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내세관 - 인간이 죽은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윤리관 -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역사관 - 인간에게 있어서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신관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적인 신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범신론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즉 이 세상에 편만한 모든 것이 신(神)이며, 명상을 통해서 신과의 합일을 경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뉴에지지 사상은 절제되지 않은 낙천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그 신봉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남길 것이라고 호언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형이상학적 과학과 고대 동방종교를 혼합한 자신들의 신조가 성공할 것이며, 이는 자연적으로 기독교의 쇠퇴를 가져올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낡은 사상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므로, 이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독교가 천국을 삶 가운데 바라고 기다리는 대상으로 설명하는 반면, 뉴에이지 사상은 우리가 단지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스러운 ‘새로운 시대(New Age)'를 이룩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영혼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기존의 교리 공부, 교회 출석, 죄의 고백과 같은 방법이 아닌 “참 자아”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기술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 자체와 그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신(神)이며, 우리는 신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영적인 명상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신(神)과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하고 진정한 신이 되거나, 신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존재가 신(神)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神)이며, 존재하는 것 가운데 신(神)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우리들을 구원하실 분이 신(神)이 아니라, 싸우고 창조하며 물질을 정신(靈)으로 변형시키는 우리들이 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뉴에이지 운동의 대표적인 신관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구세주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었다. 예수는 단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싸우다가 죽은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와 같은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말고 자기의 초월적인 힘으로 자기를 극복함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무용수이며 가수인 영화배우 셜리 매클라인(Shirley MacLaine)은 대담하게도 “나는 신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신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무대 위에서 외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은 자기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이 신이라면 구태여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신관과 우주관을 말해 주는 표어는 “모든 것이 하나이며, 하나는 모두이다(All is One, One is all), "모든 것은 신(神)의 일부이다(Everything is a part of God)"이다. 이러한 표어는 범신론적인 신관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2. 인간관

뉴에이지 운동가는 인간성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인간성을 신성의 일부분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 존재의 전체성은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환상적인 것이거나 불완전하고 부정적인 기분 또는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인과(因果) 법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선과 악을 업보(業報)의 균형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인간은 도덕적 결핍으로서의 악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문제는 초월적인 명상이라든가 요가 또는 참선을 통해 생명력(a life force)을 얻어 신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의식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신과 일치할 때 비로소 해결되며,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게 될 때 선과 감정이나 의식은 사라지고 자신이 신이 된 상태에 있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범신론(汎神論)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신”이라는 신관의 기본 원리에서 출발할 때,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들은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이며 응축된 힘의 집합체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신의 합일을 위한 “새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위해서 인간과 신이 이원화되는 기존의 질서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만물이 신이다”라는 사상으로부터 “인간이 신이다”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뉴에이지 운동가의 목표는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 잠자고 있는 신성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스와미 묵타난다 (Swami Muktananda)는 “너 자신에게 무릎을 굻어라. 너 자신을 경배하고 예배하라. 신은 너 자신처럼 네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아트만이 브라만이다”(Atman is Brahman), 즉 개별적인 자아가 우주적 자아라고 간파하는 힌두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 왔건, 또는 “위의 것과 아래 것이 같다”, 즉 신과 인간은 하나라는 비교에서 왔건, 아니면 모든 지식, 능력, 진리는 내재하며 사용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아 실현을 말하는 심리학에서 왔건, 뉴에이즈 운동은 ‘너 자신이 신’이라는 범신론의 기치를 높이 세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태양을 반사시키는 거울이 태양 자체가 아닌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인격적 -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함으로 - 이라는 점에서 창조자의 반사품이요, 복사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하거나 전능하거나 전지(全知)하거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지 않다. 우리는 인격적이나 유한하고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무한하시고 죄가 없으시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왕좌를 노리는 인간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네 마음이 높아졌으므로 네가 말하기를, 나는 한 하나님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한가운데 앉아 있다, 하였도다. 네가 네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같이 정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니라”(겔 28:2).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서 내가 지극히 높이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으로 내려가리로다”(사 14:14-15).

3. 내세관

자아의 본질 자체에서 죽음이란 변함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육신을 바꾸는 것과 같다. 이생에서 축적한 인간의 지혜는 다음 생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의 순환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자신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하나이다. 하나님은 모두이다. 그리고 모두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을 신격화시키고 죽음을 부정하기 때문에 악(惡)이 원수가 아니라 무지(無知)가 원수이다. 인간은 자신이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모르고 있는 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일단 자각하기만 하면 “보다 높은 자아(Higher Self)"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와 인간성이 신적 존재로 귀일하는 것이며, 인격적 변혁을 의미한다.

퍼거슨(Ferguson)의 말을 빌리면 이것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변혁적 체험을 가지기 위한 의도적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명상, 요가, 참선, 무드 조성을 하는 음악, 마음을 신장시키는 약물, 체련, 금식, 용감성을 나타내는 그림 감상 등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 신봉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에 대한 대속 같은 것은 필요가 없으며 관계가 없다. 그들에게는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죽음이라는 것은 환상적인 것이며,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밟아야 할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천국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악의 문제와 죄에 대한 심판 그리고 의에 대한 상급을 “윤회”(reincarnation)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그들의 카르마의 법은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두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명론 또는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 대신에 인간의 모든 영혼은 결국 위대한 세계의 혼(world soul)으로 흡수된다는 불교의 사상인 니르바나(열반)로 천국을 대체하고 있다. 그들은 지옥이란 이생에서 나쁜 카르마의 형태로 거두는 것이며, 이것이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며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이 말하는 윤회설은 범신론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비성경적인 구원론, 비성경적 심판을 말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도덕은 존재하지 않으며, 선과 악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 상대적인 것이다. 특히 성경이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극히 인본주의적인 비진리(丕眞理)이다.

4. 윤리관

뉴에이지 신봉자들의 윤리관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관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전제에 기초한 철저한 상황 윤리이다. 상황 윤리란 “시대, 지역, 민족, 상황” 등에 따라 인간의 필요가 변하면 도덕의 기준도 변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서로 반대되는 모든 대립을 파괴할 계획이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이원론 문제도 소멸시키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절대적인 악도 진실도 거짓도 구분되지 않고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윤리적 기준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동성애(同性愛) 같은 성의 자유가 정당화되고, 낙태와 안락사와 같은 극히 이기주의적인 행위가 마치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울러 많은 구루(guru, 인도의 영적 지도자)들과 셜리 매클라인 같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것이 공통점이다. 그리고 구루들은 공공연하게 많은 여성들로부터 성폭행이나 강간 사건으로 고소당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윤리관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고 그릇된 것일 수 없고 상황이 도덕을 결정하며,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옳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선하다(All is good)는 전제 아래 출발하며 죄가 지적되지 않는다. 궁극적인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절대적인 선도, 악도, 진실도, 거짓도 구분되지 않고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성윤리에 절대적 규범을 가하지 않으므로 성도덕이 문란한 것이 많은 구루들과 뉴에이지 기수들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뉴에이지 구루인 쉬리 라즈니쉬(Shree Rajneesh)는 자기와 성관계하는 여자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다가 너무 많아서 기록을 포기했다고 공공연히 고백하기도 했다.

뉴에이지 운동의 광적(狂的)인 수석 여사제라고 불리는 셜리 매클라인은 그녀의 저서 『궁지에 빠져서』 (Out on a Limb)에서 육체를 벗어나서(Out of the body experience) 자신의 전생(前生)을 보게 된 환상을 말한다. 그녀는 일단 비가시적 세계에 들어가면 시공을 초월하게 되며 크리스 크림슨의 침을 맞으면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자신의 초자아를 만나게 된다고 밝혔다. 그 초자아는 그녀에게 “나는 제한되지 않은 높은 차원의 너 자신이다”(I am your higher unlimited self)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 초자아를 자신의 인도자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셜리 매클라인에게는 가르침이라고 부를 만한 분명한 윤리성이나 도덕적 교훈이 없다. 그녀가 정치적, 도덕적으로 주장하는 이슈는 자유(自由)이다. 그녀의 결혼과 사생활에 대한 관념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곧 이혼한 후 여러 명의 연인을 가졌고, 그러한 관계에 대해 슬픔이나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의 윤리성은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 되기 위한 자기 개발과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말하기를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녀의 윤리관은 자기중심적이며 모순에 차 있다. 그녀가 심취해 있는 사상 체계는 결코 우리에게 인생의 참의미를 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윤리적 삶의 모습은 새로운 삶,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이 어떤 다른 인간과 달랐던 한 가지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분이 의미했던 것은 윤회에 의한 환생이 아니었다. 그분은 무덤에 들어갔던 그 육체대로 살아나셨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증거는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부활의 증거이다.

예수님은 자기희생과 섬김의 삶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의 윤리는 하나님 중심이요, 타인 지향적이다. 그분의 가장 큰 계명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은 여러 비유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셨고, 사회의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방황하는 가난하고 눌린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신이며 선악을 심판할 수 있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이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분과 화해가 필요한 존재로 다루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다. 우리의 임무는 잃어버린 신성을 기억해 내어 뉴에이지가 주장하는 신격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 즉 우리 인간은 모두 원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의 생을 살아야 하며, 여기에 참 인생의 희망과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역사관

뉴에이지 사상은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인간 중심의 역사관과 동서양의 두 가지 역사관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즉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목표로 한 진보주의적 혹은 진화론적 사관과 동양의 종교에 나타난 윤회 사상에 기인한 순환사관이다. 이 두 유형의 역사관은 하나의 기본적인 전제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신격화이다. 그리고 이 신격화를 통해 세계 정부, 즉 지상의 천국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위의 두 유형의 역사관은 차이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인간 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역사 인식의 출발이 인간이고,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책임지며, 인간의 종교적 노력과 이성과 기술 능력으로 역사를 변화시키겠다는 인간 중심의 역사관이 공통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뉴에이지 역사관의 목표는 첫째로 인본주의의 부활이다. 중세의 신본주의에 억눌렸던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자 했던 것이 르네상스(Renaissance)라면, 물질 문명에 의해 인간을 잃어버린 현대에 인간 스스로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자는 제2의 르네상스(Re-Renaissance)가 뉴에이지 운동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은 문명도 기존 종교도 아니며, 오직 인간 스스로 잠재된 영적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 블래바트스키나 퍼거슨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뉴에이지 운동이 각종 활동에서 인간 정신력의 신비한 힘들 - 심령술, 초능력, 최면술 - 을 강조하는 것은, 기존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 의해 끌려가는 나약한 인간상이나 문명에 가위 눌린 노예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뛰어난 자기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기존의 모든 비인간적 구조를 타파하고 인류가 하나되는 인류 박애주의적인 평등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자기 회복과 박애적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바람직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어 가는 방법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설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적그리스도를 통한 세계 정부 수립에 목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지만 뉴에이지 운동에서 말하는 인신(人神)은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되는 평등 세계 또한 특정한 권력 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 권력 기구를 해체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 사람이 주체적으로 주인이 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에이지 운동을 적그리스도로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기존의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뉴에이지 운동의 비기독교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김 호 지음『성경의 입장에서 본 뉴에이지 운동』(생명의 말씀사)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