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교회가 텅 빈 유럽 교회처럼 화석으로 남을 것인가

한국 개신교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직면해 있다. 유럽의 교회처럼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관광지로 전락하느냐, 아니면 다시 한 번 개혁을 통해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 가느냐. 희망을 갖고 바라보기에는 너무 어둡고, 절망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현주소다.

개신교가 구한말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은 말 그대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 은둔의 나라였다. 열강의 침탈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가난한 나라, 자주적으로 외교와 국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국력이 미약한 나라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전 국토를 뒤덮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한 나라에 개신교는 앞서 들어왔던 가톨릭과 함께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암울했던 구한말의 격동기에 한 가닥 희망의 등불을 밝혀 주었다. 반상의 구분이 뚜렷했던 시절 대부분의 서민들은 문맹과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개신교는 학교를 세우고, 농촌을 계몽하고, 병원을 세워 그들을 깨우치고, 가난과 질병 퇴치에도 힘을 썼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뿌리 내려 일제 치하에 많은 민족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믿음의 좋은 선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순교의 희생, 공의를 이 민족의 가슴에 희망으로 심어 주기도 했다.

고난과 희생 대신 기복신앙이 판을 쳐

한국 개신교는 정말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수단과 희생을 통해 복음을 전했으며 말씀이 곧 살아서 역사하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갔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목사는 시대의 양심이었던 시절이 바로 이 시기였다. 이 시기에 얼마 안 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복음전파와 함께 깨어있는 자로서 사회의 중심적 역할들을 감당하였다.

전통적인 유교 국가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사회적 관습과 인습 속에서도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으며, 사회적 존경은 아니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식의 구별된 삶을 살아 어떤 사회계층보다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조국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은 빠른 속도로 물질적 팽창을 통해 산업화를 이루어 갔고, 여기에 교회는 이를 흡수·소화할 겨를도 없이 세상적 속도를 따라 가기에 바빴다. 산업화의 가속도로 인해 농촌의 인구는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도시의 교회는 밀려드는 새신자들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외형이 커져 갔다.

세상이 물질적·외형적으로 팽창하고 이에 따라 교회도 맘모니즘으로 팽창하기 시작함에 따라 한국 개신교는 십자가의 희생 대신 부활의 영광만이 가득한 기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통과 희생을 수반한 십자가의 좁은 길보다는 부활의 영광이 가득한 축복의 대로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 해결과 축복만이 성도들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예배시 설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증거 하는 대신 오직 축복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십자가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교회에서 가려지기 시작했다.

십자가가 교회에서 밀려나면서 기복주의가 만연하기 시작하였고 "교회 나오면 축복받고 부자된다. 세계 부호들은 십일조 잘해서 복 받고 부자 됐다. 십일조 안 하면 하나님이 사업을 망하게 하고 자식들이 잘못된다"는 식의 율법과 은혜를 교묘히 섞어 애매한 복음이 교회 강단을 통해 선포되기 시작했다.

교회 돈은 차고 넘쳐 흘러

한국 개신교가 거제는 드리지 않으면서 그 헌물인 십일조를 유독 강조함으로써 교회는 물질이 차고 넘치기 시작하였고, 그 물질은 구제와 선교보다는 교회의 덩치를 키우고 부동산에 투자되는 등 교회 본질을 벗어나 기업화를 향하기에 이르렀다.

목사 스스로 레위지파요 제사장으로 여기고, 목사직만을 성직으로 구별하면서 십일조는 목사를 위한 것으로 여기게 되니 십일조 헌금은 교회에서 가장 덩치가 큰 물질이면서도 이 물질은 쉽게 밖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그렇기에 교회마다 주일헌금, 선교헌금, 구제헌금, 이웃돕기 헌금 등 별도의 목적 헌금을 걷어들이고 있고, 추수감사, 성탄절감사, 신념감사, 부활절감사 등 절기헌금과 생일감사, 이사감사, 심방감사 등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에 가까울 정도의 헌금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1년 경상예산을 보면 대부분이 교회 내부적으로 소화하는데 책정되어 있고, 교회 본연의 구제와 선교헌금은 전체를 합쳐도 예산의 10%를 넘지 않는다. 이를 볼 때 한국 개신교는 근본적으로 물질로 부패하고 망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정치구조를 이루고 있다. 교회에 넘쳐나는 돈을 목사가 함부로 전용하거나 꺼내 쓸 수 있도록 재정관리가 극도로 취약한 것은 교회의 헌법이 담임목사가 교회를 좌지우지 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 헌법은 담임목사가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 의장을 모두 맡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교회의 3권을 모두 담임목사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장로나 집사가 형식적으로 맡고 있는 재정부장이나 회계는 아무 힘을 쓸 수가 없다. 교회를 나가고자 결심하지 않는 이상 장로나 집사가 당회나 제직회에서 담임목사의 뜻을 거스르는 다른 말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이 수억에서 수백억 원의 헌금을 유용하거나 전용하여도 현 한국 개신교의 현행 헌법구조로는 이를 어찌할 수가 없다. 당회원인 장로의 역할이 헌법에 규정한 일부 기능인 지교회 부동산 관리와 헌금 수집방안 강구를 주 임무로 하고, 당회에서 거수기 역할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제직회가 목사의 진행 속에 형식적인 추인 역할에 머무르는 한 제어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한낮 공상에 불과하다.

이 상태로 향후 10년을 가게 되면 한국교회는 반드시 쇠퇴 일로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세상적 지탄을 받으며, 세상의 언론과 방송 매체들로 부터 비판을 받게 되는데 어떻게 개신교가 이 땅에서 복음 전파의 사역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겠는가!

십자가의 흔적은 있나

한국 개신교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직면해 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부패를 가속화해서 유럽의 교회처럼 텅 빈 예배당으로 화석처럼 남을 것인가, 아니면 교회 본연의 자세와 모습으로 돌아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로서 희망으로 남을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생활을 반추해 보며 스스로 물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나는 교회에서 정말 예수를 믿었던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기 위해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걷고 있었는가. 나는 교회의 직분과 담임목사의 눈을 의식해서 종교놀음에 치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우리 마음에는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행동에는 십자가의 희생이 따라야 한다. 지금의 이 어두운 시대에 그나마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000명의 의인들이 '교회개혁'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은 이 길이 십자가의 고난의 길임을 안다. '바위로 계란치기'임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알기에 오늘도 부패한 개신교의 현실을 향해 '개혁'을 외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아니고는 오늘날 부패한 한국 개신교를 치유할 수가 없다. 한국 개신교는 하루 속히 목사교에서 벗어나 베드로의 고백위에 다시 교회를 세워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었으면 한다.

민병일 jubilmin@hanmail.net

2004년 12월 13일

뉴스앤조이